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첩첩산중 고달픈 군생활의 대명사처럼 남아 있는 강원도 인제.하지만 이제는 전설이 됐다.
시원하게 뚫린 44번 홍천~인제간 도로를 타고 1시간여 만에 도착한 강원도 인제 내설악 자락은 회색빛 콘크리트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스한 어머니의 품속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계리 예술인촌에서 서양화가 이귀화(51) 화백을 만나는 순간 느낌은 현실이 됐다.
“2년 전 서울서 내려왔어요.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싶어서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으로 내려왔는데 오히려 더 바빠졌지요. 문화 혜택에 목마른 이곳 사람들과 그림으로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요.”
이화백은 지난해 11월 이곳에 초이(草伊) 아트스쿨을 열었다. 작품 활동차 내려와 인연을 맺은 인제 주민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달란트를 나눠 주기 위해 갤러리 한쪽에 조그마한 아틀리에(atelier)를 마련했다.
초이는 이화백의 호. ‘장점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 풀(잡초)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잡초는 이화백이 주로 화폭에 담는 소재다.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순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곳에 육군12사단 장병들도 초대했다.매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3시간 동안 이화백의 지도 아래 30여 명의 장병이 무료로 그림을 배우고 있다.
동아리 활동 일환으로 마련된 이 수업에는 미대 출신 병사부터 학창시절 미술시간을 가장 싫어했다는 장교까지 참가하고 있다. 실력이 천차만별인 까닭에 커리큘럼은 개인별 눈높이에 맞췄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새 하얀 도화지를 대하고 앉은 빛나는 눈빛, 눈빛이다.
그림 동아리 모임을 이끌고 있는 사단 정비대대 교육장교 임재정(26·학군43기) 중위는 “감성이 풍부한 신세대 병사들에게 재미와 흥미를 줄 수 있는 참여형 교육으로 호응이 높습니다. 특히 단순 미술 기술이 아닌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화백의 수업 방식이 장병들을 수채화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예술인촌까지 들어오는 버스가 없어 1시간 동안 자전거 페달을 밟아 수업에 참여한 간부, 경계근무하며 바라봤던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이 가슴으로 느껴져 벅차기까지하다는 병사…. 이렇게 그림은 소리없이 장병들의 가슴을 열정으로 채우고 있었다.
지난 4월 말, 초이아트스쿨에서 희망을 키워 온 지역 주민과 장병들이 힘을 모아 작은 전시회을 열었다. 장병들은 반합·군화 등 군생활을 담은 데생·일러스트 등 20여 점을 수줍게 출품했다. 이화백은 전시회 팸플릿을 전국에 계신 장병 부모님께 보냈다.
“장병들 눈빛이 달랐어요. 생애 첫 전시회였으니까요. 설렘과 기대 속에 두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며 자신을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이화백)이화백과 장병들은 이달 말 또 한번의 도전에 나선다. 소품전이 그것. 이화백은 장병들의 작품을 판매까지 해볼 요량이다.
“단돈 천 원이든 만 원이든 나의 창의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일즈가 된다는 것을 장병들에게 알려 줄 생각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돌아온다는 세상 이치도 가르치고요. 더불어 ‘내 인생의 도화지에 뭘 그릴지’ 스스로 판단하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 마음의 키가 한 뼘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초이 이귀화 화백 프로필 - 국제미술교류협회, 경향미술대전 등 운영위원 - 초이아트스쿨 교장 -프랑스 르 살롱전 입상 -한일 현대미술 조망전 초대 외 국내외 단체·기획·초대전 150여 회
대한의 아들들에게“추웅~성!”5월 어느 봄날. 그날따라 유난히 군화끈도 천천히 매고 몇 걸음 걸어가다 주춤하며 돌아서더니 느리고 낮은,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 제대합니다.”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이 늦은 봄날에, 별안간 아들은 훌륭한 어른으로 다가왔다. 헤어짐에 가슴 한구석이 아쉬움으로 비어지고 씩씩하고 훌륭한 어른 돼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감사함으로 채워지는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전국에서 모였다. 계급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하던 일도, 전공도 다르고. 한계리 추위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일주일의 활력소라며 꽁꽁 언 겨울날에도 지붕도 없는 군용트럭을 타고 온 아들들의 얼굴빛은 온통 자줏빛으로 변해 있었다. 형·동생처럼, 엄마와 아들처럼 소묘도 하고, 수채화도, 진로 문제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따뜻하게 사랑했는지.
난의 향기는 삼십 리를 간다지만 우리 인간의 향기는 우주를 덮고도 남으라고 철학적 미학을 이야기할 때의 눈망울들은 멀리멀리 허공을 향했지. 세월이 흘러 병영 시절을 떠올릴 때면 이곳을 생각하겠지. 아들들아, ‘나’라는 개체가 어느 날 ‘우리’라는 입체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예쁜 아들딸과 아내와 꼭 이곳을 찾으리라 했지.
“충성!” 그날엔 초이아트스쿨을 다시 찾은 아들들의 충성소리는 빠르고 힘차게 설악의 골을 돌아돌아 기쁨의 떨림으로 메아리쳐 전국을 휘몰아치겠지.우리는 귀한 사람이다. 늘 겸손하고 도도하며 당당하자. 멋있게 살자.
설악의 정기를 받아 진정 이 시대의 휴머니스트가 되자꾸나. 아들들아! 사랑한다. 너희 모두의 엄마, 초이가….
2007. 6.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