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철학 : 초기 불교와 현대 철학의 비교 -싯다르타와 카뮈를 중심으로-
제주대학교 철학과 박석윤 2019101241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나트만(anātman)이라 하는데 이는 아트만(ātman)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아트만은 영혼, 인격, 자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을 창조한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은 힌두교 자체, 더 나아가서 유신론을 거부한다는 해석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공개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불교에서 공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순야타 (Śūnyatā)라고 하며 비어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야심경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색(色)은 빛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표상하는 세계라고 이해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사실 비어 있다. 즉 본질과 불변하는 영혼 없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해석은 인도의 여러 지역의 토속종교 신들이 합쳐져 다신교적인 성격을 가지며, 사물이나 현상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인 힌두교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초기 불교 철학을 현대 실존철학이나 부조리 철학의 문제의식과 아주 면밀히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고타마 싯다르타는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에서 유실론적 실존주의자인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개념과 이어진다. 실제로 칼 야스퍼스는 1) 신라의 불상인 ‘목조 반가사유상’을 보고 “나는 이만큼 인간의 실존을 평화로운 모습으로 진실되게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 없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야스퍼스는 부처의 무아와 불교의 공개념에 집중하며, 이는 초월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존재의 한계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존재자들의 차이를 포괄하는 모습을 포착하였다. 이는 ‘초월’을 상정하는 야스퍼스 본인의 방향성과는 다른 길이지만, 그 길에도 분명히 실존적 평안이 있을 수 있다는 야스퍼스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분명 실존철학자들의 문제의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부처는 ‘세계의 무의의성’을 깨달았지만, 그들과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싯다르타는 세계의 무의의성에서 키에르케고르처럼 신 앞으로 가지도 않았고 의미를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카뮈처럼 부조리한 세계를 끌어안았다. 그렇다면 카뮈가 지적했던 데로 부조리를 깨달은 그에게 주어진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었다. (카뮈 철학에서 부조리는 세계에서 의미를 갈망할수록 그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않는 세계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싯다르타는 고행의 끝으로 눈을 감으려 했지만,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고 다시 살아가며 ‘깨달음’을 설파하였다. 이처럼 카뮈와 (초기불교) 싯다르타의 입장은 고통과 죽음, 세계의 무의의성에 대한 문제를 초월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입장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싯다르타의 태도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다. ‘십사무기’라 하여 시간과 공간, 자아와 사후세계에 관한 14가지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카뮈는 이러한 존재론적 논거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존재론적 논거를 관철시키기 위해 죽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분명 이 말은 카뮈가 문학가로서 쓴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역사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나 그밖에 종교나 어떤 종류의 권위에 맞서 어떠한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에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는 갈릴레이가 과학적 진리를 부인했듯, 내가 살아가는데 지구가 태양을 돌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주가 영원하든 무한하든 간에 그것이 살아가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냐? 반문하는 것이다. 십사무기가 담고 있는 질문은 부처에게는 힌두 신화의 형이상학과 다름이 없고 카뮈에게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초기 불교와 부조리 철학의 문제의식이 같다고 해서 그들의 철학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가 말하는 것은 결국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결국 살아있는 동안에도 생 해탈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있다. 어떠한 욕망과 고통에서도 벗어난 상태, 이는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싯다르타에게 죽어서 가는 열반은 사후세계의 뜻이 아닌 소멸, 무의 상태인 것이다. 생 해탈도 말 그대로 무아의 상태, 다시 말해 가능성의 소멸인 것이다. 무아란 고통을 받는 자아가 없다는 것이고 자아가 없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의 가능성(실존)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비약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무아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부정하고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실존(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또한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오히려 존재는 무를 통해 존재의 가능성이 드러난다고 하였지만, 생 해탈은 그와 반대로 살아있음이 존재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지점을 가리킨다. 카뮈는 그러한 상태를 가정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생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예술을 통해 의지를 조망하는 상태>처럼 일시적이고 순간적일 것이다. (순간과 영원의 관계성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카뮈는 부처와 반대로 고통을 긍정한다. 그는 <시지프 신화> 서문에서 <아폴로 경기의 축가>의 구절을 인용한다. “오, 사랑하는 이여,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라, 다만 가능성의 들판을 끝까지 내달려라.” 카뮈 그 자신은 고통의 원인인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니체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고통을 사랑한다. ‘그것이 고통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하여라’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신을 농락한 시즈프를 부조리한 영웅이라 칭하였다.
결론을 지으려한다. 내가 해석하기에 불교의 ‘공’개념은 카뮈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불교는 그러한 공을 기반으로 해탈을 위한 많은 방법론을 포월하였으나 싯다르타을 따라 해탈하는 목적을 통해 불교라는 이름으로 어우른다.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신을 믿거나 심지어 실존철학의 방법론도 피안의 세계로의 도피 또는 초월을 위한 비약이라 비판한다. 이렇게 여러 방법론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목적을 상정하지 않음에 있어서 방향성에 관한 ‘가능성의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음을 비교해볼 수 있다.
1) (출처 :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
2) 14무기
시간에 대하여
세간유상(世間有常) · 세간상(世間常) · 세유상(世有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
세간무상(世間無常) · 세무상(世無常) · 세무유상(世無有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세간유상무상(世間有常無常) · 상무상(常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세간비유상비무상(世間非有常非無常) · 비상비무상(非常非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공간에 대하여
세간유변(世間有邊) · 유변(有邊) · 세유저(世有底):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세간무변(世間無邊) · 무변(無邊) · 세무저(世無底):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세간유변무변(世間有邊無邊) · 변무변(邊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세간비유변비무변(世間非有邊非無邊) · 비변비무변(非邊非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자아에 대하여
시명시신(是命是身) · 명즉시신(命即是身): 자아(命)와 육체(身)는 동일하다.
명이신이(命異身異) · 위명이신이(為命異身異): 자아(命)와 육체(身)는 별개이다.
사후세계에 대하여
여래사후유(如來死後有) · 여래유사후(如來有後死) · 여래종(如來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사후무(如來死後無) · 무후사(無後死) · 여래부종(如來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사후유무(如來死後有無) · 유무후사(有無後死) · 여래종부종(如來終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사후비유비무(如來死後非有非無) · 비유비무후사(非有非無後死) · 여래역비종역비부종(如來亦非終亦非不終):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출처. 위키백과
첫댓글 올린 한글파일이 열리지 않는 오류가 있어 교수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파일 직접 보내드리겠습니다.
서술한 내용 부분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오히려 존재는 무를 통해 존재의 가능성이 드러난다고 하였지만, 생 해탈은 그와 반대로 살아있음이 존재의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지점을 가리킨다."는 부분입니다. 생해탈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라기보다는 우파니사드에서 들어온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부처의 본래 가르침은 삶이란 그 과정 내내 넘어서려고 하는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가치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선후 과정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각과 함께 열반을 들려고 했던 부처의 두 발을 잡아끈 신들의 요청은 오히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집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머물러야 하는 부조리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부처의 내면적 각성을 끌어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신들의 요청은 자(慈, maitri)와 비(悲, karuna), 곧, 친애와 애련이라는 감정 정서를 일깨움으로써 무아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무의 환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해탈이 부처가 이야기한 개념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개념인 것을 새로 알게 되었네요!
불교철학은 공부할수록 새로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