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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덮고 놀자!
작년에 작은 어린이도서관에서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에게 달마다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다. 그림책을 읽고 나면 간단한 독후활동을 했는데 간단한 미술활동을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놀기도 했다. 도서관 앞에 있는 좁은 마당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를 했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여섯 살 먹은 딸아이도 함께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오늘은 책 몇 권 읽어줄 거야?"
"글쎄, 두 권이나 세 권쯤? 몇 권 읽어주면 좋겠는데?"
"난 딱 한 권만 읽었으면 좋겠어."
"왜? 엄마가 책 읽어주는 거 재미없어?"
"아니, 그건 아닌데 책은 한 권만 읽고 더 오래 놀았으면 좋겠어."
그 무렵 딸아이는 쫓고 쫓기는 놀이를 참 좋아했는데 언니랑 둘이서는 그런 놀이를 못한다면서 도서관에서는 다른 또래 아이들과 놀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어쩌면 그림책을 보는 내내 어서 빨리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을 보는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게 당연하다.
마음 같아서는 올 겨울에는 책은 한 권도 읽지 말고 신나게 뛰어 놀기만 하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차가 넘쳐나는 도시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만한 넓은 마당이 없고, 동네 놀이터에는 함께 뛰어 놀 친구들이 없다.
3학년인 딸아이는 학교가 끝나도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늘 불만이다. 영어 학원, 수학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을 바쁘게 옮겨 다니는 아이들에게 놀이는 이제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행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쩌다 사촌들이 집에 놀러 와서 모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노는 날이면 아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늘 동네 골목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내 어린 시절이 그립고 지금 아이들이 참 가엾기만 하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날 때도 그런 아쉬움이 늘 따라다닌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여기 저기 치료실에 가느라 바쁘고, 치료실에 가지 않는 아이들도 사는 곳이 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편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나 드라마에 더 흥미를 보이기도 한다.
아쉬운 대로 나는 또 그림책을 꺼내든다. 그림책을 보기만 해도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그림책을 골라본다.
『둥!』(야마시타 요스케 글. 초 신타 그림, 천둥거인)은 도깨비 용이와 사람 아이 건이가 만나 북을 '둥둥'치며 싸움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용이와 건이는 둘 다 지독한 말썽꾸러기다. 오죽했으면 둘 다 집에서 쫓겨났을까?
두 아이의 북소리를 들은 용이와 건이의 부모도 그 북싸움에 합류한다. 싸움은 점점 번져, 사람들과 도깨비, 고양이와 강아지, 닭과 소까지 모두 몰려나와 북을 친다. 그리고 이 즐거운 싸움은 예기치 않은 결말을 맺는다. '두둥 두둥 두둥 둥둥' 하는 다양한 북소리들이 그림책 전체에 리듬감있게 흩어져 있다.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저도 '두둥 두둥 둥둥' 북소리를 따라 하며 흥겨운 싸움에 함께 한다. 신나는 북소리에 용이네와 건이네가 화해를 하고 '다음에 또 놀자'고 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아이들도 큰 숨을 내쉬며 즐거워한다.
모든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아이들의 놀이 본능을 담은 그림책을 보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그림책이 실제 그림책을 사 주는 부모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고 한다. 그림도 좀 유치해 보이고, 글자도 별로 없어서 그러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림책을 좀 더 비싸고 세련된 학습지쯤으로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장난감 같은 그림책이 마땅찮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이 그림책을 읽고 나면 한글을 뗄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을 보고 나면 아이가 좀 얌전해지고, 부모님 말도 잘 들을까 생각하면서 그림책을 고른다면 『둥!』같은 그림책들은 늘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요즘은 그림책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즐기는 장르가 되었으니 그림책의 기능도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 그림책은 재미있는 놀잇감이어야 한다. 놀잇감인 그림책으로 공부나 치료를 하겠다고 달려든다면 그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을 것이다.
『눈 오는 날』(에즈라 잭 키츠 글 그림, 비룡소)은 1963년 칼데콧 상을 받은 그림책으로 책이 나온 지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어느 겨울 날 아침, 하얗게 쌓인 눈을 본 피터가 눈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통해 어린 아이의 심리와 행동을 잘 보여준다. 나도 아이들과 해마다 겨울이면 이 그림책을 함께 본다. 그림책을 보고 나면 어서 빨리 눈이 내리기를, 교실 앞 좁은 마당에 어서 흰 눈이 소복이 쌓이기를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눈이 오면 무조건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그림책 속에 피터가 했던 것처럼 한바탕 신나게 놀아야 한다. 눈 뭉쳐서 던지기, 눈사람 만들기, 긴 막대기로 눈 위에 기다란 선 만들기,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는 눈 떨어뜨리기, 눈 더미 위에서 미끄럼타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눈 위에 천사 모양 만들기다.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하는 우리 학교 아이들도 눈밭에 눕혀 놓으면 팔과 다리를 제멋대로 움직이며 천사의 날개를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
요즘에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12월이 다 지나가도록 눈다운 눈이 오지 않는 해가 더 많다. 그러면 방학 때라도 눈이 오면 꼭 '피터'처럼 놀아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솔직히 제대로 숙제를 해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추워서, 귀찮아서, 바빠서, 눈이 와도 제대로 놀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 중 대부분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놀 수도 없다. 그림책 속 '피터'의 엄마는 따뜻한 옷과 장갑, 모자만 챙겨주어도 되지만 우리 아이들은 다른 어른이나 친구들이 함께 나가서 놀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에즈라 잭 키츠의 다른 그림책(『내 친구 루이』,『상자 속 여행』)에는 조금 특별한 아이 '루이'가 나오는데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루이를 세상 속으로 끌고 나오는 것은 언제나 루이의 친구들이다.
겨울을 기다리면서 보는 그림책이 『눈 오는 날』이라면 여름을 기다리면서 보는 책은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문승연 글, 이수지 그림, 천둥거인)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경험하는 환상 세계를 신나게 담아낸 그림책이다. 진이와 훈이 남매는 목욕을 하라는 엄마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물감을 찾아내어 온 몸에 그림을 그리고 한바탕 신나게 논다. 붓질 한 번에 인디언 추장이 되기도 하고,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가 되기도 하면서 즐거운 상상놀이를 한다.
처음 그림책을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잔소리꾼 엄마 마음이 되어 "방 안을 이렇게 어질러 놓으면 어떻게 해!"하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도 진이와 훈이 남매의 엄마처럼 너그럽게 아이 마음으로 돌아가 함께 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작년 여름 캠프 때, 초등부 아이들과 이 그림책을 보고 물감놀이를 했는데 몇몇 아이들은 몸에 물감이 묻는 것을 못견뎌했다. 특별히 깔끔한 성격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생각해보니 그건 어른들이 가르친 것이다. 뭐 묻히지 마라, 깨끗이 치워라, 더럽히지 마라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어른들 덕분에 아이들은 놀 때도 자꾸 주저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려면 집안이 너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보다는 조금 어질러져 있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아이들과 놀 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싶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야 놀 수 있다. 조금 어질러져도 괜찮다고, 못 해도 상관없다고 자꾸 말해 주어야 아이들도 편하게 놀 수 있다.
계절이나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의 정신연령과 상관없이 누구나 즐겁게 놀 수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몸놀이다. 『아빠랑 함께 피자놀이를』(윌리엄 스타이크 글 그림, 보림)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듬뿍 담겨있는 그림책이다. 비가 와서 밖에 나가 공놀이를 하지 못하게 돼서 시무룩한 피트를 위해 아빠는 피자놀이를 한다. 아빠가 신나게 주무르며 반죽을 하고 기름칠을 하는 피자는 바로 피트다.
어렵고 복잡한 놀이는 아니지만 아이는 아빠와 함께 몸으로 놀면서 얼마나 신나고 행복했을까? 학기 초 아이들과 조금 서먹할 때 이 책을 함께 읽고 한바탕 신나게 몸으로 놀고 나면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꼭 피자놀이를 할 필요는 없다. 얇은 담요 한 장 만 있으면 김밥 놀이도 할 수 있고, 친구들이 여럿 있다면 햄버거 놀이를 할 수도 있다.
좀 더 다양한 놀이를 하고 싶다면 『께롱께롱 놀이노래』(편해문 지음, 윤정주 그림, 보리)를 권한다. 10년 동안 우리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이들 노래와 놀이를 수집한 저자가 그 중 50곡을 골라 담은 그림 동요책인데 자연과 더불어 자란 옛아이들의 놀이와 노래로 꾸며져 있다.
계절에 따른 놀이, 집 안에서 하는 놀이, 방안에서 하는 놀이, 낮에 하는 놀이, 밤에 하는 놀이들이 흥겨운 아이들의 노래와 함께 펼쳐진다. 50개나 되는 놀이노래를 언제 다 하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책을 펼쳐놓고 보다가 아무 때나 책을 덮고 나가서 놀면 그만이다.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아도 친구들과 밖에서 신나게 잘 놀 수 있다면 좋겠다. 잘 노는 아이가 잘 자란다. 그림책이 없던 옛날에도 아이들은 잘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지 않고 자란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놀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이 걱정이다.
첫댓글 술~술~ 이야기가 참 맛나고 시원시원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 썰매타기 수업도 신나게 해야지.....
공작가, 글이 어찌그리 맛깔스러운지......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감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