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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 : 4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1 )
(3)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자랑은 그런 자랑거리가 없는 상대방을 낙심케 하거나 슬프게 한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된다.
성도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 요일 4: 9-11 –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처럼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로써 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
* 갈 6: 4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함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주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이와같은 자랑은 주님만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Ⅰ. 자랑의 의미 (출처: 섬김과 나눔 글쓴이: 새벽지기)
여기에서 ‘자랑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는 ‘페르페르유에타이’라고 되어 있는데 애석하게도 신약성경에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의미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실여부를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부풀려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뻐개다’라는 말이 그 의미를 잘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랑은 모든 종류의 자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자기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은 이러한 자기 자랑으로 뻐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은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우선 사랑과 자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일어난 사랑의 경험이 자랑하지 않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됩니다.
Ⅱ. 사랑과 자랑
원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이고 나머지 이 세상의 사랑은 그 하나님 사랑을 본뜨거나 흉내 내는 것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에는 본뜨고 흉내 내는 것들이 흉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래서 악은 그릇된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이시고 이 사랑은 삼위의 교통 안에서 인간의 창조 전부터 있었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모든 인간을 만드셨으니 사랑은 이 모든 세계의 창조의 동기인 동시에 세계 전체를 휘감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귀적 사랑입니다.
또 그 사랑은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의 사랑과 달리 초월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호의와 좋은 표정, 태도 등을 통해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달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간에게 이해될 수도 없는,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지만 모든 만물을 초월해계신 하나님처럼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비를 주시고 햇빛을 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도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알고 감사하는 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그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땅에 붙어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에 속해있으니 베풀어주시는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사랑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크신 은혜와 자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 열매와 곡식을 통해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저절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희망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나서 용서하시는 그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큰 죄에서 용서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은총을 통해 그 사랑의 무한함을 깨달았습니다. 또 복음을 통해 우리 인간의 모든 고통의 문제가 바로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부족, 인간관계의 고민, 질병 등 많은 것들을 통해서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마지막에 도달되는 결론은 항상 같았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생명의 관계가 끊어짐과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 꿈으로도 다시 이을 수 없는 단절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A. 사랑의 경험
이처럼 신자가 가지는 하나님 사랑의 경험은 십자가의 경험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의 사랑이 자격도 없는 비천한 인간인 우리에게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지를 십자가만이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진정한 교회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게 쓸모없는 존재이고 자기의 자기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고백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놀라운 신앙의 신비는 우리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이고 한 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의 깊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또한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가치 없는 인간이 지닌 재능이나 물질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자랑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들떠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자랑거리를 보면 그 사람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제 십자가의 사랑의 경험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자랑거리를 발견합니다.
B. 새로운 자랑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알려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큰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울은 이제 작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먼저 이름이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면 나중에는 무가치하고 가장 연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이것은 그가 실제로 못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무지와 죄 가운데서 건지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 자랑거리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현저히 부족한 것은 이러한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 성찰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성찰은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가장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용서로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기가 단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터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간직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죄인을 살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큰 사랑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전에 자랑처럼 생각한 모든 것들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제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약한 것이 정말 자랑할 만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약한 가운데서 자기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충만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새로운 자랑거리입니다.
Ⅲ. 자랑과 은혜 경험
이 자랑은 은혜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 이유는 사랑 자체가 끊임없는 은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A. 사랑 : 끊임없는 은혜 경험
맨 처음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온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첫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이 때 많은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굉장히 커다란 선물이기 때문에 견고하고 완전해서 오래도록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회개할 때 뜨거운 사랑을 심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전체가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옛 습관, 생각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밝은 빛이 비추어질 때 매일매일 깨달음이 더해가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서 은혜 안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 그 자체는 한 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내 안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럼에도 그렇게 사랑하셔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깨닫는 일도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경건 생활에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 때만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뿌리치고 더불어 사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란 누구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구인지를 규정할 때 인류의 역사는 항상 두 가지 극단을 향했습니다. 불교나 도교처럼 인간 자체를 끊임없는 무한한 자연 세계 속의 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첫째이고 정반대로 자연 세계가 있어도 그것을 아는 인간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므로 인간이 가장 위대하며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 그 자체만을 들여다보아서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한 세계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그 광대한 계획의 빛 아래서 비로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 중의 하나이면서도 온 우주 안에 있는 하나의 물질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신적 존재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어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전에는 우리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자신의 장점만 보던 사람들이었는데 자기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의 의미는 충분히 자랑하고 싶은데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장점을 보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랑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앞에 비춤으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고 훌륭하다는 이유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을 통해 경험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은 우리의 물질이나 지위, 재능과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시는 구속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매일의 은혜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마음속에 경험하게 될 때만이 신자는 자기가 자랑할 것이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 수 있습니다.
B. 감사 :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으로 자기를 앎
또한 그 사랑은 신자의 마음에 사랑에 대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이 ‘감사’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으로 자기를 알 때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 있는 선함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경건은 매일의 이 은혜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분의 은혜가 감격스럽고 그 사랑의 뜨거움을 느끼지만 곧 모든 감사를 것을 잊고 익숙해지기 쉬운 것은 원래 자기가 누구인지 잊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자신이 누구인가 확증할 때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힘을 다한 헌신임에도 십자가 아래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한 헌신과 수고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희생이 떠올리며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인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아파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초기 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라면 가장 유치한 신앙생활을 한 것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도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온 마지막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떨며 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아파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도처럼 그 복음으로 인하여 심령이 찢어지고, 나의 섬김이 주님이 나를 위해 찢고 피 흘리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매일 재현될 때 그 사랑은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이에게 큰 도움이 되고 그를 위해 자비를 베풀고 희생했을지라도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십자가의 큰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 것들은 이 세상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갖게 하시고 싶은 것은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물 붇듯 부어지고 나의 마음이 녹을 때는 오래 참을 수 있고, 날마다 나를 깨뜨려 강팍을 버리고 온유해지기도 합니다. 또 그 사랑이 역사할 때 질투도 사라집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 사랑을 팔아서 살만큼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도 하늘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여러분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의 위대한 역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맨 처음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웠던 그 자랑거리가 오늘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아닌 자랑거리는 쓰레기같이 여기고 주님의 은혜가 교회 위에 각 사람 위에 매 순간 부어져 마음이 물같이 녹아 주님만 자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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