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늘 설레임과 들뜬 분위기 속에서 떠나게 됩니다. 반복적인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새롭고 특이한 경험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조계산과 운주사 답사도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떠났습니다.
여느 때처럼 출발시간이 30분 늦어진 것은 'Korean Time'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겠지요. 시민단체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늘 30분 정도 늦게 오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간엄수와 규율엄수가 사회생활의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태를 준엄하게 비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생활과 직업세계에서 자본주의의 규율에 순종하는 습관이 배인 사람들이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공간에서는 전근대적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조금 일찍 온 사람이 지각하는 사람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은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시간 개념’으로부터 잠시잠깐 동안 일탈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 민속, 여성, 환경, 성형수술, 페미니즘, 시민운동, 노동운동, 정당, 유기농산물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었습니다. 여행과 관광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관광과 여행의 상품화는 향락산업의 발전을 초래했습니다. 마닐라, 도쿄, 서울, 방콕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의 매춘도시들은 향락산업의 부산물입니다. 중세 십자군 전쟁과 성지순례의 유행이 여행의 대중화와 향락산업의 발전을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관광산업은 미국의 침략전쟁의 산물입니다.
1964년 미국은 자신들이 조작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규모 지상군을 파견했습니다. 참전 미군들에게는 R&R 정책(Rest and Relaxation, Recuperate ; 휴식-오락-휴식)의 일환으로 일주일 간의 공인된 휴가를 주었습니다. 미군병사들은 휴가지에서 매춘과 향락을 통하여 불만을 달래고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R&R 기지로 사용된 곳이 태국의 방콕이었습니다. 그 전에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R&R 기지로 사용된 곳이 일본의 도쿄였지요. 태국과 일본의 친미군부독재정권은 방콕이 거대한 윤락가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공범자였습니다.
미국이 정의롭지 못했던 베트남전에서 패전한 후 철수하자 방콕은 미군들을 상대로 했던 성매매 산업으로 지탱하던 경제가 일시적으로 공황에 직면했습니다.(그와 같은 현상은 현재 한국의 동두천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군사적 성매매 인프라는 관광객을 상대로한 매매춘 산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미군이 떠난 방콕 거리는 유럽인들과 일본인들로 넘쳐났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여성단체들은 일본인들을 ‘섹스 애니멀’이라며 비난을 하였으나 정작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의 매춘에는 눈감았습니다. 미국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아시아에서 자행했던 이따위 R&R 정책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애초부터 아시아에 대해서 인종적 경멸과 남성적 섹스가 가지는 공격성, 전쟁이 안겨준 극단적인 긴장의 해소로 이러한 매춘산업을 정부차원에서 장려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종군위안부 정책을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변형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일본이 해외여행 자유화를 실시했듯이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한국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습니다. 자가용 승용차 보급의 확대와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는 관광산업과 향락산업의 급속한 유행과 성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답사여행의 유행도 이러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현상의 하나였지요. ‘문화관광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상품화된 문화를 국가적으로 권유-장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춘분 지나 하지가 가까워짐에 따라 해가 길어지고 새로 뚫린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덕분에 광주 5.18 묘역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울화병이 도지던 시절이 있었지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5월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80년대의 5월은 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단어였습니다.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거리에서 학교에서 시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러한 5월의 풍경을 어용언론에서는 시위의 진실을 알리는 것을 외면하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사회혼란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시절의 기자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언론사주들이 김영삼 정부 이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언론개혁에 맞서 감히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2004년 한국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망월동 묘지는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국립묘지가 되어 장식적인 기념물들이 우뚝 솟아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대표들이 5.18 기념식에 참가한 것이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5.18 관련 단체에서 무슨 ‘휘호대회’를 한다는 커다란 플랭카드가 묘역의 한가운데 붙어있더군요. 해마다 6월 25일 돌아오면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표어대회’ ‘괴로군과 공산당 규탄대회’를 하면서 전쟁을 ‘기념’하던 것과 현재 광주 민중항쟁을 기념하는 것 사이에는 무언가 모를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 전적지와 3.1운동 기념탑, 4.19 묘지가 역사 속에서 ‘화석화’되어 생동감을 잃어버렸듯이 광주 5월항쟁도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행은 숙소인 송광장 여관에 저녁 9시쯤 도착하여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마침 벌교가 고향인 회원이 참꼬막과 소라와 황가오리회를 한 차 가득 싣고와서 푸짐한 술안주로 뒷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와 목포에서 두 명의 회원이 합류했고, 생일을 맞은 회원도 있어서 밤늦도록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꼬막은 크게 참꼬막, 세꼬막, 피꼬막 세 종류로 나누는데, 참꼬막은 제사상에 올리는 꼬막이라는 뜻으로 제사꼬막이라고도 불립니다. 세꼬막은 제사상에 못올린다고 하여 이 지방에서는 똥꼬막이라고 부르지요. 벌교의 참꼬막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익 청년단장 염상구가 빨치산의 아내 외서댁을 범하고 나서 입맛을 다시며 버릇처럼 ‘꼬막 맛 같다’고 얘기를 하지요. 꼬막살의 쫄깃쫄깃한 맛을 외서댁의 육체와 비교한 것은 여성주의와 평화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비판할 부분이 많겠지요.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이러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벌교의 참꼬막이 더 유명해졌습니다.
이튿날에는 이른 아침을 먹고 송광사를 둘러보고 굴목치를 넘어서 선암사로 건너갔습니다. 송광사는 삼보사찰 중의 승보사찰로 오랫동안 무한의 권위를 누렸던 절집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우화각과 침계루, 임경당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계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 옆에 서향으로 절집 건물들을 배치한 송광사에서 가장 풍경이 빼어난 곳에 지은 건물이 이 세 건물이지요.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버린다는 명목으로 군과 경찰이 대웅전을 비롯한 절집 전체를 불태운 이후 새롭게 지은 건물이라 더욱 볼 것이 없어진 셈입니다.
송광사는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가부장제적 질서의 산물에 불과한 중국 선종 불교의 역사를 누가 더 충실히 계승했는지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는 전근대 사회의 가치관을 현재까지도 불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시대착오가 살아 숨쉬는 공간입니다. 왕으로부터 국사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을 고승으로 떠받들고 그러한 승려의 제자라는 사실 만으로 권위를 세웠습니다. 동서양의 종교권력은 역사 속에서 세속권력의 보호 속에서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해주면서 민중에게 군림해왔습니다.
중국 선종불교 중에서 남종선의 정통에 있는 6조 혜능이 주석했던 쌍봉산 보림사가 있었던 골짜기가 조계입니다. 그래서 6조를 조계혜능이라고 부르지요. 이것이 한반도에 수입되어 산 이름과 절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송광사와 해인사가 조계종의 종조가 보조지눌이냐 태고보우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핵심에는 두 사람 중 누가 중국 임제종의 적통을 계승하였는지를 밝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비구승의 조계종과 대처승의 태고종이 명목상 대립하고 있지만 두 종단은 모두 선종불교를 표방하고,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고, 중국 임제종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교리상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조계종은 종조를 보조지눌이라 말하고 태고종은 태고보우라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조계종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태고보우를 종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승려들도 많습니다.
사실 불교의 이러한 종조논쟁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예학-보학 논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일본과 청나라를 상대로 크게 두 차례의 전쟁을 치룬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은 전쟁의 피해로 수난을 당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생산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습니다. 숭명사대주의에 빠져 조선이 소중화라는 명분에만 집착했을 따름입니다. 청허휴정이 입적한 후 허균이 지은 비문에는 나옹의 선맥을 이은 것으로 적었으나 뒷날 서산의 제자들이 중국 임제종의 적통을 계승한 보우의 선맥을 이은 것으로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사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보조나 나옹이나 보우의 선맥이 끊기지 않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불교계 내부의 정통성 경쟁은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이나 민족주의의 전통을 계승하지 않았으면서 수사적으로 그러한 내용을 강조한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넘어가는 길은 조계산의 정상인 장군봉을 넘어서 가는 길과 두 개의 굴목치를 넘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쉬운 길을 택해서 송광굴목치를 넘고 보리밥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고 선암굴목치를 넘어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쉬운 길을 따라서 산을 넘는 것도 간밤에 과음을 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겝니다. 세상은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니깐요. 3시간이면 넘을 길을 4시간 30분이 걸렸지요.
산을 넘으면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선암사는 대충 훑어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봄꽃이 지고 난 선암사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보수공사가 끝난 대웅전이 예스러운 맛이 전보다 덜했고, 승선교가 한창 보수공사 중이라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암사는 많은 건축학자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이 한국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집이라고 첫손에 꼽는 곳입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른 느낌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선암사 경내에는 일제시대 이후 일본 전통조경의 강한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들여온 많은 수종들이 식재되어 있습니다. 철쭉류, 삼나무, 편백, 팔손이 등이 대표적인 일본에서 도입된 나무들이지요. 물론 이러한 나무들도 오랫동안 이 땅에서 살다보면 우리의 나무가 되겠지요.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을 거쳐 한국에 수입된 불교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말해지듯이 전통이라는 것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통 한정식집에서 일본에서 들여온 양조간장을 양념으로 미국에서 물 건너온 수입쇠고기를 재료로 하여 불고기를 만들어서 파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 사찰도 그러한 것이 아닐런지요.
선암사 초입의 비뚜로선 부도탑비의 주인공 상월새봉이나 유치찬란한 사사자석탑 형식의 부도의 주인공 화산대사 등에 관한 얘기라든지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국사의 실체 같은 많은 얘깃거리는 시간에 쫒겨 다음으로 미루고, 선암사 들머리의 선암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운주사로 출발했습니다.
천불천탑의 신화로 가득찬 운주사는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절을 지었는지를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 고려 때 이민족인 거란이나 몽고족 건립설, 밀교사찰설, 도교사원설, 철성신앙이나 고대별자리와 관련이 깊다는 천문도설, 미륵신앙설, 최씨 무신정권 지원설 등 다양한 의견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으나 여전히 수수께끼 속의 절집입니다. 이번 답사에 참가한 일행 중의 한 사람은 ‘석탑이나 석불을 제작하는 연습장이나 학교였다’는 새로운 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연습으로 만든 작품 같다는 느낌을 표현한 것이지요.
원반모양의 탑, 항아리 모양의 탑, 무슨 암호 같은 기하학적 문양,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 같은 얼굴의 불상, 하늘의 북두칠성을 강물에 비추어 보는 듯 방위각이 일치하는 칠성석, 와불의 전설... 이 모든 소재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식은 제각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자연미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 속의 논리로 이해하는 문화미를 높이 사는 사람도 있을 겝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모두 신의 뜻으로만 이루어지지도 않고 인간의 마음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면 운주사는 지금처럼 신비에 휩싸여 있을 때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항아리탑 앞에서 백무산 시인의 ‘운주사’를 일행 중 한 사람이 낭송했습니다. “운주사에 가서 보아라 / 누가 이런 절을 지었나 / 모른다 한다 누가 천불천탑 / 왜 만들었나 모른다 한다 / 몸은 네 몸일지 몰라도 / 남의 주장 잔뜩 지고 / 무량겁을 다녀도 모른다 한다 // 가서 보아라 그곳에 내 얼굴 네 얼굴 / 가서 보아라 그 가운데 하나는 내 얼굴이다 / 천불이면 뭇사람 얼굴 다 담고 / 천탑이면 모든 마음 정성 다 세우리 / 가서 비춰보면 그 가운데 하나는 / 내 마음을 닮았으리라 / 비춰보니 내가 곧 부처라 하고 / 우러르니 내가 곧 하늘이라 한다 // 운주사에 불상도 이제 불탑도 몇 없다 한다 / 버려지고 볼 것 없다 한다 / 그러나 운주사에 가 보아라 / 그것에 내 얼굴 네 얼굴 / 없더라도 실망 말아라 / 부처라 해도 틀린 말 / 하늘이라 해도 틀린 말 / 나 아닌 것 다 벗고 가면 / 빈 운주사를 보리라//”
운주사 입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벽나리 민불을 멀리서 뵙고 너리재를 넘어 광주로 갔습니다. 화순에는 쌍봉사, 고인돌유적, 조광조 적려유허지 등 들러야 할 곳이 많으나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리재를 넘기 전 화순에서 광주 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가서 본 널 닮은 얼굴’은 계급이 없고 평등한 우리 모두의 얼굴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너리재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농민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1946년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8.15해방을 기념하러 광주로 행진하다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시체가 널려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에 의해 희생당한 시체가 널려있었던 곳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남마을을 지나던 시내버스에 공수부대가 총기를 난사하던 곳이 바로 너리재 아랫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길의 역사는 어쩌면 피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고개 하나에도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한 귀퉁이에도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땀이 베어 있습니다. 우리가 답사를 다니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그러한 피와 땀의 의미를 찾는 것이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광주를 지나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소풍가는 기분으로 떠난 답사를 돌아올 때면 늘 차분한 마음이 되는 것은 내일 또다시 살아가야 할 일상이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첫댓글 고맙습니다.답사때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