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한 명과 불확실한 80명의 생명, 어느 쪽을 살려야 합니까? 이런 선택은 한 마디로 짜증 폭발을 만듭니다. 물론 경중을 따져야 한다면 어린아이 하나가 희생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임의로 생명의 가치를 달아보거나 저울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냐 다수냐 로만 따질 일도 아닙니다. 그 하나로 인한 파급효과 또한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맡은 분야대로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에 따른 결정력도 다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책임을 나서서 감당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군사작전이지만 법률자문단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로 인한 80명의 사상자에 대하여는 비난의 화살이 바로 그 테러리스트들에게 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하나의 희생에 대해서는 그 비난이 아군 쪽으로 향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민간인 그것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앗아갔다고 온 세계가 들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테러리스트들까지 나서서 그것을 빌미로 비난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결국 정치 외교적으로 온 세계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차라리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아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시키는 쪽이 정치적으로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하는 의구심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 고민합니다.
심혈을 기울여 찾던 바로 그 테러리스트를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또 다른 테러를 작당하고 있는 곳까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하는가 싶더니 두 사람에게 자폭하도록 폭탄으로 옷을 입히는 그 모든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나서기 전에 그 자리에 폭탄을 투하하여 모두 몰살시키면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매우 다급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군을 투입하여 생포할 시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곧 자살폭탄을 시행하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 긴박한 상황에 테러리스트들이 모여 작당하는 바로 그 건물 바깥 담 앞에서 어린아이가 집에서 구워낸 빵을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것입니다. 폭탄을 투하하면 그 폭발로 인하여 어리아이가 희생당할 것이 뻔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감히 발사 단추를 누르지 못합니다. 보고 있는 지휘관과 관련 책임자들이 함께 보고 있습니다. 이해하지요. 어느 누구도 감히 쏘라고 명령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동의하지 못합니다. 처음에 생포 작전이 사살작전으로 변경된 것은 서로 양해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긴박해졌으니까요. 다만 어린아이를 희생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걸렸습니다. 군사적으로는 가능하다 판단합니다. 그러나 정치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누가 책임질 겁니까?
사람이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도 그대로 시행되는 데는 여러 변수가 따라옵니다. 때문에 ‘만약의 사태’까지도 대비합니다. 그럴지라도 모자랄 수 있습니다. 상황이라는 것이 어느 누구도 예기치 못하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현대 장비를 동원하여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곳에 어린아이가 나타나서 장사를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사작전이다 생각하고 밀어붙일 때도 아닙니다. 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테러공격을 사전 예방하기 위한 작전입니다. 그것도 자국이 아닌 우방국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살상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작전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 :9) 우리의 계획대로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 몰라라 방치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다음에는 소위 하늘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은 아니니까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이런저런 상황들이 돌출하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작전을 혼자 임의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치와 통계가 책임을 상쇄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현실적인 자료입니다. 나중에라도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에 관한 한 단 1%의 가능성조차도 우리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을 움직이는 낌새에 안도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망하지요. 작전에 참가하던 사람들은 모릅니다. 작전수행이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하며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 아마도 아이를 잃은 부모만 평생 그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그런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불행이 우리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말입니다. 그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요.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Eye in the Sky)를 보았습니다. 2015년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