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최석영-
6부 소리 4회
조선조 때 자식 하나 잘 길러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호남에 관직 하나를 얻기 위해 이리 저리 연줄을 대고 자리 값을 내고 뇌물을 받쳐야 했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또 상납을 해야 했다. 고관대작의 비단이 그들이 먹는 기름진 음식이 화려한 비단 모두가 백성들의 고혈이고 살점이었다.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여 시작한 일은 동진강의 탈 없는 보(湺)를 놔두고 하류 쪽에 새로운 보 하나 더 쌓았다. 그리고 그 명목으로 700석의 수세를 추가로 거두어 들였다.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의 트집을 잡아 2만 냥을 빼앗았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고 크고 작은 재판에 돈이 오가며 죄 있는 자가 죄 없이 되고 죄 없는 자가 죄 있이 되는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세상이 극심하여졌다. 그러나 이것을 운운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당연한 이치고 그것이 관행인데 그러지 못하는 자가 바보고 그러지 못하는 놈이 힘없고 능력 없는 놈인 것이다. 매 값 이라는 게 있었다. 소리는 크나 아프지 않게 때리는 척만 하게 하는 대가로 사령에게 뒷돈을 주는 것인데 이것을 주지 못한 자는 그 앙갚음으로 한 대를 맞아도 열대를 맞은 것만큼이나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다. 작은 도둑질을 하는 관리들을 눈감아 주고 이권을 얻은 하급관리 작은 도적들은 자기 이권을 지키기 위해 상급관리 큰 도둑에게 충성을 다하는 비리의 고리가 기승하던 때였다. 빨아도, 빨아도 단물이 계속해서 나는 땅 만경들 고부, 조병갑은 그 땅에서 평생을 흥청거려도 부족하지 않을 재물을 모았고 또 위에 상납을 하였다. 웬만큼 해먹으면 말도 없다. 그저 저놈들은 그러는 놈들이라고 외면해 버린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하자 민원이 들끓었고 상소가 빗발쳤다. 고부군민이 봉기하여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또한 파다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정사실로 여겨졌고 나라에서도 이 일이 감지되자 조병갑 이를 익산 군수로 전보발령을 내렸다. 그러나 골칫덩어리 고부로 오려는 관리가 없었다. 있다 해도 조병갑이가 적극적으로 말리고 다니는 통에 임명장을 받고도 현장에 내려가는 관리가 없었고 조병갑 이는 고부를 떠나지도 않았다.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이 조병갑에게 맞아서 장독이 올라 죽었다. 그는 고부 향교의 장의(掌議-향교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자 중의 으뜸)를 지낸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는데 조병갑이의 학정에 항거하여 민소를 제기했다가 잡혀가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으로 죽었다. 전창혁은 배운데 가 있어 조병갑 이에게 대들다가 맞아 죽고 그 아들이 전봉준이라는 인물이라 역사 남고 기록에 남았지만 그저 소 한 마리 땅 한 뙤기 남의 집 품팔이나 하며 근근이 살아가다가 밉보여 매 맞고 재물 뺏고 몸 뺏는 것에 반항하다가 맞아 죽고 쫓겨난 부지기수의 사람들은 이름도 없고 알지도 못한 채 만경강물에 떠내려갔을 뿐이다. 아비와 형이 죽고 처와 딸을 뺏긴 자들이 더 이상은 못살겠다고 ‘만석보를 내 손으로 부수리라, 썩어 문드러진 이 세상을 부수리라!'
1894년 재임에 성공한 조병갑의 부임 일을 기해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농민군 천여 명이 말목장터에서 봉기했다. 말목장터를 지켜온 커다란 감나무 밑에서 전봉준은 갑오년 그 길고도 아름다운 싸움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 읍의 수령, 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 시려라”
폐정개혁을 외치며 노도와 같이 고부관아로 밀고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 모두를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조병갑 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라감사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라는 명령과 함께 용안현감 박원명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냈다. 아- 순진하고 어리석은 백성들 잡혀가는 자도 잡아가는 자도 다 한통속이거늘 그저 임금이 나라에서 우리 억울한 분을 풀어 주리라 믿었을 테지. 훗날 조병갑이가 대한제국 판사가 되어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했다는 사실을 또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 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몸을 피해 사태를 관망하던 동학군 지도부는 돌아가는 사태가 되돌릴 수 없음을 인식한 전봉준은 이 기회에 근본적으로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과 교조의 신원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병갑을 몰아낸 해 3월 하순, 태인˙무장˙금구˙부안˙고창˙흥덕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
(盡滅)시킬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퉈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합류하자 동학군들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호남을 쓸고 닦으며 전주로 올라가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자료에서 발췌-
오윤봉과 그 자부 이 씨가 연재 마루턱에서 통정대부를 제수 받고 금의환향 하는 일행과 마주쳐 그 일행이 지나도록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길이가 하도 길어 배가 불러 턱밑이 받친 며느리는 한쪽으로 비켜나 앉아 숨을 헐떡였다.
“아버님… 저 양반은 누구다요?”
“깃발을 보니 송흥록이구나. 운봉에 오면 저이를 정말 보려나.… 했더니 운봉에 가기도 전에 보게 되었구나.”
송흥록은 당대의 명창이었다. 글을 읽는 자든 모르는 자든 송흥록 모흥갑 이를 모르는 자가 없었고 장터에서 시시껄렁한 잡소리를 하는 놀이패들도 그저 송흥록 이에게 배웠네. 모흥갑 이에게 배웠네. 너스레를 떨기가 마련이었다.
“저이가 원래 아비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려 알았다는 구나. 하도 그 재주가 아까운지라 서당 훈장이 장탄식을 하면서 ‘네가 양반가에 태어났더라면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참 아깝다.’하였다는 구나.”
“그럼 저 양반 집이 소리 허는 집이었대요?”
“그건 아니고 뭐라더라? 응, 그래 저 양반 부친이 권삼득이라는 명창의 수행고수였다는 구나. 북을 치는 고수니 소리는 잘 알 테고 자식에게 싹수가 보이니 아비로서 가르칠 밖에.”
고개를 넘자 산 아래를 분 두 사람이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세상에 이런 땅도 있던가. 구비 구비 아흔 아홉 구비를 돌며 오르고 올라 고개를 넘으니 세상이 탁 트여 눈앞으로 기암 고봉이 펼쳐진 가운데 소쿠리 같이 둥근 들녘에 논이며 밭이며 옹기종기 마을이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따뜻하고 그득하다.
“아버님. 남원도 물산이 많아 살만하다 하였더니 운봉은 거지도 없겠소.”
“아서라 말어라. 어데 저것이 우리들 것이더냐.”
“그래도 저리 들이 넓으니 떨어지는 알곡이라도 있을 성 싶으요.”
“본시 쥐가 훔쳐 먹는 알곡은 용서가 되도 사람이 훔쳐 먹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사람이니라.”
“아버님 그러면 어쩌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힘써 일할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정감록이 가르쳐 준대로 동점촌을 찾아 드는 게 아니냐.”
며느리의 질문을 받고 보니 오영감 역시 동점촌이 어딘지를 모른다. 정작 정감록에는 동점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여주지를 않은 것이다. 그저 막연히 운봉으로 가서 동점촌이 어디냐 물으면 사람들이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대로 집을 나섰으니 또 그리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어보자. 운봉에 왔으니 운봉 사람에게 물어 보면 동점촌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것이 아니냐.”
하마비가 보였다. 정3품 이하는 말에서 내려서 운봉으로 들어오라는 표석이다. 두류산 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배꼽 같은 이 땅에 정 3품이 다스리다니. 드세고 억센 기운이 저 산 위에서 휙- 하고 불어왔다.
‘저 산이 무슨 산일꼬?’
오영감이 지그시 내려다보는 산들을 연신 바라본다. 뾰족한 산 둥근 산 톱니같이 엉게덩게 뭉친 산 참 산속에 산이다.
“길 좀 물읍시다. 동점촌을 갈라면 아적 멀었소?”
허름한 도포에 갓을 썼으나 행색에 빈티가 나는 행인에게 오영감이 넉살스럽게 길을 물었다. 함양에서 남원으로 연결된 길이라 오가는 길손이 길 묻는 게 예사이지만 외부 사람을 경계하는 듯 영감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어딜 물 으요?”
“동점촌이 어디요?”
“동점촌? 그게 어디 있는 게요?”
“어디라뇨?”
동문서답 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알지 못할 말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가 말할 수 없다. 그저 동점촌이 어디요 하고 물으면 서쪽으로 가쇼 동쪽으로 가쇼 하면 오죽이나 좋을까? 사람을 잘못 선택하여 묻을 것일까?
“동점촌을 모르시오?”
“어느 방에 있는 동리요?”
“방이요?”
“하- 이 양반. 운봉이 얼마나 큰 땅인지 아시오? 운봉 본방 산래방 아영방 그리고 이서가 몇 개냐…하면.”
“아니… 그런 거 필요 없고 정감록에 나와 있는 동점촌이 어디에 있는가만 알면 되오.”
말대답을 하던 사람이 영감을 훑어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다. 귀신잡록에 홀려 또 사람 하나를 잡았다는 눈이다.
“예기 이보쇼. 난 또 무슨 소리라고. 그래 그 수수께끼 같은 참언을 믿고 부지불숙 운봉 땅을 찾아 들었단 말이요?”
영감도 며느리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운봉을 물어물어 찾아 왔더니 이제는 동점촌이 어딘지를 모른단다. 귀신에게 홀린 것도 아니고 참언에 속은 것도 아닌데 숨이 막히도록 막막하다.
“아버님 우리는 이제 어쩐대요? 내달이면 산달인데 우리는 이제 어쩐대요?”
오영감은 본래 해남 율촌 사람이다. 그런데 그곳도 학정이 포악하여 낮에는 포졸을 앞세운 촌장과 이서가 들이닥쳐 닦달하고 밤에는 뒷산 도적들이 곡식을 뺏어갔다. 장터에서 만나면 아는 체도 하던 놈들이 순식간에 도적떼가 되어 곡식을 뺏고 뒤짐 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한해 농사 다 뺏긴 아들놈이 미처 발광을 하다가 도적놈의 칼에 미명 횡사를 하고서 오영감은 결심을 했다. 떠나자 여기 아니면 살 곳이 없으랴. 그러나 청상인 며느리를 앞 세우 허리 굽은 늙은이가 어디로 갈까? 배속에 있는 저놈은 또 어디서 살만한 세상을 만날까? 동점촌… 그래 동점촌으로 가자. 그래서 나선 길이 운봉이다. 전남 함평서 운봉까지 배부른 며느리 앞세우고 꼬박 한 달이다. 다시 옛 집으로 돌아가자니 가는 도중에 해산할 것인데 이일을 어쩐다. 어쩐다.
“이랴… 이랴…”
해 지는 들녘에 소 등에 길마(말발굽 모양으로 소 등에 얹어 짐을 싣던 기구)에 장작단을 실은 사람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넋 놓은 두 사람을 지나가며 흥얼 응헐 노랫가락이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오시는 님을 보내는 꿈아 오시는 님을 보내지 말고 잠들은 나를 깨워를 주지 언제나 알뜰한 님을 만나서 긴-밤 짜룹게 샐거나 헤-
공산 명월아 말 물어 보자 임 그리워 죽은 무덤이 몇몇이나 되느냐 유정님 사별후로 수심 장탄으로 사람 살길이 전혀 없네 언제나 알뜰한 유정님 만나서 만단청외를 풀어볼거나 헤-
사랑 사랑 사랑이 뭐다 길래 잠들기 전에는 못 잊겄네 잊으랴고 잊자허여 벽을 안고 누워를 보니 그 벽이 점점 변하여서 님에 얼굴이 되는 거나 헤-”
“이보시오. 초면에 미안허오만 그 소리 좀 저만-치 가거들랑 허시오. 그 소리 더 듣다가는 우리 며느리 가슴 뭉그러 지것소.”
“아…버님…”
시아버지 차라리 아무 소리나 말지 괜한 사람 소리 못하게 하여 꾹 참은 설움을 쏟게 하여 유복자 품은 청상의 설움을 터트리고 말았다.
-> 계 속
첫댓글 내용이 가볍지가 않아 드믄드믄 보기 힘들 글 이지만 오늘은 세편 연속으로 기억에 담고 갑니다, 다음엔 또 잊어 다시 살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