이 텍스트들은 내 영화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거니와 애초에 내가 ‘시나리오’와는 다른 것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미장센을 참조해서 쓰거나 하진 않았다. 이 텍스트들은 초안부터 완전히 문학의 모양새를 취했다. 「P.7_서문」
프랑스어에서 ‘moral(모럴)’이라는 형용사는 ‘도덕적인’이라는 뜻이지만 더 넓게는 물리적인 것과 대립되는, 정신에 관한 것을 뜻한다. 로메르 자신도 서문에서 이 영화들을 ‘도덕 이야기’ 연작으로 부르는 이유가 ‘구체적인, 물리적인’ 사건 없이 모든 일이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도 우리말에서 ‘도덕’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어감보다는 좀 더 광범위하게, 정신의 경험과 상상과 추이를 다루는 작품들로 이해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역자는 말한다.
하나의 주제를 여섯 가지로 변주해가면서 통찰의 깊이를 더한 작품
“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_에릭 로메르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는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 원래 여자에게 돌아간다는 하나의 주제를 여섯 가지로 변주한다. 인간의 내면과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탐구하고 그 일을 묘사하는 데 흥미를 보인다는 점에서 ‘모럴리스트’라 불리는 에릭 로메르는 삼각관계에 놓인 남녀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남자가 결국 둘 중 어느 여자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남자의 마음 상태와 머릿속에서 오가는 생각들을 중요하게 다룬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 안에서 특별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고, 명확한 철학 즉, 작가의 것이 아닌 인물의 철학이 설명될 수 있게끔 하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목표였다. 인물들의 행위 자체보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그 특정 순간에 주인공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인생관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더욱 다채롭게 채워간다. 이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는 특정한 느낌이 분석되고 주인공 자신들조차 그들의 느낌을 분석하는 매우 사유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작품이다.
「몽소 빵집 아가씨(La boulangere de Monceau)」
법대생인 슈뢰더는 파리 시내의 노천카페에서 친구 슈미트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화랑에서 일하는 실비 또한 이맘때쯤 늘 거리를 지나간다. 슈뢰더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실비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수줍은 성격 때문에 좀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다. 어느 날 슈뢰더는 어렵게 말을 거는데 성공하지만, 그 이후 실비는 거리에서 사라진다. 그녀를 찾아다니던 슈뢰더는 몽소 거리의 빵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가 점점 자신에게 빠져든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진 슈뢰더는 그녀를 유혹해 데이트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빵집 아가씨를 만나기로 한 그 순간 사라졌던 실비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 도시의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남녀의 우연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파리의 거리 풍경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쉬잔의 이력(La carriere de Suzanne)」
주인공 베르트랑과 친구 기욤은 생미셸 대로의 한 카페에서 쉬잔을 알게 된다. 기욤은 자연스럽게 쉬잔에게 말을 건네고, 그녀를 자신의 홈 파티에 초대한다. 기욤은 항상 자신의 여성 편력을 과시하고 베르트랑을 승리의 증인으로 삼으며 이용한다. 베르트랑은 그런 기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솔직하게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휘둘리기 일쑤다. 한편 쉬잔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베르트랑에게 시간과 돈을 써가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결과는 뻔하다. 이번엔 베르트랑에게 접근하는 쉬잔. 어쩌면 쉬잔 스스로 유도했을지도 모르는 치맛단의 말썽을 핑계로 베르트랑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우기지만 그녀의 품행과 외모를 멸시로 일관했던 베르트랑은 쉬잔을 무시한 채 잠을 청한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Ma nuit chez maud)」
장 루이는 파스칼 철학에 관심 있는 가톨릭 신자다. 그는 성당에서 알게 된 프랑수아즈에게 관심이 있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한 식당을 찾은 루이는 우연히 옛 친구 비달과 마주친다. 비달은 자신의 애인인 모드의 집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이혼 뒤 딸과 사는 모드는 자유분방하고 지적이며 매력적인 여성이다. 장 루이와 비달, 모드는 사랑, 종교, 도덕, 철학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밖에는 눈이 내리고, 비달은 갑자기 집에 돌아가야겠다며 장 루이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모드와 단둘이 남겨진 장 루이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다. 모드는 그런 장 루이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옷까지 벗어가며 유혹하는데……. 장 루이는 몇 년 뒤, 해변에서 우연히 모드를 만난다. 그리고 그동안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어떤 진실을 알게 된다.
「수집가(La collectionneuse)」
약혼자가 런던으로 떠난 사이 아드리엥은 휴가를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안 하며 평화롭고 금욕적으로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친구 다니엘도 여자에겐 관심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골집에 먼저 묵고 있던 아이데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데는 남자들을 자주 바꾸는 자유분방한 여자다. 아드리엥과 다니엘은 그녀를 ‘연인 수집가’라고 비난하며 부도덕하다고 말한다. 아이데의 수집품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드리엥과 다니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위트 있고 에로틱하게 그린 작품이다.
「클레르의 무릎(Le genou de Claire)」
외교관이자 작가인 제롬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혼자서 프랑스의 안시 지역을 여행한다. 호수에서 우연히 그는 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설가 오로라를 만난다. 현재 그녀는 이곳의 저택을 얻어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오로라는 제롬에게 집주인 W 부인을 소개해준다. W 부인에게는 이복자매인 두 딸이 있는데, 현재는 집에 없는 클레르와 방학을 맞아 집에서 빈둥거리는 둘째딸 로라가 그들이다. 로라는 연상의 제롬을 보고 이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제롬은 모델 같은 몸매를 갖고 있는 클레르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 클레르의 무릎을 향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오로라는 클레르의 무릎에 손을 얹는다면 그의 모든 고민이 해결될 거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클레르는 제롬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얼마 후 제롬은 클레르의 남자친구 질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리며, 클레르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한다.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클레르가 제롬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그때를 이용해 제롬은 위로하는 척하며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는다.
「오후의 연정(L’amour l’apres-midi)」
주인공 프레데릭은 고등학교 영어 교사인 엘렌과의 결혼생활이 무료하고 갑갑하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떠나게 해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또한 결혼한 이후에는 모든 여자들이 예쁘게 느껴진다. 다른 여자들과 연애하고 싶다는 욕망은 상상으로 해소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도, 집도, 연인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보헤미안적인 삶을 사는 클로에가 나타나 프레데릭의 단조로운 오후의 일상에 활력을 선사한다. 몇 번의 만남 이후 자유로운 삶을 살던 그녀도 이젠 안정적인 생활을 원한다고 말한다. 집과 직장도 얻었고, 무엇보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녀가 생각하는 아이의 유전적인 아빠가 바로 프레데릭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와의 결혼도 원치 않는다. 프레데릭의 명백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유혹을 시작한다. 알몸으로 침대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프레데릭은 욕실에서 옷을 벗다가 아이와 놀아주던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