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당신,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익숙한 낯설음이라는 주제를 듣고, 저는 “낯설음”이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낯설음이란, 제가 느끼는 감각입니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 갑자기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던 글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낯설음, 낯설음, 낯설음, 낯설음, 낯설음…
이렇게 단어를 몇번 반복해보면 그 형태적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뭔가 낯설은 느낌을 줍니다. 이렇듯 낯설음이란, 비단 특정 상황, 꼭 익숙하지 않은 것만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낯설음이란 결국, 온전히 우리가 느끼는, 우리의 감각입니다.
낯설음은 온전히 본인만의 감각이기에, 타인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어색한 표정이라던지, 어색한 눈빛 등으로 타인이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온전히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뇌파 측정을 하더라도, 그 전기신호가 무엇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뇌는 어떤 생각을 담으며 낯설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일생토록 느낀 낯설음이었습니다. 온전히 타인 속에 담긴 감각과 생각, 그것은 칠흙 같은 모호함으로, 낯설음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빨간색이 더 좋은데.”
저는 어릴 적부터 파란색을 좋아했습니다. 파란색 옷도 좋아했고, 즐겨타던 파란색 자전거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다른 친구에게 “나는 빨간색이 더 좋은데.”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왜인지 모르게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순간이나 말이 있습니다. 제게는 그 말이 그랬습니다. 어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란색이 빨간색보다 좋았습니다. 더 예쁘고, 더 멋진 색깔이었습니다. 빨간색은 왠지 제게 “안돼”라고 말하는 빨간 신호등 같았습니다. 그 즈음의 저는, 책에서 난생 처음 ‘색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색을 볼 수가 없다고, 온통 흰색, 회색, 검정색으로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빨간색을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색맹을 가진 사람들이 파란색을 회색으로 보듯, 이 아이에게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서로 뒤바뀌어 보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파란색을, 그 아이는 날때부터 빨간색으로 보이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빨간색”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의 눈으로 제가 세상을 본다면 파란 소방차, 빨간 하늘, 파란 사과, 빨간 경찰차가 아닐까?”, “모든 개가 고기를 좋아하듯, 사실 모든 인간들은 “내가 보는 파란색”을 좋아하지만, 각자 그것이 뒤섞여보여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색깔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은 어린 제게 남아서,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떠오르곤 합니다. 온전히 개인이 느끼는 감각의 존재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타인의 감각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혹은 일부 감각들과 인지과정에 있어서 구별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이따금씩 저를 고민에 빠지게 하다가, 고등학생이었던 저에게 다시금 불타올랐습니다. 당시 공부하던 EBS 교재에 “다른 사람의 마음 문제” 라는 주제의 글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정말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글의 주된 주제였습니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를 넘어서 그 마음과 영혼 또한 실존하는 것인지, 인간은 모두 같은 감각을 느끼는지,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반응을 하고, 표면적으로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그 내부에서 느끼는 것이 같은지는 증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무력감과 모호함은 저에게 때때로 찾아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사람과 교류할 때 그 감각은 제게 찾아와서, 칠흙 같은 낯설음에 빠지게 합니다. 때로는 제 스스로 느끼고, 제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 자체도 낯설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모론자, 허무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는 교수님조차도 실제로 존재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글자들이, 제가 보는 형태와 똑같이, 교수님께도 그대로 보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낯설음은, 제가 일상에서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낯설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첫댓글 한 가지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그것의 존재와 의미, 가치에 대한 의심이 듭니다. 자의식 과잉을 비롯하여 의미 과잉은 때때로 병리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이렇게까지 의미 과잉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생명체는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해서, 의미과잉이 되는 것을 회피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복잡한 상황을 간단하게 재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멀어지려고 합니다. 익숙함이라고 하는 것도 낯선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자기 속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철학하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의미를 두지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의심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