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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묵상글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 다 지나간 뒤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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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 지나간 뒤에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미움밖에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사랑을 포기한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확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깨닫고 나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 강아지라도 사랑할까 저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데
지금은 강아지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여러 번 자기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경험을 한 다음부터,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버겁다고 느낀 다음부터 인간 사랑을 포기하고,
강아지 사랑밖에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어 할까?
왜 인간은 사랑 타령을 그리도 좋아하고 많이 할까?
그 근원을 생각해보니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사랑이 거부당한 경험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거나
사랑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그 반감으로 오히려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면서 인간에게는 꼭 뭘 바라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훌륭하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하면 뭔가 응답이나 보답이 있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치 않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아무튼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실패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하느님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하고 싶지만
가장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보이지 않는데,
응답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느낍니까?
그러니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사랑하겠노라고 감히 까불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진 사랑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겸손히 청하며 사랑의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현존 체험은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하늘이 보이듯
감각적 인간 사랑이라는 구름이 걷혀야 감각을 넘는 하느님 사랑이 보입니다.
엘리야는 사랑은커녕 적대자와 원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쳐 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하느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나간 뒤에야 주님은 보이고 들립니다.
거창한 기적과 함께 강하고 자극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길
지금까지 바랐다면 그런 것들이 다 지난 뒤에야 하느님은 나타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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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을 길인 계명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 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과 15장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중계명이 한 계명으로 통합되며,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차지하고라도,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는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맨 먼저 앞세우고 있는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대체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세상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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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 그러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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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톨스토이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인생의 의미를 알고 무덤에 묻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나도 사랑해!”가 아닐까요? 1년이 넘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가 아닐까요? 오랜 가뭄으로 바싹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아닐까요? 어렵게 국경을 넘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가장 얻고 싶은 것은 신분을 보장하는 “영주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문사가 재정적으로 걱정 없을 정도로 구독자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사람들의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께 병중에 있는 딸을 치유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만 갈망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마음이 모질고, 하느님을 시험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혼배 주례를 하면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생명이 넘치는 이유는 끊임없이 아래로 물을 내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사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부부는 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내어 줄 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이야기 해줍니다. 또 하나 물 이야기를 해 줍니다. 두물머리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두 강은 두물머리에서 만나고 하나의 강을 이룹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혼인은 배우자가 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이제 함께 더 넓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서로만 바라보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 서로 도울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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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신앙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바쳐야 할 기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청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모든 기도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기도 다음 나의 청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 아오스딩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실린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거기서 기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다 성인도 “우리는 이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을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청원만을 외치는 공허한 기도가 되어서는 단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외치셨던 많은 성인·성녀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청원에 앞서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만 이루어지길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뜻이 먼저다 보니 하느님 뜻은 아예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 생활의 고민을 예수님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계명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이는 오히려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면서, 쓸데없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과연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사랑 없는 종교 생활은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합니다. 따라서 철저히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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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사람일수록 남을 경멸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포용력이 있는 법이다(필릭스 레크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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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받으소서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예전 신자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사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여기서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신학교때 동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수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해 여전히 수사라 부르고, 또 많은 분들도 수사라 부르는 것이 좋다며 수사로 부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대답전에 묻습니다.
“형제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삽니까?”
거의 대부분 웃으며 대답을 못합니다. 하나 덧붙여 묻는 질문입니다.
“형제님의 삶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아내는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자녀들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역시 웃기만 할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결론으로 저는 주저없이 답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찬미의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공통적 답변일 것입니다. 저에게 삶은 두말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삶은 하느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삶에서 샘솟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평생 하느님 찬미의 기도를 주업으로하여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이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주일마다 아침 1시간 동안 노래로 바치는 “주님을 찬미하라”로 시작하여 “주님을 찬미하라”로 끝나는 긴 다니엘의 찬미가는 사랑의 찬미, 기쁨의 찬미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들꽃같은 삶”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쓰레기 내지 않고
물주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도 무리를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자발적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 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무려 22년전 시를 오늘 인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찬미받으소서-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에서는 천주교,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가 일치할 것입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이 수도원에 와서 압도되어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이 바로 저녁 성무일도시 하느님 찬미의 노래입니다.
“찬미받으소서”, 바로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하는 이젠 고전의 반열에 속하는 2015년6월16일 반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회칙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리의 빛을 발하는 고전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책자 뒷표지의 소개글입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아주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영성서적입니다. 결론부분은 생태교육과 영성에 대한 금과옥조의 실제적 처방입니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향하여,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에 대해 교육하기, 생태적 회개등, 참으로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인류와 세상 피조물이 살아남기 위한 생태적 회개가, 생태적 혁명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참 고무적이요 좋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바로 오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오늘 복음이 특히 그러합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둘째까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에 화답하여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며 그의 영성을 인정하십니다. 아, 이제 이웃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해야할 절체절명의 기후위기의 시대입니다. 여기에 결정적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수도원의 5마리 반려견들일 것입니다. 저렇게 사람을 따르는 개처럼 우리도 주님의 따라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찬미는 한결같고 열렬할 수 뿐이 없고 영육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명약은, 영약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날로 확고해지면서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이웃 형제들과의 사랑도 저절로 함께 깊어질 것입니다.
물론 자연 피조물도 이웃 사랑에 포함됩니다. 참으로 사람 형제를 비롯하여 피조물 형제들까지 망라한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제가 “찬미받으소서” 강론 제목을 택한 것은 바로 제1독서에서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라구엘의 딸 사라가 혼인하여 합방하기전 바친 기도문에서입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멘. 아멘.”
기도문이 참 멋지고 아름답고 적절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혼부부가 첫날밤 바칠 기도문에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이 이웃사랑의 기초가 됨을 깨닫고 배웁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다 악취에 주변을 살펴보니 개천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맑게 흐르며 찬미가를 부르던 시냇물이 말라 버린 것이며 웅덩이에 고인 썩은물에서 나는 냄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와 시편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찬미의 강”으로 살도록 해줍니다. 이를 요약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다음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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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율법 학자의 물음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여라. 또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여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큰 가르침의 앞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이것은 예수님이 랍비, 즉 유다의 스승으로 불리던 랍비의 모습을 지니셨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유다 민족이 빠스카 축제를 시작할 때 겉옷을 입고 신을 신고 음식을 나누기 전 집안의 가장이나 스승은 “이스라엘아, 들어라.”라고 외치며 구원의 역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스승으로서 율법 학자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바꾸어 보면 사랑할 때 언제나 우리 자신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하고 나처럼 사랑하고…. 그렇게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나만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최고로 사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잘 보살펴 주고 감싸 안아 주라는 말입니다.
내 안에 상처가 있다면, 내 안에 아픔이 있는데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상처로 인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잘 살펴주고 사랑 충만하도록 잘 가꾸어주면 우리 안에 가득한 사랑은 우리 밖으로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나나
다른 나라에서는 바나나로 튀김을 하기도 하고 쪄먹기도 하고
바나나로 술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 모양도 종류도 다양합니다.
예전에는 귀해서 쉽게 먹을 수 없었던
바나나
그래서 아주 귀한 몸이셨던
바나나
그런데 지금은 저렴한 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전만큼 귀하게도 특별하게도 보지 않습니다.
바나나와 우리 신앙이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처음 전해졌던 그때는 미사성제가 귀했는데
이제는 언제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사성제는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바나나
미사성제에 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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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
사랑을
알고 있어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네요
사랑을
하고 싶어요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고 있네요
사랑을
하고 있어요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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