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논쟁과 도덕성의 실천
2022101245 철학과 오지효
왕세자 입학도는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는 작품으로 왕세자가 정체를 숨기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궁에서의 유학을 배우는 것을 넘어 유생과 반촌의 사람들과 뒤섞여 인심과 도심에 관해 더 깊이 체감하고 오는 내용이 주로 이루어진다. 해당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인지라, 이미 유학이 조선 내에서 학문적 영역을 공고히 하고 있고 불교는 민간 및 사대부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고통과 번뇌를 달래는 역할만을 하고 있어 교재에서 언급되는 유불논쟁의 유교와 불교의 입장과는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교재의 유불 논쟁 그 중에서도 유교가 ‘일상 생활의 도’, ‘인간의 도리’, ‘인륜 문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해당 작품의 유생과 유생의 불교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인한 사상적 다툼이 떠올라 해당 작품의 그 사건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이를 본 후 나의 유불 논쟁에 관한 사견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작품에서는 유학이 자신의 확고한 영역을 확보한 이후, 교재의 정도전과 같은 극단적 배불론이 사라지고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병립 상태이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불학을 여전히 배척하며 겨울철 성균관의 물자 부족을 핑계로 인근 북한산의 사찰 및 암자에서 공물을 강탈하여 성균관에 기부하도록 한 유생과, 불학에 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원래는 공물을 강탈 당하지 않았던 작은 암자를 우연히 언급하여 해당 암자까지 공물을 강탈 당하도록 해버린 유생이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난다.(이 뒤 부터는 편의를 위해 불학을 배척한 유생을 반불적 유생, 호의적인 유생을 친불적 유생으로 지칭한다.) 친불적 유생이 공물 강탈 사실을 성균관의 장의에게 말하고, 이로 인해 반불적 유생의 처벌에 관하여 성균관의 재회가 일어난다. 재회에서 반불적 유생은 불가의 공물을 승려들이 공으로 얻은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을 성균관을 위해 쓰는 것이 더 이롭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처럼 불가의 공물을 강탈한 것의 시작은 제가 아니라 성균관의 선진들이고 자신은 이를 답습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장의의 말이 인상 깊어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앞 선진들이 낸 길을 뒤따른 것뿐이라. 해서 모르는 일이라? / 모두가 알다시피 반궁의 운영은 세전으로 이루어지지. 모든 유생이 먹고 자는 하루는 백성이 피땀 흘린 하루이네. 그렇기에 반궁은 그 재정을 더 투명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어. 단 쌀 한 됫박 안에서도 그 공(供)심을 보기 때문이야. / 하면 기부품이라고 다르겠는가? 조공이라면 공물을 걷은 것이고, 이는 세전의 일환일 터. 자네들은 어찌 유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찰의 공물들을 자네들의 이름으로 기부해 온 것인가? 정녕 그들의 자의였다면 자네들 이름 뒤에 승려의 불호, 하다못해 사찰의 이름이라도 밝히는 것이 옳거늘,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네. / 어찌 그들의 공심을 자네들이 가로챘는가? 그러면서 먼저 물품을 선지급 받았다? 실로 공적(公賊)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유생 모두를, 성균관을 위한 것이렷다? 그로 인해 반궁의 모두가 공범이 되었거늘 정녕 그것이 공의(公義)가 맞는가? / 하물며 그들의 마음이 정녕 공심(供心)은 맞았는가? 자네들의 약탈을 견뎌야만 했던 불가의 공심(空心) 아니었는가? 몰랐는가? 묻고 있잖은가. 그 길이 길(道)이 아니란 것을 정녕 몰랐는가!”
장의는 供心 이라는 말 뒤에 숨어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하던 반불적 유생에게 그 공심이 과연 供心 인지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空心 인지를 묻는다. 더불어 그가 선택한 길이 과연 유학에서 가르치는 올바른 길(道)이 맞는지 꾸짖는다. 또한 반불적 유생에게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할 바'의 "군자가 이득을 볼 때는 의로운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군자는 의에 입각해 깨닫고 소인은 이익에 의해 깨닫는다."는 말을 인용해 그의 행동을 비판한다. 결국 반불적 유생은 위의 재회로 인해 성균관에서 출재를 당할 위기를 겨우 면하고도 해당 사건을 뉘우치지 못해 나중에 자신의 도심이 검게 변한 모습을 마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또한 친불적 유생 역시 본인이 몸담고 있고 유교의 말씀을 배우는 자들의 타락됨에 깊은 수치와 회의를 느낀다.
나는 작품의 해당 부분을 읽으며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의예지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과 인의예지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위의 반불적 유생은 인의예지가 무엇인지는 아나 그것을 본인 삶의 도덕적 기준선에 넣지 않은 것이고 친불적 유생은 인의예지가 무엇인지도 알고 그것을 본인의 삶에서 직접 실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어느 학문이 뛰어나고 뛰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위의 작품 속 사건은 유학이 잘못된 학문이라거나, 불학이 좋은 학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단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성균관에 있었을 뿐, 결국 이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것 역시 유생이다.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유불 논쟁은 절충과 양립의 여지가 있다. 중국에서 유·불의 대립이 그러하듯 한국에서의 유·불의 대립도 결국은 현실 경영의 주체로서 유학이 불교의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인륜에 관한, 인간의 도리에 관한 도덕성과 이의 실천이다. 정도전의 불교의 반윤리성의 지적에 대해 기화가 인륜 문제와 관련하여 그 실현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적인 측면에서 지니는 유학과 불교의 친연성을 근거로 반박하였듯이 유학과 도학은 결국 방향이 다를 뿐 ‘옳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도덕성의 실천은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차이로 인해 더 높게 일어난다거나, 더 낮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나는 한국의 유·불 논쟁이 성리학의 수용과 불교의 폐단, 즉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논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반불이냐 친불이냐 하는 태도의 문제도 이미 현대적 가치에서는 옳고 그름이 판단될 여지가 있습니다. 종교일치주의, 곧 모든 종교가 선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가치를 가진다는 인식이 시작된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인용한 작품에서도 이러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것은 현세가 아닌 초월적인 이상을 강조한다는 데 있었고, 특히 과보사상을 통해서 마치 선성을 획득하는 것이 보상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문제의식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 이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랴고 하지 않으며, 또한 과보도 인과율에 기초한 합리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유교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의 종교로서 불교를 본다면 비판할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그러한 관점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불교신자들을 고려한다면 그것 또한 선을 추구하는 한 방편으로서 허용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