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2년 차, 영화 평론가 31년 차의 삶을 살아왔다. 이쯤 되면 '영화와 함께한 평생'이라 한들 과장은 아닐 듯. 그렇다면 '좋은 영화'란 과연 어떤 것일까?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전만 해도 내 감각을 자극하고 뒤흔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 1971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청량리에 있던 동일 극장에서 본 배우 윤여정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나 1975년 중학교 2학년 때 배짱 좋게도 교복을 입고 본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등이 그 예다. 공부하지 않고는 줄거리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교 2학년 때 영화 스터디에 뛰어든 뒤로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시각적 요소의 총합인 미장센이나 음악과 음향 효과 등 사운드, 영화의 시간적 호흡을 결정짓는 편집 등 만듦새가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이 됐다. 이는 흔히 영화적 완성도로 일컬어지는 바, 영화의 지적 층위와 연결된다. 비평가들이 세계 영화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하는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이나, 40여 년째 내 인생 영화 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규칙> 같은 영화들이 그 대표적 예다. 하지만 감각적, 지적 층위만으로는 허전했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 아닌가. 영화에서의 감성적 층위 역시 중요하게 다가왔다. 우리네 인생에서 감동의 기능과 역할을 감안하면 당연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나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한국 영화사의 수 걸작들이 선사한 정서적 감흥은 아직도 내게 머물러 있다. 따라서 내게 좋은 영화란 감각적, 정서적, 지적 층위를 두루 충족시키는 영화다. 한국의 경우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비롯해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이창동 감독의 <버닝>,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등이 있다. 외국 영화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리고 스페인이 낳은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마타도르>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등이 있다. 1990년대 후반 '매혹의 영화'라는 용어를 통해 '매혹'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각인되며 생각은 또 달라졌다. 수용자를 동요시키는 모든 요소를 의미하는 그 용어는 영화뿐아니라 내 삶을 인도하는 핵심 개념으로 굳어졌다. '온정주의' 따위의 비판을 받아 가면서까지 가능하면 영화의 단점보다 장점을 찾아내 부각시키고 칭찬하려 애쓰는 까닭이다. 와중에 2022년 11월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영화와 조우한다. 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삶과 죽음을 국내외 시대상과 함께 균형감 있게 극화한 종교성 역사 휴먼 드라마 방흥식 감독의 <탄생>이다. 단언컨대 이 문제작만큼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영화는 없다.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기도 했던 사제 김 안드레아는, <탄생>을 계기로 개신교 안수 집사인 나의 사표가 되었다. 그동안 내가 고수해 온 좋은 영화의 기준이 바뀌어야 하는 걸까 ….
전찬일 | 영화 비평가
* 앙갚음 대신 영화 <우리들>의 주인공인 초등학생 선이는 동생이 자신을 때린 친구와 계속해서 노는 것이 못마땅하고 속상하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떡해? 너도 때렸어야지"라고 말하는 선이에게 동생은 해맑게 묻는다. "그럼 언제 놀아? 난 그냥 놀고 싶은데."
두 이름의 사랑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1957년), 환기 미술관 그 시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대담한 여성이었던 변동림. 그는 1936년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과 결혼했다. "우리 같이 죽을까, 아니면 같이 먼 데로 갈까?"라는 이상의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하지만 결혼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상은 세상을 떠났고 둘은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이상을 잃고 힘들어하던 그는 1944년, 화가 김환기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집안에서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이를 무릅쓰고 김환기의 아호 '향안'을 써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김환기와 함께 살겠다는 의지였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끝을 맺은 후 김환기와 '같이 살자'는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김향안은 김환기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생계를 위해 남편의 그림을 팔러 다니고 쌀을 꾸러 다녔다. 외국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김환기를 위해 "내가 먼저 가지 뭐."라며 홀로 파리로 떠나 자리를 잡았다. 1974년, 김환기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김향안은 남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예술 잡지에 김환기와 관련된 글을 실었고, 환기 재단과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환기 미술관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일을 '내조'라기보다는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김향안은 이상과 관련된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상이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지나 그를 기리기 위한 비를 세우자는 말이 나왔을 때, 사비를 들여 이상의 모교에 비석을 세웠다. 20세기 한국을 풍미했던 두 예술가, 이상과 김환기, 그들의 작품을 더 빛나게 한 건 변동림과 김향안, 그의 사랑이 아닐까.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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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영화란 / 두 이름의 사랑
웃으며 보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沃溝 서길순 님 !
고운 걸음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온차 큰 변절기
감기 유의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
두사람 의 사랑 이야기 즐감하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동길짱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
새로운 한 주
보람과 즐거움이
늘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간절기 감기 유의하시어
건강하게 지내세요
동트는아침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