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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하계 ER캠프 여행기
첫날, 2018.08.01. 수
양양 면옥치리 명길형 농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경이었다. 농장은 좀 변해 있었다. 들목에 검은 철제 대문이 세워져있고 작년이든가? 기를 쓰고 언덕 중턱에 올려놓은 참나무가 가지런히 세워져 흰 버섯을 달고 있었다. 무엇보다 수돗가에 사각으로 콘크리트를 깔았는데 매우 반가웠다. 시골에서는 이래야 닭을 잡거나 샤워를 할 때 제격이다. 명길형과 간단히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웠다. 명길형은 집으로 가고 나는 옷을 벗고 수도를 틀어 샤워를 했다. 100미터 암반에서 올라오는 물은 비길 데 없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알몸으로 아래를 내려 봤다. 3,500여 평의 농장에는 옥수수, 블루베리 등이 심겨있다. 어둠이 깔린 농장을 바라보며 나의 시골, 지금은 착잡한 그 꿈을 떠올렸다.
도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꿈꾸고 시골로 들어간 때는 2000년이었다. 도시의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심을 극복한 새로운 문명은 시골에서 발아할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선택한 시골행이었다. 월세 5만 원짜리 허름한 집 하나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불러들였다. 농민모임을 만들고 도시의 기업과 협력계약을 맺고 서초구에 유기농매장을 차리고 집 근처 논과 밭을 얻어 농사를 짓는 일은 힘들기보다는 보람찬 삶의 동력이었다. 공동체를 꾸릴 땅을 구입하여 흙집을 짓고 유기농업을 하는 동안 인구유입이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에 도달할 즈음, 때마침 노무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하던 농촌마을 만들기 사업에 합류하였다. 동료들을 남기고 나는 2006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10여 년 동안 농촌마을 만들기 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농촌, 또 공동체란 것이 내 이상, 혹은 내 능력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갔고 내 꿈에서 농촌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렇지만 젊음을 바친 꿈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 아주 없어질 수는 없어서 농촌에 가면 착잡한 마음이 든다. 차라리 작은 농장 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도농연대니 농촌사회니 하는 큰 꿈 대신 나 자신을 위한 소박한 꿈으로 살았다면 어쩜 나는 내가 이루고자 했던 농촌과 도시의 건강한 연대에 더 가깝게 다가서 있을지 모른다. 인생이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고만 헛된 꿈으로 소비한 것 같은 젊음을 떠올리게 하는 농촌은 만감이 교차하는 그런 곳이다.
무거운 맘으로 참나무를 쌓아놓은 뜰 앞에 텐트를 쳤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쏟아졌다. 농장에서 키우는 개 두 마리가 새 손님이 낯선지 밤새 쉼 없이 짖어댔다. 개소리에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3시 경이 되니 그제야 개가 짖기를 멈췄다. 살았다 싶어 깊은 잠을 청하는데 이건 또 뭔가, 닭들이 울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6시 반 경 흥용이가 왔다.
둘째 날, 목
원래 계획은 흥용이와 면옥치에서 미천골을 지나 정족산을 걸친 87km의 길을 자전거로 도는 것이었으나 너무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조대에서 동해안을 타고 통일전망대까지 왕복 코스로 수정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은 완전한 실수였다. 재작년이든가 속초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별 힘 안들이고 갔다 온 걸로 기억한 나는 금방 돌아올 것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에 쌓여 거리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이 결정 하나로 그날 내내 흥용이한테 군소리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복 200Km, 13시간 10분(아침 8시5분 출발, 오후 9시 15분 도착)에 걸친 길을 달렸으니 MTB를 처음 접한 흥용이로서는 엉덩이에서 불이 난다는 둥, 피* 쏟겠다는 둥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여튼 그 날, 둘이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 면옥치로 돌아왔다. 흥용이는 차 안에서 자고 나는 농장으로 올라와 샤워하고 텐트에서 잤다. 하루를 겪어서인지 신기하게도 개들은 전혀 짖지 않았다. 진돗개라더니 역시 똑똑한가?
셋째 날, 금
6시에 일어난 흥용이와 나는 가볍게 설악 구경이나 하자는 심산으로 배낭을 꾸렸다. 어젯밤만 해도 곧 죽을 사람처럼 굴던 흥용이도 몸이 개운한지 예의 그 쾌활한 목소리가 살아난 상태였다. 우리는 예약을 하지 않은 관계로 한편의 시를 위한 길 정도 후딱 갔다 오자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 또한 막상 한편의 시를 위한 길에 들어서 뜨거운 태양 아래 피로가 누적된 발로 한걸음씩 떼어나가면서부터 여지없이 무너졌다.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차가 밀려 중간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갔다.
토왕폭 쪽으로 방향을 틀고 바로 들목에 들어섰다. 바위 아래까지 가는데 피로에 쌓인 발이 천근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늘 하나 없는 바윗길은 태양이 무섭게 내리쬐었다. 불볕 아래 우리는 기다시피 바위를 올랐다. 몸에서는 비처럼 땀이 쏟아졌다. 가끔 정신줄이 떨어져 다리가 휘청했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둘 다 원래 간식을 잘 안 챙기는데다 물마저 떨어져가 겨우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 마른 몸을 달래며 가까스로 노적봉에 올랐다. 봉우리에 올라서니 얇은 담배꽁초하나가 보였다. 지친 나는 그거라도 한 대 피우려고 챙겼지만 둘 다 라이터가 없었다. 흥용이가 형님, 정말 힘든가 봐요. 꽁초를 다 찾고, 하면서 빙긋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해는 여전히 뜨거웠고 정상이라야 바람한 점 없었다.
내려오는 길 역시 조심스럽고 힘들었으나 나무가 태양을 가려준 데다 조금만 가면 계곡이 나온다는 기대에 의지해 내려왔다. 한 시간 정도 내려오니 4인의 우정길이 보이는 계곡 웅덩이가 나왔다. 둘이는 옷을 벗고 물에 잠겼다. 날이 뜨거워서인지 다른 때처럼 오싹하지 않았다. 한참을 물속에서 놀다가 내려왔다. 설악동에서 걸어오는 길, 설악호텔 쯤에서 흥용이가 고향에서 먹곤 했다는 자두처럼 생긴 작은 열래 고야를 발견했다. 둘이는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주웠다. 시큼한 게 입맛을 돋우고 피로를 풀어줬다. 흥용이 윗도리에 한 봉지만큼 담아왔다. 명길형과 함께 연탄구이 집에서 밥을 먹고 우리는 주차장에 잠자리를 폈다.
넷째 날, 토
사람들 소음 때문에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3시에 눈을 떴다. 오늘은 6시에 ER에서 하는 자전거 라이딩에 참석하기로 했다. 흥용이와 나중에 펜션에서 보기로 하고 먼저 가리산 펜션으로 향했다. 한 시간 쯤 지나 펜션에 도착하니 다들 자고 있었다. 장소에 대한 기시감에 자세히 보니, 실제로 오래 전 수해 때 시체를 수습하였던 곳이었다. 마을 표지판을 보니 그 때 장면들이 걸려있었다. 표지판에 따르면 그때가 2006년, 벌써 12년 전 일이다. 이럴 때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은 새삼스럽다.
한 사람씩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펜션이 북적거렸다. 오늘 자전거타기에 참여한 사람은 6명. 주홍, 명원, 기철, 동우와 나는 자전거, 용근이는 칸보이다. 나는 내심 허벅지와 장단지가 버텨줄지 걱정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업힐하면서 힘을 받으면 지친 다리에 쥐가 날 수 있고, 그럼 팀의 운행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라이딩 내내 머리와 몸을 위축했다. 한 시간 반 정도 타고 가니 민예단지가 나왔다. 건너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동우가 뽑아준 원두커피를 마셨다. 용근이가 자꾸 돌아가는 자전거 안장을 조여주고, 비틀어진 핸들을 잡아주었다. 이제 넘어야 할 한계령이 이번 코스의 크럭스라고 한다. 나는 잔뜩 긴장했다. 처음부터 기어비를 조절하여 최소한의 힘으로 가야겠다고 맘먹었다. 중간 중간 용근이가 파이팅을 외치고 동우가 끝까지 보조를 맞춰주어 힘이 되었다.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자 용근이와 기철이가 손짓했다. 자전거를 눕히고 나도 누웠다. 입에 넣은 포도 알이 더 없이 달콤했다. 어제와 달리 흐린 하늘은 뜨거운 해를 한 풀 꺾어놨는데, 한계령을 넘는 우리에게는 상당한 혜택이었다. 한두 번 정도 더 고개가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후 운행은 필례약수를 거쳐 오는 내리막이었다.
12시경 펜션에 도착했다.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겪는 사건은 대부분 이성적인 결과가 아니다. 사소한 감정으로 사건은 발단한다. 인간은 사후에 의미를 부여하곤한다. 사상이니 철학이니 하는 문제도 감정에서 출발하여 추인한 경우가 숱하다. 이성적 인간이란 인간의 가정이자 자기 정의일 뿐 인간은 사실 어떤 동물보다 감정적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있어 감정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하는가보다.
주홍, 명원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족대를 들고 냇가로 갔다. 명원이와 나는 돌을 들썩이고 족대는 주홍이 몫이다. 꺽지 세 마리 포함 열 댓 마리를 잡고 돌아왔다. 행복언니와 함께 잠깐 들른 여자 분이 이 고기를 잠깐 사이 튀겨 내놓았는데 맛이 괜찮았다. 튀김이랑 부침개로 술 몇 잔을 마시다 수영장에서 놀다 무료할 6시경, 명원이가 자전거 타러 가자고 했다. 주홍, 명원, 나 셋이서 두 번째 라이딩에 들었다. 명원이 말대로 하면 거기 지형이 8자로 이어지는데 오전에는 위의 원을 돌았다면 이번에는 아래 원을 도는 것이란다. 막대기로 땅에다 8자를 그리고 설명을 하는데 제법 그럴 듯했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가는 시원한 길을 맘껏 달렸다. 특히 긴 내리막에서 바람을 맞는 맛이 좋았다. 잠깐 쉬는 사이 우리는 가을에 전체 8자 길을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하루는 등반, 하루는 자전거. 가을의 풍광은 정말 좋을 것 같다. 펜션에 도착하자 8시였다.
다섯째 날, 일
6시 기상 흥수형님, 용근, 주홍, 명원, 윤하, 나는 향실누님 일행이 있는 마당바위로 갔다. 함께 모여 신선벽에 가기로 했다. 마당바위 펜션에 도착하니 갑자기 허기가 졌다. 남은 밥과 수박을 허겁지겁 먹었다. 재현이가 새벽에 산책을 갔다고 해서 만나보려고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았다. 조금 있으니 재현이가 와서 가게 그만 둔 이야기며 새로 시작한 일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신선벽에 도착하니 시끌벅적하다. 나는 벽에 붙었으나 며칠 동안 누적된 피로에 기력이 쇠하여 땀만 뻘뻘 흘릴 뿐 동작이 영 시원찮다. 그래도 주홍, 명원 덕분에 향실누님 식구들, 정찬, 혜진 커플, 용오형 동생 동오씨 등과 함께 재밌게 등반했다. 칸테 길에서 뒤집어져 추락한 나는 창기가 사진 찍는다는 통에 쪽팔림을 면하고자 쏜살같이 일어났다. 경수 형은 경력을 자랑하듯 릿지화를 신고 한 코스를 오르는 시범을 보였다. 등반을 마치고 아래 웅덩이에서 알탕을 했다. 4시 반경 하산하여 나는 양양으로, 사람들은 서울로 향했다. 명길형과 염소전골을 먹고 헤어진 후, 저녁에 양양 명지리회관 앞 정자에 텐트를 쳤다. 푹푹 찌는 더위에 잠이 오질 않았다. 찐득거리는 매트리스를 빼고 맨바닥에 누워 뒤척이는데, 새벽 1시 10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리 비가 오려고 그리도 더웠나. 비가 새어들어 온 텐트 안이 빗물로 흥건했다. 지친 나는 한쪽으로 몸을 치운 채 새는 비를 방치했다. 카톡에서는 함께 하지 못한 용오 형을 놀리는 메시지와 동오씨가 지난 밤 노름판에서 딴 돈으로 커피를 샀다는 메시지가 연이어왔다. 배가 고파진 나는 아침에 가리산 펜션에서 꼬불쳐놓은 사과를 먹으며 잠을 청했다. 번개가 치고 폭우가 이어지고 비는 새어들어 왔지만 스르르 감기는 눈은 어쩔 수 없었다.
여섯째 날, 월
새벽 5시 기상. 여전히 비가 내린다. 텐트 문 밖으로 멀리 논둑 물을 막거나 트는 농부들의 분주한 몸짓이 어른거린다. 자동차와 정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빗길을 달리는 차들의 비를 가르는 속도가 확연히 느껴진다. 이 모든 걸 보고 있는, 이 비가 그치든말든 때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사람의 마음은 조용하다.
첫댓글 행복언니
여기두왔다가요오오
ㅎㅎㅎ
역쉬~~즐거운 나들이 글을 읽으니 지난주 일들이 스처지나네~~~^^
오~~
그림이 그려지네여~
문장실력이 대단하십니다^^
달인의 문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