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그 맛을 봐 불면 미쳐부러."
철 들기 전부터 고깃배를 탔다는 증도(曾島) 어부 김정석(57)씨의 호언장담입니다. 어부는 그날 새벽 외갈도 앞바다에서 이 9㎏짜리 수컷 민어를 잡았습니다. 연분홍빛 민어(民魚) 회 한 점. 다행히 광인(狂人)의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의 선입관은 단숨에 날려버릴 흐벅지고 단맛이었습니다.
- ▲ ‘제철 민어’를 위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초복이면 증도 앞바다에서 짝을 찾는 민어의 울음이 시끄러울 것이다. 사진은 증도 어부 김정석씨가 이날 새벽 앞바다에서 잡아온 9㎏ 넘는 수컷.
"명성과 달리 느끼하고 비릿하다"는 지금까지의 민어회에 대한 실망은, 결국 선도(鮮度) 낮은 놈들을 만났던 서울내기의 불운 때문이었을까요. "민어는 맛이 달다"고 썼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처음으로 동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름 민어'의 계절, 전남 신안군 증도를 찾았습니다. 인구 2200명에 기껏해야 차로 40분이면 일주가 가능한 이 작은 섬은 제철 민어 말고도 치명적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더군요.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지정' '금연의 섬' 등 어떤 추상적인 구호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밤이면 수만 마리의 짱뚱어와 농게가 구멍을 뚫는 갯벌, 카리브해 해변을 연상하게 만드는 짚파라솔의 해수욕장, 한반도를 빼닮은 해송숲, 가난의 상징이었던 소금밭이 국내 최대 천일염전과 소금 힐링센터로 바뀐 풍경,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담근 독특한 양파김치 등등.
물론 염두에 둬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지난 3월 말의 증도대교 임시개통은 양날의 검. 더 이상 배 타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선물했지만, 대신 주중(週中)을 제외하면 호젓함을 누릴 수 없는 시끌벅적한 관광지로 만들어놓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더라도 증도는 다시 한 번 찾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섬이었습니다.
증도로 떠나기 전날 밤 소설가 김훈과 술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직 증도를 가보지 못했다는 작가는 고량주를 기울이며 "(전남)도지사가 꼭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는데…"고 아쉬워하더군요.
1박2일의 섬 여행을 통해, 도지사가 왜 그렇게 욕심을 냈는지를 어림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 맛을 봐 불면 미쳐불지도 모르는 섬, 증도'입니다.
증도 '별미 삼총사' 민어·짱뚱어·양파김치
여름 증도는 민어의 나라다. 임자도, 지도와 함께 신안군은 전국 최고의 민어 집산지 중 하나. 산란을 위해 태평양에서 신안 앞바다로 회귀한 여름 민어는 초복 무렵부터 특유의 울음보가 터진다.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가 제철이니, 지금부터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놈들을 만날 수 있다. 증도의 갯벌은 짱뚱어의 나라. 이름보다 모양새가 더 엉뚱한 이 못생긴 물고기는, 하지만 증도에선 '갯벌 위의 쇠고기'라고 불릴 만큼 영양 만점의 먹거리다. 초여름 증도는 양파의 나라이기도 하다. 일년 중 이맘때 수확한다. 해풍에 단련되고 뻘을 먹고 자란 잘생긴 증도 양파는 잘 썩지 않고 부드러우며 달다. 서울에서는 낯선 양파김치 맛이 기막히다. 민어, 짱뚱어, 양파를 주제로, 주말매거진팀이 추천하는 증도의 별미 맛집 3선.
◆민어-여름보양식의 제왕
이 집에서 민어회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버렸다. 모섬 증도와 작은 나무다리로 연결된 초소형 무인도, 소단도에 자리잡은 카페 겸 횟집 '트레저 아일랜드'(061-271-8988). 큰 형님은 배 타고 나가 고기 잡고, 막내 동생이 사장이다. 화순 출신 둘째 형수는 주방을 맡고, 서울내기 막내 동서가 홀 서빙을 책임진다. 일종의 패밀리 비즈니스. 맛은 있지만 품위를 포기해야 하는 시골 맛집과 달리, 세련된 인테리어에 청결까지 갖췄다.
- ▲ ‘트레저 아일랜드’의 민어회.
'트레저 아일랜드'의 민어회는 연분홍색이었고, 맛은 달았다. 뱃살 부위는 기름기가 많아 고소했고, 옛날에는 아교풀 재료로 썼다는 부레는 쫄깃하고 차지다. 삼복 복달임 음식의 으뜸이라는 민어탕은 담백했다.
4인상 기준 11만원(2인상 9만5000원)에 민어회, 민어탕, 숭어 어란(魚卵), 간장 게장, 10여 가지 맛난 반찬을 맛볼 수 있다. 소금에 절인 뒤 일주일간 매일 참기름·간장을 발라 해풍에 말렸다는 증도 출신 큰형수 솜씨의 어란도 일품이고, 증도 갯벌에서 건져 올린 매생이, 고사리, 돌김, 숭어창젓 등도 맛나다. 어란 없는 '외갈도'는 4인 10만원(2인 8만5000원), 어란·게장 없는 '내갈도'는 9만원(7만5000원), 식사 나오지 않고 민어회만 있는 '송이도'는 7만원(5만5000원)이다. 단, 예약 손님만 받는다. 민어회의 선도를 유지하겠다는 욕심 때문인데, 주말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짱뚱어-갯벌 위의 쇠고기
거칠게 말해 짱뚱어는 뻘 먹고 사는 고기다. 갯벌의 유기물을 먹고 자라는 놈들. 짱뚱어는 그래서 청정한 갯벌을 상징한다. 재빠를 때는 도마뱀 같기도 하고, 등지느러미 달린 자그마한 메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긍정적으로 묘사했을 경우. 첫인상은 이렇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본 관객이라면, 그 괴물의 원형이 어디에서 왔는지 바로 추정 가능한 외양을 지녔다.
- ▲ ‘갯풍민박식당’의 짱뚱어탕.
◆양파김치-김치의 발견
북무안 IC를 빠져나와 증도로 가는 30분 동안은 내내 양파와 함께였다. 무안 양파야 이름난 바 오래지만, 연작(連作)이 계속되어 힘을 잃은 흙 때문에 점점 경작지가 바깥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붉은 망(網)에 담긴 채 다소곳하게 수매를 기다리는 양파가 온 밭에 지천이다. "양파 차량에 우선 협조 바랍니다"라는 농협 플래카드가 이곳이 양파의 나라임을 웅변하고 있다.
증도 대교를 건너자마자 자리한 증도 특산 농수산판매점(061-261-5005)에서 20㎏ 한 망을 1만 3000원에 팔고 있다. 설광춘 대표는 "저온 창고에 넣으면 1년을 보관해도 썩지 않는다. 그냥 놔둬도 6개월은 간다. 해풍과 갯벌을 먹고 자란 증도 양파만의 자랑"이라고 했다. 웬만한 식당 어디를 가도 이 양파로 담은 김치를 맛볼 수 있다.
- ▲ ‘반올림’의 양파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