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여·야·의·정 협의체 추진…의료계도 호응해야
중앙일보
입력 2024.09.07 00:14 업데이트 2024.09.07 01:34
대통령실, 2026년 정원 원점 재검토 수용 의사
의료계도 적극 참여해 합리적 결과 도출해야
악화일로 응급실 등 국민 불안 더는 방치 안돼
대통령실이 어제 의대 증원과 관련해 2026년도 입학 정원을 제로베이스에서 검토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의료계 사태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에도 긍정적 반응을 내놨다. 응급실을 비롯한 의료 현장이 악화일로인 상황에서 모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다행스럽다.
완강했던 대통령실이 태도 변화를 보인 이유는 의료 현장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 조선대에서 심정지 상태인 학생이 조선대병원 응급실에 전문의가 없어 수용을 거부당했고, 부산에선 공사장 2층에서 떨어진 근로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사망했다. 전국 권역응급의료센터 44곳의 실정은 대동소이하다. 서울 서남권 이대목동병원과 경기 서남권 아주대병원 등 곳곳에서 진료 차질이 잇따른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일관해 위기감을 키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히 가동되고 있다”고 말한 게 단적인 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경기 북부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의정부성모병원을 방문했다. 이런 식의 현장 점검은 한계가 뚜렷하다. 요즘 응급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괴로움은 119에 도움을 요청해도 받아줄 응급실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응급의료센터에 전화해도 받아주질 않으니 일반병원으로 갔다가 상태가 악화하는 일이 벌어진다. 추석을 앞두고 “아프면 안 된다”는 인사말을 주고받는 실정이다.
갑자기 아프거나 다쳐도 응급의료센터로 못 가는 게 위기의 핵심인데 대통령은 응급의료센터를 둘러봤으니 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환자들이 보일 리 없다. “환자 본인이 (병원에) 전화해 알아볼 수 있으면 경증”이라는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 발언은 또 어떤가. 이런 불안감이 여론에도 반영된다. 최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직무 수행 부정평가(67%)의 이유 중 1위가 ‘의대 정원 확대’(17%)였다. 의료 사태 초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상황이 반전했다. 당국은 긴급 대책으로 이대목동병원과 아주대병원 응급실에 군의관을 배치했지만, 응급실 근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되돌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해결 기미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의료 공백 상황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자”며 여·야·의·정 협의체를 제안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 제안에 응함으로써 모처럼 생산적인 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계는 2025년 의대 정원 원점 재검토를 대화의 전제로 제시해왔다. 그러나 올해 입시 계획은 이미 발표된 상황이다. 사법부 판단도 거쳤다. 2026년도 의대 정원을 논의하는 게 현실적이다. 서로 조건 없이 대화에 참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국민 건강이 위기에 놓인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의사들이 어렵게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전공의들은 협의체 운영을 계기로 진료 현장에 복귀해야 한다.
정부 역시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 증원 자체는 필요하지만, 왜 꼭 2000명이어야 하는지는 논리와 설득력이 부족했다. 정부 손을 들어준 법원조차 증원 규모 조정 가능성을 언급했다. 의료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증원 규모 계산 때문이 아니라 의료계를 설득해 변화에 동참시키는 과정이 지난한 탓이다. 툭 숫자를 던져놓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결국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여실히 보여줬다. 정부와 의료계, 정치권 모두 합리적 대안을 내고 서로 타협하는 것이 지난 7개월간 고통을 감내해온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