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 조승형 문자조형전
일시 : 2010. 5. 11-6.2
장소 : 대구 인터불고 호텔 엑스코 아르토 갤러리
오픈 : 5월 18일(화) 오후 6시
쇠로 빚어낸 이지적인 문자조형의 미학
-지곡 조승형의 문자동행전 (文字同行展)-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서각은 주로 나무에 문자를 새기는 예술장르이다. 지곡(智谷) 조승형(趙承衡)은 나무에 새기던 문자를 다양한 재료에 새겨왔다. 특히 쇠와 구리 등 금속이란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서각재료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지곡에겐 첫 번째 전시이지만 이런 측면에서 서각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89년 이현춘, 안민관, 유장식선생이 백악미술관에서 현대서각 3인전을 개최하면서 서각계 내외에서 현대서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났던 이 전시는 서각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국내 서각계를 살펴보면, 외형적으로는 인구도 늘었고 작품의 양식도 다양화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재료와 각법(刻法), 장법(章法), 채색법(彩色法)에 있어 지나치게 수구적인 무덤덤함 작가들의 창작행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곡 조승형은 현대서각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던 10여년전부터 서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 사업상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피폐해진 내면을 살찌우면서 정서적 안정을 위해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던 서각과 서예에 몰입했다. 팔공산자락에 거주하면서 인근의 혜안스님에게서 망치와 칼을 잡는 방법을 익힌 뒤 현판과 주련 등을 새기면서 재미를 붙여 나갔다. 그러던 중 현대서각의 예술성을 목도하면서 목암 유장식선생을 만나 서예와 서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오창석의 전서, 안진경의 해서, 조전비 등의 예서, 금문(金文) 등 다양한 고전을 통한 서예실기와 칼끝으로 나무바닥의 요철을 살려나가는 목암선생 특유의 현대서각법을 동시에 지도받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문자를 매개체로 예술성을 살려나가는 서각에 있어서 서예공부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붓과 칼을 잡는 시간이 비슷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한국서각협회 초대작가, 한국서예협회 대구지회 초대작가로 등단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동안 그가 문자와 함께 동행하면서 온축(蘊蓄)해 온 작품들을 ‘문자동행전’이라는 주제를 걸고 선보이고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이 타자와 차별화되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작가가 대상을 인식한 뒤 작품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재를 달리 적용하든가, 아니면 표현방법을 다르게 모색 하는 등의 차별성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드러난 지곡의 작품들은 첫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표현방법에서 차별화를 모색하고 있어 신선해 보인다. 전시작품을 살펴보면, 그 동안 작품창작을 위해 전통서각의 한계와 싸우고, 작가자신의 학습과 경험에서 비롯된 고정화된 패턴을 넘어서고자 고뇌한 흔적을 체감할 수 있다. 작품에서 드러난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지금까지 공부해 왔던 것들을 한 매듭짓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서각가의 작품에서 감상자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칼놀림과 색채의 사용이다. 전통서각과 다르게 끌을 이용한 대범한 바닥처리수법과 나무를 뜯어내듯이 처리한 칼솜씨가 그것이다. 또한 중간톤의 무게감을 지닌 색채감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만의 새로운 조형언어는 꾸준한 실험과 작품연구를 통해 체득할 수 있다. 지곡이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갖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은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의 작품에는 칼이 주는 양강의 미[陽剛之美]와 색감이 주는 음유의 미[陰柔之美]가 적절하게 어울어진 독특한 조형미감이 녹아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작가의 현재 조형미감을 가늠할 수 있으며, 향후 작품발표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둘째, 금속이란 소재를 서각재료로 채용한 점이다. 사실 지곡은 ‘월드석산’이라는 금속을 다루는 기계회사의 대표이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속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를 서각작품으로 제작하는 작업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우리는 문자를 새기거나 녹여서 만든 그의 작업에서 사용된 쇠[鐵]나 구리[銅] 등의 소재를 통해 이지적이고 서늘한 미감을 느낄 수 있다. 쇠는 재료상 나무가 주는 온화한 느낌과는 다른 차가운 느낌을 자아낸다. 금속종류는 쇠, 놋쇠, 청동, 황동 등을 즐겨 사용하는데 쇠가 지닌 강하면서 서늘한 맛을 살려내고 있다. 작품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청동이나 황동을 녹여서 쇠에 도금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서각을 하면서 표현재료는 주로 나무를 많이 사용한 편이지만, 최근에는 금속, 돌[石] 등 다양한 재료를 잇달아 실험하면서 감상자들에게 열린 조형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각종 재료를 이용한 입체각을 선보이고 있다. 전통서각이 서법을 중시한 문자위주의 평면표현에 치중했고, 현대서각이 여기에 미술적인 환조요소를 추가했다면, 지곡이 지향하는 서각은 종합예술적인 입체성향이 짙다. 그것은 서예와 서각에 조각과 공예적인 요소까지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면과 환조에서 벗어난 입체각은 어떤 공간에서 보아도 나름대로 시선을 끌게 된다. 이런 입체각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작가는 상형성이 있는 고대문자를 입체화하기 위해 늘 고심한다. 따라서 금문이나 갑골문에서 주로 나타나는 상형적이면서 회화적인 요소를 살려서 작품으로 만든 그의 조형시각은 우리에게 깊은 함의를 갖게 한다.
작가가 갖추어야 할 조형사고에 있어 핵심은 변통(變通)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주역』「계사전」에 나온다. 즉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窮即變, 變即通, 通即久]"라는 뜻이다. 지곡은 이제 작가로서 서각계에 데뷔한다. 그는 사업이든 작품이든 늘 최선을 다해 변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조형시각이 변해야 작품도 변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다양한 재료를 실험해 온 것처럼 선변(善變)하여 자신의 마음을 아로새긴 작품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한다.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 대구예술대 한국미술콘텐츠학과에 입학해서 미술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의 창작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수많은 작가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공부를 해 왔지만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서는 과거작가들의 작품은 자양분은 될 수 있어도 창작의 주체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작가자신이 변해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자명하다. 작가는 매 순간 열린 조형사고를 가지고 변하지 않으면 비슷한 작품을 찍어내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모쪼록 지곡이 첫 개인전을 앞두고 가졌던 새순처럼 신선한 변통의 각오들이 다음전시에도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