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뉴스를 안 본 지 벌써 몇 년은 될 듯하다.
가끔 집에 가면 아내가 보는 뉴스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
뉴스를 보다 보면 내 수명이 단축되는 것을 몸소 체험하기 때문이다.
열불 나는 그네들의 말, 세상을 보는 그들의 시각, 나라를 망국으로 인도하는 이유 등이다.
그래서 아예 텔레비전과는 인연을 끊은 것이다.
깊은 밤, 아내 몰래 볼륨을 죽이고 19금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유일한 시청이다.
그래서 내가 정치적인 상식과 소식을 얻는 곳은 유일한 조간에서 얻는다.
그것도 여당지가 아닌 보수적인 신문이 많은 위안을 준다.
신문 속에서 만나는 세상 ㅡ
시대에 따라 도덕적 개념이 변질되어도 어찌 이렇게 변하는가란 의문이다.
그들을 가르킨 스승이란 자들은 다 죽었는가?
아무리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사람(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그것이 잘못된다면 스승으로 목숨을 걸고 꾸짖어야 한다.
그들이 다니는 교회나 절 등, 종교의 목회자들은 신의 진리를 어떻게 설교했는지 의문이다.
미천한 인간들이 갈 방향과 지향해야 할 도덕적 개념을 일러주어야 함이 그들의 의무이다.
오래 전, 나는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던 전력이 있다.
사용자 측에서 본 나는 결코 위원장이 되어서는 안 될 요주위 인물이었다.
누가 되어도 좋으나 나만은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내게 세례명을 주신 신부님 말씀 ㅡ
"요셉으로 하자!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를 구원해라!"
핍박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에굽의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 세례명을 받기는 했어도 사실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다.
성당 다니는 조합원이 많아 하나님을 빙자해 표를 얻겠다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또 위원장을 나온 것이다.
결국, 그도 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혀줄 테니 양보하라고!
그는 우리 고향사람들 허락 없이 그만 둘 수 없다고 했다.
그 고향사람이란 곳이 호남이었다.
2,500여 조합원 중 201명이다.
결국, 그는 202표를 얻었고, 결과는 낙선했다.
나는 1등과 38표라는 근소한 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맞았다.
만약, 그가 나에게 202표를 주었다면 당당히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결국 1등만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이어도 값진 양보는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다.
회사에서 강성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은 결국 낙선과 함께 비참한 수순을 밟게 된다.
원치 않은 곳으로 전출,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맡으며 자진퇴사를 유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강성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더욱 강성으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표호 속에 누리던 젊은 힘은 세상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며 새로운 강자의 등장과 함께 기억속에서 사라진다.
나 또한 그 길을 걷다 자발적 퇴사와 함께 낯선 도시 생활이 시작됐다.
두 아이와 팔순의 노모, 약하디 약한 아내와의 도시생활 ㅡ
아는 사람 없는 대도시의 고층건물이 주는 위압감, 인파에 밀려 떠다니는 시골뜨기 ㅡ
도시는 냉혹했고, 삶은 고되기만 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정신없이 살아왔다.
어느새 손주 넷을 둔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내 삶 ㅡ
아들 집으로 간 아내 없는 어젯밤,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막걸리에 취해갔다.
단상에 올라 주어진 30분 연설시간도 모자라 마이크가 꺼질 때까지 외쳤던 젊은이 ㅡ
그 젊은이는 어디로 가고 축 처진 어깨 위에 늙수구레한 영감 하나가 눈을 보는 모습이 보인다.
김치 한 조각 씹으며 막걸리를 마시는 초췌한 늙은이가 외롭게만 보인다.
그래도 내 인생에 대한 자부심은 있다.
이제는 회사 사장과 공무원이 된 우리 두 아이들 ㅡ
우리 아이들은 늘 불만을 이야기 한다.
"아빠! 우린 동요보다 운동가를 듣고 자랐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그 아이들이 내게 말했다.
"아빠! 제발 우리를 봐서 여기서는 노동운동 하지 마!"
학자금이 나오는 대기업에 입사하고 난 뒤의 이야기이다.
도시로 온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어가는 아이들, 학자금 나오는 대기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부끄러움도 없었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시지 못한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은 무거웠다.
이력서 한 장 달랑 써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찾아갔다.
"저를 채용해주십시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인사과장 면담을 하며 한 말이었다.
노동운동 경력만 숨긴 내 자기소개서를 읽어본 6명이 물어본 면접은 통과됐다.
입사통보를 받던 날 ㅡ
아내조차 내 입사를 믿지 않았다.
그날, 아내는 닭똥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나 또한 기쁨에 겨워 아내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30년이 다가온다.
요즘 세상 ㅡ
나는 그 회사를 찾아갈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용기는 있으나 받아줄 리 만무하다.
내 나이가 얼만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사무실이 썰렁하다.
이 꼴난 돈 벌리지 않는 영업을 하다 보니 '사장'이란 말은 듣는다.
벌써 재난지원금을 두 번이나 받는다.
두 번에 걸쳐 200만 원 받았다.
미친 자식들이 뿌리는 돈이 반갑지만은 않다.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었다면 주지 않아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세상을 묶어놓고 제 돈도 아닌 돈을 뿌리니, 꽁꽁 얼어붙은 발등에 물을 붓는 격이다.
이 미친 세상이 언제 끝날까!!
기찻길 위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죽으려 했던 젊은 날의 기백은 있다.
그러나 그럴 곳이 없는 이 세상의 나약한 늙은이가, 이 작은 공간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을 뿐이다.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임대료를 연금으로 낸다면 누가 믿을까!!
차라리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참전용사로서,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밀림으로 총을 난사했던 쾌감을 느끼고 싶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졌다.
총구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쏘아대던 그날이 그립다.
총도 없거니와 그럴 세상이 아니기에 여기서나마 글로 총을 쏜다.
첫댓글 경제권과 생존권을 어께와 마음으로 짊어진분은 모두가 동감합니다,
열심히 살았으니 이렇게라도 토하고.또 위로받고있잖아요
이젠 한 숨 돌리시고 나자신을 위로하고 다듬고 사랑하며 살아봅시다요
지금까지 수고하셔읍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업하시고
그 어려운 공인중개사 시험에도
통과 하시는 마도님은
머리가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울화통이 터져 TV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저와 똑 같습니다
월남 파병부대 ㅡ군바리
3명 대통령 배출한 백마부대 출신으로서 ㅡ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나도 사라지고싶습니다ㅡ
동감합니다 ~☆
12회 공인중개사 출신입니다 ㅡ자주자주
모임에서 뵙고 싶습니다
마도 친구님
팍팍한 일상
솔직한 심정을 주신 글귀 백번 이해합니다 만
세상 돌아가는 거 ㅡ
티비 뉴스는 시청 하셔야죠 ㅎ
혈압에 뇌전증이 올까봐
노심초사 한적도 있었지요
ㅡㅡ
못됀 역병땜에 경제사정도
한묷합니다
하지만
졸부들
부동산으로 수십억 불로 소득으로 챙기는건
당연지사하고 그에 대한
세금내는건 절때 싫어
발악하는 졸부들에게
반감을 갇습니다
글구요
다 주택 투기꾼들
숨통조여 집값 폭락에
금리까지 오르면 사회
정의가 실현될꺼란
생각도 해보네요
그리고
땅덩이 좁은 나라에서
지역감정 조장하는 발언은
나든 ㅡ그누구든
되도록이면,자제 했슴
하구만요
정치 종교 토론은
답이 없음에ㅡ
친구님게 누가되는
답글이였슴 용서하시구요
ㅡㅡ
친구님
세상이 혼란하고
시련의
삶이라도 촛불처럼 살아
가면 좋겠읍니다
우리모두 ㅡ
남을 배려하고 베풀줄 알
며 자신을 태워 남을 밝게
비춰주는 촛불처럼 살아간
다면 평온 사랑 화목한 세상의 삶이 될것입니다
차갑고 추운 날씨지만 따듯한 마음 나누고 따듯한 손길
잡아주며 보듬고 나눔은 즐거음으로 행복할수 있는 오후길되셨으면 좋겠읍니다
🐰
친구님
답글에 반감이라 했다면
이해요망
입니다
저도
마도 칭구님의 게시글에
동감함다
그렇다고
정신줄 놓아서는
아니 될줄 암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심기일전의 자세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슴까?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해 보자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잖유?
지금껏
대기업, 공인중개사
한 가족의 장으로서
휼륭하게 살아 오신점
극찬하고 싶슴다
어려운 난국을
잘 헤쳐 나가며
희망이 보이는 날을 위해
힘을 모아 보자요
마도 칭구님~핫팅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