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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선언에 ‘화가 나는 이유’
주권방송의 종교톺아보기를 보고
불교계의 뜨거운 이슈
종교평화선언은 여전히 뜨거운 이슈이다. 꺼진 듯 하면서도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주최측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선언할 수 있는 것이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선언은 불교계의 커다란 이슈일 뿐만 아니라 역기능적으로 보았을 때 불교계의 내분을 조장하고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마치 적전분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의 ‘사통위’에서 주관한 종교평화선언
종교평화선언의 취지에 대하여 모두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문제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최근에 점차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것은 다름아닌 이명박 정권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명박 대통령의 직속기구인 ‘사회통합위원회(사통위)’에서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전 총무원장 특보이었던 김영국거사는 미디어붓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도법 스님은 종교평화선언은 대통령직속기구인 사회통합위원회(이하 사통위)의 의뢰를 받아서 추진하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또 불교만 하는 게 아니고 기독교 등 7대 종교가 함께 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사통위가 하필 이 시기에 종교평화선언을 유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페이스북에도 그런 글을 썼는데, 그것은 본인들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정의사회를 내세웠지만 내용은 자신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노태우 정권 시대에는 보통사람들을 주장했지만, 자기들이 보통사람들이 아니었지 않나. 이명박 정부도 공정사회를 운운하는데 누구도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처럼 스스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가리기 위해 이명박 정부와 (조계종이) 함께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 : 주권방송, 두 남자의 종교 톺아보기 37회, 전 조계종 총무원장 종책특보 김영국 거사와 함께
이번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을 주도 하였던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스님의 말에 따르면 장로정권의 지시에 따른 것임에 틀림없다. MB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사통위에서 전달한 내용대로 움직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현 조계종 총무원장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 위한 ‘꼼수’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대부분의 불자들은 최고위층에서 추진하는 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마치 딴지를 거는 것처럼 백안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론에 들어가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대목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 붙이려 하는 것은 마치 MB식 전법을 보는 것 같다. MB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대강사업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무려 22조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강바닥에 쳐 박은 바 있다.
주권방송의 ‘종교톺아보기’
기사에 따르면 김영국거사의 발언은 ‘주권방송’의 ‘종교톺아보기’에서라고 한다. 주권방송이란 무엇일까. 키워드 검색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진보적 성격의 방송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중 종교에 관련 된 것이 ‘두 남자의 종교 톺아보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남자는 ‘우희종’교수와 ‘최요한’평론가 말한다. 불교와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명의 유명인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들 두 명의 프로필을 보았더니 종교전문가는 아니었다. 불교를 대표하는 우희종 교수는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이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최요한 평론가는 ‘시사평론가’이었다.
두 명의 진행방식을 보면, 김어준처럼 “졸라” “씨바”와 같은 파격도 없고, 오마이뉴스에서 ‘이털남’을 진행하는 김종배처럼 날카로운 맛은 보이지 않는다. 출연자를 모셔다 놓고 맞장구 치는 모습을 보면 동네 아줌마들 수다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점이 타 방송과 차별화 되어 보인다.
그런 것 중에 35회 조성택교수편(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해온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님과 함께)이 보였다. 종교평화선언의 초안을 주도한 조성택 고려대 교수를 모셔 놓고 뒷이야기를 들어 보는 형식이었다.
“불교인들은 쉽게 받아 들일 줄 알았어요”
조성택 교수는 여러모로 뜻 있는 불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종교평화선언문을 주도하면서 그가 뱉어낸 말의 향연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뒤집어 놓은 듯 하였는데, 종교톺아보기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눈매가 매섭게 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은 독기가 배어 있다. 그런 조교수는 종교평화선언문 초안이 발표 되고 난 후 현재 유보된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심경을 피력하였다.
“기독교쪽에서 종교다원주의라든지 여러가지의 신학적인 변용을 통해서 나와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 나갈 것인가 또 역사와 초역사인 것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많았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볼 때에는 불교학자가 볼 때에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하는 창조주하나님에 대한 그런 어떤 것들이 굉장히 이렇게 앞으로 한발 더 넘어서는 건데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 제가 미국에서 보았던 기독교와 한국에서 보았던 기독교는 굉장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길희성선생님이 하나님이 종교다원주의자다 이 말씀했다가 난리가 난 거죠. 근데 사실 상식이거든요.
그런 상식이 저는 불교계에서도 불교인들은 쉽게 받아 들일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항상 불일불이다 개식개기다(?) 원융이다 무애다 뭐 입만 열면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게 관념속에서의 일이었던 거에요.
그러고 인제 어떤 분이 저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뭐냐면 조선생 이걸 해 보면 불교계에 숨어 있는 배타주의들이 있다. 인제 아까 말씀하신대로 그 숨어 있던 배타주의가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이번 종교평화선언이 좌.. 일단은 이제 연기가 된 상황인데..”
(조성택교수, 두 남자의 종교 톺아보기 35회 , 2011-12-25)
조교수의 말에 따르면 종교평화선언은 무리없이 스무스하게 처리 될 줄 알았다고 하였다.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종교다원주의를 거론하고 있는 마당에 불교에서는 이미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듯한 불일불이 사상 등이 있어서 쉽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것이다.
숨어 있는 배타주의 때문에?
그런데 의외로 복병을 만나 좌절되었다고 아쉬워 한다. 그러면서 불교계의 숨어 있다는 배타주의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인터뷰를 보면 조교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따라와 줄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는 반대론자들 탓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하여 기독교의 배타주의자들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마치 한줌도 되지 않은 배타주의자,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본선언 중단되어 초청장을 발부한 인사들에 대하여 개망신을 당한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코 본선언문을 이끌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조성택 각본, 사통위 연출, 화쟁위 출연
이번 종교선언문 파동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는 종교평화선언이 정부주도(사통위)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자칭 불교학자라고 주장하는 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한국불교의 미래를 ‘좌지우지’ 하려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종교평화선언은 조성택교수의 ‘각본’에 청와대 사통위의 ‘연출’, 그리고 도법스님을 비롯한 화쟁위 맴버들의 ‘출연’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번 선언문에서 조교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한국불교가 위기에 놓여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대로 놓아두면 곧 망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살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일은 종교평화를 선언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시각은 이번 선언문에 관련된 스님들이나 학자들도 마찬가지라 본다. 법안스님은 종교평화선언이야말로 만사제쳐 놓고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간지주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불교관련인터넷신문 사이트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종교 대신 ‘정치’하였나
총무원장 관련 추문, 범어사 돈봉투사건 등 자성과 쇄신추진본부에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에서 평화선언에 올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마치 MB식 정치를 보는 것 같다.
MB는 이제까지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하였다. 그가 한 모든 사업은 항상 ‘종교적소명의식’을 가지고 추진하였다. 그래서 타협과 양보가 불가한 것이다. 그 결과 사대강, 종편채널 등을 위하여 매년 날치기를 하였고 천문학적인 돈을 강바닥에 뿌렸다.
그런데 장로정권의 판박이를 보는 듯 하는 것이 현 자승총무원장 체제이다. 단지 MB와 다른 것이 있다면, MB가 정치 대신 종교를 하였지만, 자승스님은 종교 대신 ‘정치’를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교평화선언이다. 불교에서 먼저 치고 나간후 타종교로부터 선언을 이끌어내겠다는 전략을 인터뷰에서 조교수가 말 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항복문서’
이렇듯 사통위가 관련되고, 개인적인 야망이 투영되고, 더구나 정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은 사실상 기독교에 대한 ‘항복문서’나 다름없다. 그래서 장로정권이 사통위를 통하여 항복문서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공개참회’하기를
만일 종교평화선언이 강행되어 본선언이 채택된다면 이는 매번 실정만 거듭하다 나라를 파탄으로 내몬 장로정권의 최대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열 법사는 미디어붓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아쇼카의 이름을 앞세워 불교와 기독교를 같은 진리의 선상위에 올려놓고 선포한 종교 평화선언의 즉각적인 폐기를 요구하며 이 일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공개적인 참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열법사, 정법 훼손과 불교 자존을 스스로 짓밟은 악견 비구들과 동참한 학자들은 참회해야, 미디어붓다 2012-01-09)
정치적 요식행위에 불과한 종교평화선언은 즉각 폐기 되어야 하고, 관련자 전원에 대하여 훼불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고 공개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일이 자판을 두들긴 글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 아직도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위한 좋은 기사가 있다. 청보리회 김재영법사가 현대불교신문에 기고한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이다.
그런데 글이 모두 PDF 로 되어 있어서 스크랩이 불가하다. 오랫동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이라 일일이 자판을 두들겼다. 편의상 소제목을 달았다.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
얼마 전부터 소위 ‘21세기 아소까 선언’을 둘러싼 논쟁이 상당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격한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아직 불교가 생동하고 있고, 불교도들의 열정이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누구를 위한 선언일까?”
“누구를 위한 선언일까?” “누구에게 하는 선언일까?”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언은 ‘열린진리’ ‘열린종교’를 강조하고 있다. “내 종교만이 진리가 아니라 다른 종교도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동반자이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자.”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아니, 우리 불교가 언제 남의 종교를 부정하고, 불교만이 길이요 진리요 구원이라고 주장해 왔던가? 언제 우리 불교도가 교회를 부정하고 성당을 훼손하는 침략적 행위를 자행해 왔던가?
화가 나는 이유
지금 우리 불교는 기진맥진해 있다. 종단 내부의 탐욕스런 권력구조와 이교도들의 전면적인 도전 앞에서 힘을 잃고 이류, 삼류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 스님들도 기력을 잃고 재가대중들도 도처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종교는 다 진리다” “싸우지 말자, 비난하지 말자”고 하니, 기가 막히는 것이다. 싸울 힘도 대항할 능력도 없는 초라한 사람들 앞에 이렇게 주장하니까, 힘이 빠지고 화가 나는 것이다.
‘아소까 선언’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도 많은 불교도들이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이런 심리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무장해제’라는 일부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언제 우리가 무장한 적이 있었던가?
이왕 이런 선언을 내려 한다면,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공동발의로 했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교회나 성당을 찾아가서 그들을 향하여 선언했어야 할 것이다. ‘아소까 선언’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 아닐까?
아소까의 담마에 의한 정복
선언에서는 아소까 대왕이 모든 종교를 옹호하고 평등히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래서 ‘아소까 선언’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그것은 아소까 대왕이 불교의 담마로써 인도대륙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진 아소까 칙령은 ‘불교’라는 전제없이 보편적 의미의 담마(法, 善法)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담마는 실제로는 불교이다. 불교 위 담마(佛法)이다. 여기에는 <숫따니파타> <앙굿따라니까야>등 초기경전들이 인용되고 있다.
아소까 대왕은 불교로 개종하고 열렬히 신봉하면서, 불교 담마를 인도대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 수 많은 사리탑과 바위, 돌, 기둥을 세워 불교정신을 전파하고, 멀리 중동지역까지 전법사를 파송해 불교세계를 확장시켜 갔다. 그러면서 불교정신에 입각해서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우하고 종교평화를 실현해냈다.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는 역사적 진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불교가 힘을 갖고 있어야 이 땅의 평화는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아소까 선언’을 아무리 외쳐 봐도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저들이 경청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아소까 선언’이 진실로 평화선언이 되려면, 먼저 우리 불교계의 힘부터 길러야 한다. 선의의 경쟁을 벌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들이 안심하고 참여 할 수 있다. 치열한 경쟁현장에서, 힘없는 자들이 ‘우리 평화합시다’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백기(白旗)를 드는 것과 다름 없지 않은가?
“대중들이여, 전법하러 떠나거라”
자유로운 경쟁, 선의(善意)를 다하는 치열한 경쟁, 이 경쟁을 통하여 힘을 기르고 세력을 키우는 것, 그것은 평화 이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중들이여, 전법하러 떠나거라”고 분부하시고, 팔순 노령으로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피땀 흘리며 변방으로 나아가 법을 전파 했던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만해스님은,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이 승리한다”이렇게 절규했던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우리는 밤을 지새며 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김재영 청보리회법사,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 현대불교신문 2011-11-30일자 pdf에서)
2012-01-28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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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법스님은 혜천스님과 막역한 사이이기에 나름 관심을 가졌었는데 최근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군요. 원불사의 단현님도 도법스님과 종교평화선언에 대해 탐탁치않게 여기시는거 같고요. 도법스님의 행보가 명확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