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철학 중간고사 대체과제
업과 부조리에 대하여
제주대학교 철학과
2023201021 고미선
내가 밀린일들을 시작할 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Lazenca, Save Us 라는 노래이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 즉 나의 ‘업’에 쫓겨 살아왔었다. 이제까지는 이 ‘업’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인과율과 관련한, 즉 과거에 행했던 일이 추후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흔히 쓰던 ‘업’, ‘카르마’란 이 단어가 인도 불교에서는 중요한 단어이다.
인도인은 인간의 삶을 윤회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인생은 지금의 삶이 유한한 삶이 아니라 식물의 세계와 같이 계속해서 생사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여러 형태의 삶을 영위하게끔 되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한 행위(카르마)는 뿌려진 씨와 같아서 반드시 그 열매, 결과를 보고야 말며, 우리가 행한 무수한 행위는 그 결과가 현세에서 다 얻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또 하나의, 혹은 하나 이상의 내세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즉 선한 행동을 했을 때, 선한 결과가 따름으로써, 추후의 내세에서 그 결과를 얻게 된다. 카르마란 ‘현재의 행위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이자,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이는 곧 인간의 삶, 인생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해 생각을 해보다가 ‘철학과 문학’ 전공 수업시간에 배우고있는 까뮈의 부조리 개념과 관련짓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내가 배운 까뮈는 정직하고 정의롭고 성실한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고, 불평등과 모순으로 가득찬 삶. 이것을 ‘부조리’하다고 하였다. 까뮈가 17세기의 부조리 개념에서 강조시킨 부분은 ‘터무니 없는 소리, 모순, 있을 수 없는 일, 불균형’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 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영적 존재로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자유의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수님께서 수업 중 하신 말씀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중 하나는 “인과응보, 사필귀정은 없다.”였다. 행위의 선악에 따른 결과를 후에 받음으로써, 흔히 죗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인과응보’, 무슨일이든 반드시 옳게 돌아간다는 ‘사필귀정’. 이 두 사자성어를 믿고 살아온 나의 입장에서는 ‘부조리’의 개념과 맞물려 좀 충격이였다. 한 예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곳에서 근무 변경이나 연장을 부탁하시면 늘 ‘좋은게 좋은거지, 나중에 돌아오겠지..’라 생각하며 늘 부탁에 응했는데 결국 남은 것은 안 좋아진 건강뿐이였다. 선의를 베푼 이러한 행위들이 그저 ‘추후 좋은 것으로 돌아오겠지’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였고, 세상은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부조리’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탁을 다시 받는다 해도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할것같다. 까뮈가 부조리에 반항하는 삶을 이야기 했던것처럼 말이다. 호의로 행했던 나의 행위들은 내세에 선한 결과를 받기 위해, 대가를 바라고 한 행위들이 아닌, 공감과 배려 등의 나의 도덕적 감정에 따라 행한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내 나름의 해석을 해본다면 인도인들이 불교에서 업, 카르마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을 말한게 아닌가 싶다. ‘내세’라는 것은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자, 아무것도 정의 되지 않은 세상이다. 이러한 내세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만들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마치 한국 사회의 아무도 본적이 없고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아이들이 나쁜 행동을 하려할때마다 “너 그렇게 하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라고 하는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