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의 낭만을 기억하고 있는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00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00면민을 위한 가설극장 서울영화삽니다.
오늘밤 8시 00 왕소나무 공터에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벙어리 삼룡이'를 상영합니다.
영화계의 거장 신상옥 감독 연출의 김진규, 박노식, 최은희, 도봉금 주연의 씨네마쓰꼬뿌 총 천연색(사실은 흑백 영화였다), 벙어리 삼룡이…."
지금은 다른 매체의 발달로 사라졌지만 70년대 흑백TV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동네를 돌아다니던 가설극장은 시골사람들을 다른 세계로 연결해주는 유일한 문화의 통로이자 가장 흥미있는 대중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모이삭에 뜸이 들 무렵, 논베미를 훔칠 무렵, 00 왕소나무 공터에 가설극장이 선다는 소식은 선전차가 지나가기 전 야릇한 장면의 포스터를 훔쳐 본 하교길의 아이들이 먼저 퍼 날랐다.
가설극장이 서는 날이면 새참으로 요기한 농부들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힐 무렵 마을 어귀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트럭 위에 확성기를 매단 선전차가 어김없이 들어서며 요란한 소리를 질러댔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시네마스코프 총 천연색'. 귀못이 박히도록 되풀이되는 특유의 억양과 코맹맹이 선전 대사는 트럭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코흘리개들까지 달달 외워 흉내를 내곤 했다.
확성기가 온 동네를 휘젓고 지나가면 처녀 총각들은 너나없이 가슴이 설레었고 꼬맹이들은 벌써부터 '개구멍' 작전에 골몰했다.
가설극장은 00공터나, 학교 운동장, 00 왕소나무 공터 등에 3~4개의 기둥을 세우고 하얀 광목천막을 둘러치면 그만이었다.
짧게는 1~2일, 길게는 1주일여동안 한 장소에서 제목을 바꿔가며 영화를 상영했는데 입장료는 30~50원(?) 정도로 통용되기도 했다.
한물 간 영화에 필름은 닳고 닳아 자막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일쑤였다.
그래도 관객들은 흑백 화면 앞에서 웃다가 한숨지으며 마음껏 박수를 쳐댔다.
나는 당시 영화는 모두 그런가 보다 했는데 훗날 도시의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에야 필름이 낡아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사기와 스피커도 극장에서 퇴역한지 한참인 중고여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렁 그렁' 소리가 그치지 않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배우들의 음성도 웅웅거려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발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가설극장은 시작하자마자 필름이 끊기기 일쑤였다.
이때쯤이면 곳곳에서 휘파람소리, "요금 물어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꼬맹이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천막 귀퉁이를 들쳐 개구멍을 만들고 잽싸게 입장했다.
매표원(기도)의 눈을 속이는 '몰래 입장'이나 '변칙 입장'으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만발했다.
10살이 넘어 보이는 아이를 포대기로 들쳐업고 떼를 쓰는 아주머니, 밖에서 일부러 소란을 피워 이목을 따돌린 뒤 천막 밑으로 숨어드는 청년들, 천막 밑에 엉덩이부터 들이밀었다가 들키면 "소변 보려 한다"고 속이는 아이디어도 동원됐다.
이런 때 매표원들이 별 의심없이 '곧 영화 시작하니 다시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어 강제입장(?)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었다.
가설극장의 영화는 7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 흑백영화였으며 개중에는 변사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었다.
시골 아이들은 영화를 본 뒤 귀가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곳곳에서 모여든 아이들인지라 영화가 끝난 뒤 집까지 시오리길을 돌아가야 했는데 컴컴한 밤길 귀가는 보통일이 아니었다.
귀가길은 필시 여우가 나온다는 계곡, 달걀귀신이 득실거린다는 공동묘지, 폐가 등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가설극장 만큼 인기는 없었지만 당시 정부에서 계도용으로 상영하는 홍보영화에도 발길이 몰렸다.
가설극장에 비해 규모가 작고 주로 학교 운동장에서 상영됐던 이들 '계도 영화'는 주로 새마을운동 성공담이나 '잘살아 보세' 식의 홍보 일색이었다.
가설극장은 80년대 들어 TV가 보급되면서 명맥이 끊겨 이젠 추억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가설극장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이웃동네 처녀들과 집단 데이트를 즐기는 가교 역할을 해줘 낭만이 있었다.
최근 지방의 어느 자치단체는 군민축제 때 가설극장을 개설, 장년층은 물론 신세대들로부터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다.
영화 속의 벙어리 삼룡이가 밤이슬에 젖은 자막 위로 휘영청 솟은 달을 쳐다보며 한없이 울던 가설극장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 빛 바랜 추억의 풍속도가 되었다.
첫댓글 저는 가설극장 세대는 아닌가봐요. 아님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가? 암튼... 생소하네요 ㅎㅎ
성난송아지, 민검사와 여선생등의 영화를 농촌진흥원에 다니시던 우리 아버지가 학교 운동장에 틀어주셔서 온 동네 사람들과 같이 본 추억이 어렴풋이 있는데...거기가 바로 춘천이라우~~ ㅎㅎㅎ
저는 중학교때 장터마당에서 여성국극을 본적있어요,아마도 무슨약을 팔면서 막간에 한토막씩 보여준거같구요.
옛날 고향풍경이 생각나네요... 영화가 시작되고나면 옆쪽으로 돌아서 천막걷고 들어가다 붙잡혔던 추억들이...
크,옛날생각나네요,저녁밥 먹고 동네사람들과함께 십여리를 걸어가서 봤던기억이나네요,반드시 해가져서 깜깜한 밤에만 볼수있는 극장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