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시국미사

미사에 앞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비정규직, 남북관계, 4대강, 용산참사 등 현 시국사안들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이자리에서 강기갑 대표는 "국회에서 농어민, 노동자, 서민을 위하는 낮은 자세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며, 어렵고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잡아주고 눈물과 한숨을 닦아주는 일을 사제분들이 해왔듯이 함께살아가는 세상이 될려면 정치가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말하였다.

전종훈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신부님과 상남성당 황병석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 하고 있다






강기갑 대표님 카톨릭 신자여셨네요~ ^^ 영성체 의식을 받으시고 ~




그렇지 않아도 작아보이는 마티즈가 더 작아 보인다.....



마산 민주화의 성지 315의거 탑.....
1960년 3월 15일 투표가 시작되는 시각인 오전 7시, 민주당 마산시 간부들은 투표소 입구를 막아선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4할 사전 투표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투표 무효를 선언하고 거리로 나선다. 여기에 정부의 투표 조작으로 투표 통지서를 받지 못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마산 의거라고 한다. 마산 의거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던 4월 11일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양쪽 눈에 최루탄 덩이가 박힌, 마산 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학생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자 성난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다시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대 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서울에서도 4월 18일 고려대에서 처음으로 학생 시위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들이 시위를 마친 후 귀가하는 도중 정치 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4월 19일 아침 이 사건의 전말이 신문에 상세히 보도되자 시내 거의 전 대학 학생들이 '부정선거 다시하라', '민주주의 사수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간다.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거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따라 시위의 양상도 급격히 변하게 된다. 시위대에는 고등학교 학생들도 합세하였으며, 주요 지방도시로도 파급된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사태를 일단락 짓고자 한다. 그러나 4월 25일 "4.19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대학 교수단의 시위가 시작되면서 혁명의 열기는 더욱 높아간다. 마침내 4월 26일 오전 10시, 군은 시위대에 대해 발포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계엄 사령관 송요찬 장군의 발언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또한 516군사쿠테타로 미완의 민주화 운동이 되고만다.




나이도 많으시고 몸도 불편하신 마산 수정만 주민이신 할머니들 쉬지 않으시고 상남성당 => 불총거리 => 창동=>3.15의거탑=>어시장=> 창동코아 까지의 긴거리행진에도 힘드시면서도 낙오되지 않으시고 오셨는데 마지막 창동코아옆에서 잠시나마 앉아서 거리행진 정리를 지켜 보시고 계신다. 저 나이에 1년을 넘게 거대기업 그리고 마산시라는 거대한 공룡들과 싸우고 계신분들이다.
촛불은 결코 아무도 끌수가 없습니다
첫댓글 질기게 함 해보입시다....지화자!!!
역사는 민중이 뭉칠때, 비로서 그 위력을 발휘합니다!
정의 구현 사제단 화이팅!!!!!!!!!!!!!!!!!!
22222222...이분들도 너무 고마운 분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