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도착하면 소식 주세요 / 손현숙
홍화산사에 꽃이 피어서 근심이 생겼습니다 찢어진 가지에서 새순이 돋을 때부터 시작된 지병입니다 잊어야하는 무엇들이 되돌아오는 것 같아, 꽃의 그늘에서 벗어난 저만치에서 걸음을 걷는 무렵입니다 홍홧가루 자욱하게 터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골목 건너에서 아이들이 비눗방울처럼 부풀었다 꺼지는 그 순간에도 보리수나무 흰꽃 속에는 붉음을 채우고 있었던 걸까요 마당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나는 왜 검은 상복 같은 옷만 입는 걸까, 이미 옷은 노랗게 물이 든 다음입니다 막무가내 고양이 울음은 영문을 모르겠고 저녁으로 기울어지는 하늘은 낮아서 이별입니다 고개를 꺾어 바라보는 그곳에도 바람은 곱게 불어줄까요 아직은 보리수 열매가 익지 않아서 맨발로 땅을 밟아보는 지금 누가 생일 축하해, 잊었던 내가 문득 돌아옵니다 홍화산사, 울음 같은 붉음이 와글거립니다 ㅡ 계간 《문학청춘》 2023년 가을호 --------------------------
* 손현숙 시인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문학박사.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의 시』. 2002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현재 한서대, 고려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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