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과 여교사
이 이야기는 1978년 7월 20일 동락국민학교 교무주임인 최종렬 교사의 증언을 기록한 내용이다.(출처 : 국방부 전사편찬위, 『한국전쟁사(지연작전)』, 1979년, pp.272~273) |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학교에는 교장 양덕주 선생을 위시하여 남선생 7명, 여선생 2명이 있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적이 여주, 장호원으로 침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휴학령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각 선생은 피난처를 찾아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그들이 물러난 9월 중순께 복교하였는데, 김재옥 여선생만이 학교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부임하여 1개월이 좀 지났을 무렵에 생긴 일로서, 그녀의 고향은 여기서 멀지 않은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장호원 남쪽 5km)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던중, 7월 6일 북한군이 학교를 점령하고 마을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때 김교사로부터 들은 바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 나는 언제나 다름없이 학교에 나와 있었는데 그날 점심때가 되었을 무렵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았더니, 북한군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학교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펴 보았더니, 이 마을 청년 한상준이 피살되고, 가가호호의 소, 돼지, 닭 등이 마구 도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들 눈을 피하여 무극리로 공격중이라는 국군에 고하기 위하여 644고지의 험한 능선을 몇 개 넘어서 동 고지의 서측 중복에 있는 암자까지 뛰어 갔다. 거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 있어서 잠시 들려서 사정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이때에 무극리로 진출하고 있을 것으로 알았던 국군이 암자 앞을 지나 644고지로 가고 있음을 보았다.(좌측 사진 :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서워진 김재옥 여사 충혼비)
나는 서슴치 않고 '동락국민학교에 적이 들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가축을 약탈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날 석양때부터 일몰시까지 동락리는 온통 불바다가 된 듯 하였는데, 다음날 알고보니 이 마을에 침입했던 적은 전멸되어 있었다."
김재옥 선생은 그 뒤 국군 장교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군인가족으로써, 강원도 인제군 남면에서 병기대대장인 부군을 도와 국방의 일익을 맡고 있던중 1963년 10월 19일 애석하게도 일가족 몰살의 불상사를 당한 것이다.(고재봉 사건)
국방부는 김 교사의 반공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전장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걸쳐 상영케 하였으며, 당시 박격포 반장이던 신용관 중위는 고인이 된 김 교사의 반공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68년 12월 17일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충혼탑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