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명분론에 대한 논의와 명분론의 한계 고찰
소프트웨어학부 컴퓨터공학전공 2023108101 김예진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과 치히로는 동일 인물이다. 치히로는 마녀 유바바와 의 계약으로 본래의 이름을 잃고 ‘센’이 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치히로는 본래 자신의 이름을 점점 잊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하쿠를 구하기 위해 여러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치히로 본인이 어렸을 때 놀던 강이 하쿠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하쿠의 원래 이름(고하쿠)을 찾아주게 되었다. 뒤이어 ‘센’이 아닌 본래 ‘치히로’로서의 자신을 되찾고, 부모님도 원래의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다.
위와 같이 요약해보면, 마치 이름을 되찾으니 모든 것이 술술 풀린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이름’이 단순히 인물을 구별하기 위한 도구에 그쳤다면 이러한 전개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름과 관련하여 동양철학에서도 논의한 바가 있다. 공자는 정치를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거냐는 자로의 물음에 ‘이름을 바로 잡겠다’고 답하였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그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면 사회가 혼란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의 명분에 맞는 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동양철학에서 ‘정명론’, ‘명분론’이라고 부른다.
정명론과 명분론의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자. 영화 초반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신들의 음식을 먹게 된다. 치히로가 이를 말리지만 돈이 있으니, 나중에 계산하면 된다며 허락받지 않은 음식을 먹음에 개의치 않는다. 이는 지극히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폭력적인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다움’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명분론의 관점에서 보면,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하게 된 것은 ‘인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쿠와 치히로의 경우, 마녀 유바바로부터 원래 이름을 빼앗기고부터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당한 채 그녀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를 나의 식대로 요약하면,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이름의 주체를 잃게 되는 것이다.’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이름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 요약한 문장의 역이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름의 주체를 되찾으면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이 영화에서는 역이 성립하는 것 같다. 치히로는 전까지 하쿠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곤경에 처한 하쿠를 구하기 위해 용기 있는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이 본래 ‘치히로’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치히로’라는 이름의 주체를 되찾게 되었고, 이를 통해 본인의 이름을 되찾아 비로소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는 이름과 실상이 같아야 한다는 명분론에서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분론의 입장에서 다시 정리하면, 치히로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치히로’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상이 되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 사람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름을 부여받는다. 부모로부터 받을 수도 있고, 그 외의 가족이나 종교인, 작명소가 될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불리는 이름을 나 자신이 짓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명은 논외로 하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명분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결국 극적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치히로가 본인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여 이름을 되찾게 된 순간이다. 만약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며 살아가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명분론은 공동체에서의 본분 내지는 역할에 관한 논의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은 우리의 이름에도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요구가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본인이 이름 뜻대로 인생을 살기를 요구받는다고 느끼거나 지어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름 뜻대로 살아가길 강요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날 선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름은 본인이 부르는 경우보다 타인에 의해 듣게 되는 경우가 많고, 지을 때도 본인이 아닌 타인이 뜻을 지어 붙여준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호칭이며 그 근원을 따라가면 역할이나 본분처럼 그 사람에게 어떠한 행동이나 모습을 기대하는 부분이 아예 없다고 하긴 힘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명분론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우선, 명분론에서 강조하는 사회 공동체에서 본인의 역할에 맞는 덕을 쌓고, 분수를 지키라는 말은 결국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개인의 발전과 자아실현을 억제하는 것과 같다. 현재 공동체에서 본인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듯,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폭력적인 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시대에서 요구하는 자신의 한계를 깨고,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는 메시지와는 거의 상반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명분론에 따르면 나는 학생이므로 학생답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학생다움’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학생다움’이라는 것은 한 가지의 모습일 것인가? 와 같은 의문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개인이 공동체에서 가지고 있는 역할이 여러 개일 텐데, 만약 그 역할들끼리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무엇을 우선하여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부른다는 데는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가 자기 모습처럼 만든 인간에게 창조물의 이름을 짓고 지배하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된 이후로 서구 사회에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본다면 명분론에도 비판받을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적 세계관, 특히 유가에서 정명론을 강조한 까닭은 사물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렇게 해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어떤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하면 각자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 개념에 적합한 실천을 요구받는다는 점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사회적 합의에 의해 '임금'이라는 개념이 정의되었다고 하면, '임금'으로 불리는 자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개념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명분론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 또는 허례허식에 집중하는 이론적 근거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명분론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