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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5
#요한계시록 #Revelation 5:4-5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合當한 者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I wept and wept because no one was found who was worthy to open the scroll or look inside.
Et ego flebam multum, quoniam nemo dignus inventus est aperire librum, nec videre eum.
καὶ ἔκλαιον πολὺ, ὅτι οὐδεὶς ἄξιος εὑρέθη ἀνοῖξαι τὸ βιβλίον οὔτε βλέπειν αὐτό.
요한 사도가 그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용을 알고서 그런 것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는 두루마리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고 권세가 있는것만은 알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왜 이 땅에서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해제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는 짐작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로서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을 보았고 수십년동안 사도로서 그 예수님을 증언해오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통곡을 한 것은 성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걱정과 우려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요한 사도는 그 두루마리가 열려야 주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시고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되어 자신을 비롯한 교회와 성도들의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그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아무도 그 봉인을 풀 수 없어서 겪어야 할 고난이 더 길어지게 된다는 것에 낙담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선지자 엘리야가 자기 민족의 극악무도하고 가증한 우상숭배를 보고서 거룩하고 특심한 분노로 여호와 그리스도께 이스라엘에 3년 반의 기근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었던 것처럼, 요한 사도도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교회와 성도들을 극심히 핍박하며 대적한 원수들을 심판해달라고 탄원해 온것이 두루마리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서 통곡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땅에 존재하는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아무런 문제의식도 위기의식고 없이 그저 편안하게 지내는 육에 속한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요한 사도처럼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루빨리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시지 않는 것에 애통해하며 고대하는 심령을 가져야 한다.
5 長老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支派의 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印을 떼시리라 하더라
Then one of the elders said to me, "Do not weep! See,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 the Root of David, has triumphed. He is able to open the scroll and its seven seals."
Et unus de senioribus dixit mihi : Ne fleveris : ecce vicit leo de tribu Juda, radix David, aperire librum, et solvere septem signacula ejus.
καὶ εἷς ἐκ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λέγει μοι Μὴ κλαῖε· ἰδοὺ ἐνίκησεν ὁ Λέων ὁ ἐκ τῆς φυλῆς Ἰούδα, ἡ Ῥίζα Δαυείδ, ἀνοῖξαι τὸ βιβλίον καὶ τὰς ἑπτὰ σφραγῖδας αὐτοῦ.
울고있는 요한 사도에게 나아온 장로가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않으므로 알수없다. 어쩌면 장차 그 장로의 보좌에 앉게 될 요한 사도 자신의 환상일수도 있다. 그 장로는 요한 사도더러 주님께서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실 것이니 울지말라고 위로한다. 교회와 성도의 신앙여정 중에 거의 낙담할만큼의 상황가운데 처해지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애통함을 위로해주신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고난은 사도 시대처럼 엄청난 규모의 물리적인 핍박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고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만성통증질환을 겪는 환자의 고통과 같이 성도들의 고난도 은근하게 오래 지속되어 심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고난의 시기가 끝나서 하늘나라로 기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날이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고 그만큼 더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낙담하며 통곡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럴때 성도들은 주님께서 속히 위로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견뎌야 한다.
장로는 주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칭하는데 이는 단지 육신의 혈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장자도 아니었고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이 아니라 속임수에 빠져 아내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레아의 아들이었던데다가 아비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이자 자기에게는 동생인 요셉을 비록 죽이지는 않았어도 이방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기는데 앞장섰고 젊어서는 고향을 떠나 이방 지역에 머물면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들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를 엘리의 두 아들처럼 벌받아 죽게 하였으며 아내와 사별하자마자 이방 종교의 창녀 크데샤로 변장한 자기 며느리와 음행을 벌이고 쌍둥이를 얻게 되는 등의 허랑방탕한 인생을 산 인물이었다. 하늘의 주님께서 이 땅의 왕족의 후손으로 오셔도 황송할 판에 유다와 같은 막 산 인물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 자체가 당신의 지극하신 겸손하심과 악한 상황을 선하게 반전시켜 이끌어가시는 역전의 명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비단 유다뿐만이 아니라 삼손이나 솔로몬 같은 막 산 인생도 주님께서는 택하셔서 역사하시고 심지어 우리와 같은 막 산 인생도 창세 전부터 당신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치는데 쓰임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영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은 사자와 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사자이시라는 것은 상천하지에 그분과 경쟁하거나 맞서거나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며 만약 그러했다가는 사자가 먹잇감을 부수고 찢는 것처럼 그 대적자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뼈를 부수고 살을 찢어버리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육신으로는 한없이 유약하셨다 해서 여전히 그분의 성품이나 능력이 유약하신 분이라 착각한다면 모든 동물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자후보다도 더 한 주님의 음성에 벌벌 떨게 될 것이다.
장로는 주님을 다윗의 뿌리시라고 칭하는데 누가가 기록한 족보에 의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면서도 가장 위로 하나님을 기원으로 삼고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다윗의 조상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또한 육신의 혈통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혈통적으로는 다윗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요셉의 씨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마리아가 다윗 자손이라고 하는 견해는 어떻게든 혈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추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앙고백에서는 주님께서 마리아의 인성을 취하셔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원래 하늘의 인성을 가지신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당신 자신의 인성을 한없이 낮추셔서 마리아의 인성을 취하지 않으시고 잉태되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의 혈통과도 무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요셉과 마리아의 양자가 되시고 그들을 당신 자신의 양부모로 삼으신 것이었다. 그렇게 다윗의 뿌리이신 주님께서는 다윗의 줄기와 가지와 열매가 되셔서 육신의 혈통을 초월하는 신령한 혈통의 뿌리가 되시므로 주님의 영을 받은 성도들은 신령한 다윗의 혈통에 접붙인 자들이 되어 다윗의 뿌리이신 주님께로부터 신령한 진액을 공급받아 이전의 본성을 거슬러 신령한 다윗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20210315
#신명기 #Deuteronomy 8:7-20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여호와를 잊지 말라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하찮으며 완고한 족속인 이스라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하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비천한 자들을 창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신다. 가나안 땅에는 몸을 즐겁게 해주는 물과 곡식과 열매들이 풍성하고 기구를 만드는데 필요한 금속들이 넘쳐나지만 성도들에게 주실 하나님 나라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생명나무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생명나무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며 바닥은 찬란한 보석으로 되어있는 곳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누림으로 인해서 여호와를 찬송하지만 하늘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누림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것 자체를 최고로 여기게 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저버리고 여호와를 잊을 수 있지만 하늘의 성도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불순종 할 수조차 없으며 그분을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된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 땅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실 최종적이고 완성된 복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모형이고 표상일 뿐이어서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한 후에도 영원하고 참된 복을 차지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여호와를 잊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땅의 풍요로움을 누리는데만 정신이 팔리게 되면 여호와께서 주실 참되고 영원한 복에서는 배제될 뿐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당신을 잊을 것을 우려하셔서 광야에서의 어려웠던, 그러나 여호와께서 보살피셨던 그 때를 기억할 것을 당부하신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들이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들의 풍요로움에 대해서 교만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안타깝게도 결국 그렇게 돼버리고 만다.
가나안 땅은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각자의 삶에서 누리게 되는 모종의 풍요와 안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와중에도 성도들이 좀 더 특별하게 겪는 고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복음대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삶 자체는 광야 생활처럼 힘겨운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어떤 때는 가나안 땅처럼 어느 정도의 부유함과 안락함을 누리게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광야 생활 중에서도 더 힘들었던 때처럼 더 혹독한 고난을 겪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재물이건 건강이건 재능이건 다섯 달란트나 되는 것을 주시기도 하는데 그런 성도들은 삶의 대부분을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처럼 부유하고 풍족하게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남들보다 많은 것을 받은 성도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처럼 자기 공로나 자기 소유로 여겨서는 안되고 그것들을 온전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거저 베푸신 은혜라고 여기며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이 남들보다 많이 받은만큼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남들 한 두 달란트 받을 때 무려 다섯 달란트나 받아눟고도 나중에 주님께서 정산할 때 아무 소득도 없이 받은 그대로 내어놓는다면 거짓 성도라 판단을 받고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울며불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성도가 어떤 때 외적아로나 내적으로나 부유함과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리게 되는 시기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어려운 시기를 지나서 상황이 호전되면 처음에는 겸손하게 감사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지금 누리는 안락함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안락함을 누릴수록 어려웠던 때의 비참했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스스로 겸비할 줄 알아야 한다.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장대한 가나안 족속들을 이길 능력을 주셨고 그 가나안 땅을 경작하여 부를 이룰 능력도 주셨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안쫓아내고와 부를 이루고 못이루고는 전적으로 이스라엘 자기들의 책임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를 이뤘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자격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기들이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어느 은사가 더 큰지 비교하고 순위를 매기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저열한 행위였던 것이다. 남들보다 탁월한 은사를 가졌거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많이 가졌더라도 이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며 거들먹 거리는 것은 성도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위다. 그러한 교만함을 서둘러 벗어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자기 심령을 점점 더 완악하게 만들게 되며 더이상 돌이키지 못할 상황까지 가버리고 만다.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자마자 다른 지파들보다 가장 빨리 그것도 소돔과 고모라 수준으로 타락해버려서 결국 동족인 형제 지파들에 의해 장정 6백명만 남고 진멸을 당하기까지 이르렀으며, 다른 지파들도 자기들이 지은 죄로 인해 베냐민 지파에 의해 4만 명의 장정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할 때마다 이방 민족들에게 고통스러운 지배를 당해야 했으며 분열 왕조 시대 말기에는 심지어 솔로몬이 지은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 안에서 몰래 우상숭배를 하기까지 타락하여서 결국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에 극소수의 비천한 백성 몇몇을 남기고는 싸그리 전멸을 당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보다는 담임목사를 숭배하고 참되고 본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건물 위주의 외형적 교회만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어서 그런 교회에서 가증한 범죄가 발생하여도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켜야 한다는 미명하에 유야무야 넘겨버리고는 한다. 교회 내의 그러한 불법과 불의를 은폐하는 것은 당장 얼마간은 유효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교회 자체를 사탄의 회당으로 넘겨주게 되어 버려 주님께 외면을 당하게 된다.
#20200315
#출애굽기 #Exodus 제 2 장
모세가 태어나다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성령의 조명은 커녕 기본적인 상식과 독해력 조차도 없는 우둔하고 미련하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떤 해석자들은 이 구절만 보고서는 모세가 그저 육신적으로 다른 아기들보다 더 잘생겼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위험을 무릅쓰고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겼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해석은 어리석은 자들이 야료하는 잠언과도 같아서 듣는 이들의 영혼을 시끄럽고 번잡스럽게만 할 뿐이다. 만약 그의 해석대로라면 자기 아들을 버린 다른 부모들은 단지 못생겨서 아무 거리낌 없이 버렸다는 것인가? 또한 만약에 모세가 잘생긴 아기가 아니었다면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로 버렸을 것이란 말인가? 스데반 집사는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하고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모세의 부모가 그에게서 하나님의 표징을 보았다고 하고 있다. 이런 분명한 성경의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육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매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런 비성령적 설교자에게서 설교를 듣는 미국의 어느 교회에게는 화가 미칠 수 밖에 없다.
요셉과 그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은지 4백 여 년이 지난 이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숫적으로는 수백만에 이르렀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 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신앙을 잃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신앙이 남아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기시게 마련이고 이는 당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애굽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고 있음을 보시고(정확히 말하자면 창세 전부터 그렇게 작정하시고) 그들에게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세를 태어나게 하시며 부모들이 알아볼 수 있을만한 하나님의 증표를 그들에게 보여주신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는 모세에게서 그 증표를 보고서는 자기들의 아들이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믿고서 어렵게 어렵게 석 달 동안 바로의 명을 어기고 모세를 숨긴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이런 모세 부모의 행위를 믿음의 순종으로 평가한다.
안타깝지만 오늘날 자녀에게서 그리스도의 표징을 보고서 자녀를 신앙으로 지키고자 세상의 위협을 각오하는 그리스도인 부모는 없다. 바로와 같이 혹독하게 옥죄는 세상의 조류에 어쩔 수 없다 하면서 자기 자녀들을 거리낌 없이 세상 풍속의 강물에 던져버리는 기독교인 부모들만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청년들을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로 보고 아끼는 교회는 단 한군데도 없다. 교회들에게 있어 어린 아이들은 재정만 축내는 애물단지이고 청년들은 언제라도 빼먹을 수 있는 곶감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세의 부모가 행한 믿음의 순종이 아니라 바로의 악행을 스스로 본받아서 어린 아이들과 젊은 청년들의 씨를 말려왔고 드디어 성공하였다.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석 달이 지나자 모세 부모의 상황은 마치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무지 빠져나갈 도리가 전혀 없는데까지 간 것 같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거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방안을 강구하였고 나머지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표를 떠올리며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만을 의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장녀 미리암은 모세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격자와 증인이 되었다.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바로의 공주는 자기 아비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학대한다는 것과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상자의 아기가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알고서도 비상식적인 엄청난 온정을 베푼다. 그리고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다가와서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했을 때도 공주는 미리암이 모세의 어머니를 데려올 것을 알면서도 흔쾌히 허락해준다. 뿐만 아니라 공주는 모세의 어머니에게 유모의 삯을 주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친엄마의 손에서 자란 모세를 자기 양자로 삼기까지 한다. 과연 이런 공주의 행동이 그저 인간적인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무리 바로의 딸이라 하더라도 히브리 아이를 구하고 유모를 붙여 기르게 하며 자기 양자로까지 삼는 것은 명백히 자기 아버지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고 사방에서 모함과 비난을 당할만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주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모세를 살리고 지킨 것은 어쩌면 그녀도 모세 부모처럼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징표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하다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바로의 공주가 양자로 삼은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이미 애굽의 왕궁에서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왕궁의 분위기에서 모세는 한시도 안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40년 동안 수많은 음해와 음모와 위협과 비난을 당해 왔을 것이고 그런데서 그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양자로 삼은 공주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자기 친모에게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히브리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계속 가지고 키워갔을 것이고 자기는 그래도 왕궁에서 공주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을 누리는 반면에 자기 민족은 여전히 극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에 울분을 느끼고 언젠가는 자기가 민족 지도자가 되어 애굽에서 혁명을 일으켜 해방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도 드러나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모세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 히브리인을 구타하는 애굽인을 보고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 애굽인을 몰래 죽여 암매장하고 만다. 그로서는 나름 학대 받는 자기 민족을 위한 작은 의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후 모세는 히브리인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을 선한 의도로 말리는 중에 가해자가 자기에게 퍼붓는 악담을 듣고서는 자기의 살인이 들통난 것을 알고서 두려워한다. 이를 두고 스데반 집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모세를 민족 지도자로 여기지 않고 거부하뎠다고 설교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은 40년이나 더 미뤄지게 된다.
당시 바로는 아마도 공주와 남매지간인 오라비 또는 남동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아비 바로의 뜻을 이어 히브리인들을 계속 학대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자기 누이가 양자로 삼은 히브리인 모세가 처음부터 매우 거슬렸을 것이다. 때문에 바로는 모세가 애굽인을 암살하고 암매장 한 것을 빌미로 죄를 물어 그를 죽이려 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총애를 받았다면 애굽인 하나 죽였다고 해서 공주의 양자를 처형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디즈니에서 출시된 '이집트의 왕자'라는 애니메이션은 이런 성경의 정황을 싸그리 무시하고 모세와 바로를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로 왜곡하여 설정한다.
여기서 모세는 자기 죄가 탄로나서 처형될까 두려워 애굽에서 도망한 것으로만 나오지만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모세가 왕궁에서 누릴 부귀영화보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을 바라보고 떠난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모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애굽에 계속 남아서 어떻게든 사건이 잠잠해 질 때까지 버텨야 할 지, 아니면 이참에 차라리 애굽을 떠나 후일을 도모할지를 숙고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후자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모세를 구하고 양자로 삼은 바로의 공주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녀는 모세의 친부모만큼 모세를 친아들로 여겨 사랑했을 것이고 모세 또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그녀를 친부모처럼 공경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다고 했을 때도 그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범죄가 발각되어 애굽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모세는 그렇게 자기를 물심양면으로 키워준 공주를 어쩔 수 없이 뒤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굽을 떠나기로 한 그 날 밤에 아마도 공주의 방에 몰래 잠입해서 지금까지 길러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고 홀연히 사라졌을 것이고 공주는 사랑하는 아들 모세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을까.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자기 딸들을 도와준 모세를 초청해서 대접하고 사위로 삼은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 미디안의 이방종교 제사장인지 아니면 미디안에 거주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르우엘이 추후에 모세와 동행하고 길 안내와 여러 조언을 하는 것을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모세는 르우엘의 사위가 되어 아들을 낳으면서 40년 동안 목자의 삶을 살게 된다. 목자로서의 40년 동안 젊은 시절에 가졌던 자기 민족의 해방을 위한 포부는 점점 사그라들게 되었고 나이 80세의 노인이 되어 적당히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날만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바로의 세대가 거듭될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학대는 점점 더 가중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한차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거부함으로써 고난의 기간이 더욱 연장되었고 더 괴로운 울부짖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절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울부짖음의 분량이 찼을 때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울부짖음을 기도로 받아들이신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견고히 인내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기쁘게 받으실 것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바로에게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바로와 그의 부역자의 위치에 서 있다. 정부에 의해 자녀들을 학살당한 부모들을 향해 빨갱이와 좌파라며 비난한다. 바로와 같은 이 땅의 독재자에게 하나님의 사자라며 숭배하며 그들을 도와 온갖 추악한 일에 앞장선다. 이런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과 향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울부짖는 자들을 기억하시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재앙을 면할 교회는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