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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4년 봄호
특집 【김남주 시인 30년】
일시 : 2024년 1월 19일
장소 : 강화도 자택
함께한 사람들 : 강성만(한겨레 기자), 박설희(시인. 사진 제공), 박규숙(소설가)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올해가 김남주 시인께서 타계한 지 30년이 되어요.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네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김남주 시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요. 여쭈어볼 것은 많지만, 영역을 나누어 집중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해요. 앞으로 김남주 시인과 함께했던 분들의 말씀도 들으려고 해요. 이번 대담은 김남주 시인이 박광숙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김남주 산문 전집』, 푸른사상, 2015)과 선생님께서 간행한 산문집 『빈들에 나무를 심다』(푸른숲, 1999)를 참고하면서 여쭈어보려고 해요. 편지나 산문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쪽수를 밝힐게요. 편의상 김남주는 시인으로, 박광숙은 선생님으로 호칭할게요.
박광숙 : 많은 분이 고생하셨지요. 특히 동생분을 빼놓을 수 없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1980년 6월 21일에 쓴 편지와 7월 8일에 쓴 편지에서는 선생님을 “원화(源花)”라고 불러요. 선생님이 차입해준 『신채호』에서 “원화”라는 인물에 감동해서 불렀다고 해요. 그러다가 8월 2일에 쓴 편지부터 “광숙”으로 부르는데,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박광숙 :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재판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기에 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이지요. 공범 관계였잖아요. 그 뒤 면회를 몇 번 다녀온 뒤부터 본명을 불렀어요. “원화”는 화랑의 전신이에요. 신라시대 때 여성을 우두머리로 삼은 청소년 단체가 있었는데, 진흥왕 때부터 청년을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 제도로 개편했지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원화에게 일본어를 배우라고 부탁했고, 원화는 김남주 시인에게 한문 공부를 부탁했어요.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요?
박광숙 : 제가 김 시인에게 한문을 배우라고 부탁한 것은 심오한 자연관이 담긴 한시를 읽으면 정서적으로나 감옥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어요. 저는 국문학과에서 공부할 때 불교 선시나 당시의 재미에 빠져 좀 더 배우려고 학원에 다닌 적도 있어요. 김 시인이 저에게 부탁한 일본어 공부는 좀 하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만두었어요.
맹문재 : 1980년 9월 24일의 김남주 시인의 편지를 보면 직계 가족 외에는 서신이 허용되지 않는 교도소의 규칙을 피하려고 누이동생인 “김숙자”의 이름으로 보내요. 그 편지는 어떻게 전달받으셨는지요?
박광숙 : 서울에 사는 형님이 계셔서 김 시인의 편지가 오면 전해 받았어요. 면회는 직계 가족과 약혼자만 가능했어요. 저를 약혼자로 인정하지 않아 면회가 허용되지 않은 교도소도 있었어요.
맹문재 : 1980년 10월 27일과 11월 7일의 편지를 보면 김남주 시인은 소설을 쓰려고 하는 선생님에게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을 전하고 있어요. 소설가는 자기 시대의 민중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의 바탕 위에 서야 한다, 인물의 묘사에 전형성을 가져야 한다 등을 피력하고 있어요. 언제부터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졌는지요?
박광숙 : 중고등학교 때 을유문화사나 정음사에서 간행된 세계 문학 전집을 열심히 읽었어요. 학교 공부보다 소설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어요. 대학을 국문과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설 쓰기에 관심 가지게 되었지요.
맹문재 : “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답니다. 그대가 있기에 봄도 있다는 노래 가사가 있는데 내가 바로 누이가 있기에 봄이 있을 것입니다.”(301쪽)라고 한 것은 1980년 11월 7일의 편지 내용이에요. 김남주 시인의 수감 생활에서 선생님의 존재가 큰 힘이 된 것으로 보여요.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김남주 시인을 이성으로 생각하셨는지요?
박광숙 : 감옥에 있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지요. 김 시인과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계속 면회를 다니다 보니까 가까워지게 된 것이지요. 어떤 때는 면회 가기가 싫은 적도 있었어요. 정보기관에서 동태를 파악하는 등 직장 생활에도 신경이 쓰였어요. 그렇지만 도망할 길이 없었어요. 제가 김 시인과 가까이하는 것을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했지요. 제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서 더욱 걱정한 것이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의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남민전 재판 때 아버지는 딸과 관련된 증언이 나올 때마다 메모해서 변호사에게 전하기도 했어요. 오빠가 부모님을 많이 설득해 저와 김 시인의 관계에 도움을 주었어요. 그때 오빠는 전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오빠가 광주 지역에서 김 시인과 관계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지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는지요?
박광숙 : 김 시인과 결혼할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생각은 없었지요. 아들 토일이가 몇 해 전에 엄마는 왜 아빠하고 결혼했느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5․18 때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엄마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누군가를 위해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하더라구요. (웃음)
맹문재 : 세대 차이가 워낙 크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남주 시인은 서신을 통해 많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부탁을 어떻게 해결해주셨는지요?
박광숙 : 저는 직장 생활 때문에 김 시인이 부탁한 책들을 모두 구해서 보낼 수 없었어요. 김 시인은 저 외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부탁했어요. 최권행 교수 같은 분이 외국책들을 많이 구해 넣어드렸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책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어요. 석방 뒤에도 그러했겠지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요?
박광숙 : 연극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리스의 비극이나 희극과 관련된 책을 보았어요. 서사시에도 관심을 가지고 하이네의 『아타 트롤』(창작과비평사, 1991)를 번역하기도 했어요.
맹문재 : 1981년 1월 23일의 서신부터 김남주 시인은 창작한 시를 내보이기 시작해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박광숙 : 김 시인이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잖아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그 무렵부터 발표하려는 마음이 일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두 분이 서로의 건강을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1981년 3월 17일의 서신에서 김남주 시인은 선생님의 부탁대로 짠 반찬을 물에 헹궈서 먹고, 아침저녁으로 냉수마찰을 하고, 배꼽 부분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쿡쿡 눌러가면서 문질러요. 수감 생활에서는 당연히 건강을 신경 써야 하지요.
박광숙 : 저도 10대와 20대에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병원에 다녔어요. 신장염으로 입원도 했고, 허리가 아파 고생했어요. 소화가 안 되어 약을 한 뭉치씩 가지고 다니기도 했어요. 어느 날 경희대병원의 의사가 제가 아픈 것은 선천성이어서 방법이 없다고 했어요. 그 뒤부터 저는 병원 치료나 약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몸을 돌보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훨씬 편해졌어요. 단식도 하고 벌침도 맞았어요. 병원에 가서 치료한 적이 없어요. 이렇게 건강에 관심에 많았기 때문에 김 시인의 건강을 당연히 걱정한 것이지요.
맹문재 : 벌침에 관해서는 선생님의 산문 「지렁이와 꿀벌―자연의 의사들」에 구체적으로 나오지요. 1982년 5월 1일의 편지에서 김남주 시인은 사동, 감방, 하루 생활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해주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식사와 건강에 신경 쓰는 모습이 눈길을 끌어요. 김남주 시인은 자신이 건강에 집착하는 이유로 “아무리 곧은 생각, 굳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육체가 생각대로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다부지게, 효과 있게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43쪽)라고 말해요. 김남주 시인은 일상생활에서도 다부졌는지요?
박광숙 : 얼마 못 살았으니 기억에 남는 모습이 적네요. 막힌 데가 없는 호인이었고 자유인이었지만, 생활인으로서는 그다지 다부지지 못했어요. 전사라고 해서 생활의 전투력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실제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부부가 된 지인들 가운데 상대방이 치열한 운동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실망해 이혼한 경우도 있어요.
맹문재 : 1981년 5월 19일의 편지를 보면 김남주 시인을 ‘문둥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지요?
박광숙 : 김 시인이 감옥이라는 공간에 유폐되어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에요.
맹문재 : 1981년 9월 17일의 편지를 보니 김남주 시인에게 편지, 책, 옷, 영치금뿐만 아니라 사진도 보내셨네요? (웃음)
박광숙 :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림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림도 상당하게 수집했어요. 그래서 저는 나체 사진도 야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림 자체로 보았어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다르게 생각해 곤란한 상황도 있었어요.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 들어 있는 엽서를 사서 김 시인에게 보낸 적이 있어요. 수수밭에서 여인이 아기를 업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심심하지 말라고 보냈는데, 얼마나 애기를 낳고 싶었으면 그런 그림을 보냈느냐고 놀리기도 했어요. (웃음) 김 시인의 옷을 사서 보내기도 했는데, 저는 그때 좋은 옷을 보는 눈이 없었고, 백화점에 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제가 아는 이는 항상 최고급 옷들을 보냈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저는 좋은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몰라요. (웃음)
맹문재 : 그 무렵 선생님께서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광숙 : 대한가족계획협회는 보건사회부 산하 기구였는데, 그곳에서 홍보 일을 담당했어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공익광고며, 한국방송(KBS) 텔레비전 아침 뉴스 시간에 ‘인구 문답’이라는 꼭지를 만들었어요. 주위에서는 3개월도 못 할 것이라고 했지만 3년이나 했어요. 아는 분의 배려로 신원조회 서류 제출도 미루면서 일했는데, 성과를 내어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어요. 주위 분들이 저를 보고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고 참신한 소재들을 발굴하느냐고 놀라워했어요. 인구 문제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 때는 전공 교수, 환경운동가, 여성운동가 등을 모셨는데 한명숙, 박성준, 최열 등 여러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셨어요. 또한 ‘인구 문답’에 필요한 삽화를 장진영 씨를 비롯한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 소속 화가들이 그려주었어요. 그분들의 작업에 필요한 활동비를 챙겨 드린 셈도 되었지요. 즐겁게 일했어요.
맹문재 : 1985년 10월 18일의 서신을 보면 “지난번 면회 때 당신은 내 시가 무섭다고 했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다 했소. 나는 그 지적을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였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시는 지나치게 경향적인 데가 있소. 거기다가 역겨우리만큼 전투적일 것이오.”(370쪽)라는 내용이 나와요. 실제로 김남주 시인의 시가 무서웠는지요?
박광숙 : 옥중에서 쓴 김 시인의 시를 처음 받았을 때 무서웠어요. 아주 살벌해 누구에게 전하기도 부담스러웠어요. 저에게 시를 전해 받은 창작과비평사의 직원도 난감해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누군가 김 시인이 쓴 시를 가지고 왔다고 직장으로 연락해 올 때면 두려웠어요. 당시 광주교도소에 근무하던 직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김 시인의 옥중시를 전해주었어요. 그럴 때마다 원고를 숨기느라고 힘들었어요. 핸드백에 넣고 다니기도 했고, 장독대에 감추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시를 타이프로 치고 원고를 찢어버렸어요. 김 시인이 출옥한 뒤 원고를 왜 찢었느냐고 아쉬워했지만, 그 일을 감당한 저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했어요. 언젠가는 수색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고려대를 다니던 동생도 학생운동을 하고 있어 더욱 그랬어요. 김 시인의 원고를 전해주던 광주교도소의 한 직원은 나중에 창작집을 간행했지만, 다른 직원은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어요. 두 분께 감사해요.
맹문재 : 1987년 1월 10일의 서신에서 김남주 시인은 “내가 왜 시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해방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414~415쪽)라고 밝혔어요. 남다른 시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지요.
박광수 : 김 시인의 시는 투쟁 현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투쟁 의식을 고양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전투적인 시대에 필요한 시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김 시인의 10주기 행사장에서 한 말이 떠오르네요. 김 시인의 시는 전투적인 시대에 필요하고, 평화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김 시인의 시가 안 읽히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부인이 남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의 시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박광숙 : 「이 가을에 나는」을 들 수 있네요. 현실 고뇌가 있고, 서정과 리듬도 있어요. 「추석 무렵」이란 작품도 정감이 가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넛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전문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다른 교도소로 옮겨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하는 심정이 솔직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나 선생님의 말씀처럼 서정의 울림이 있어요. 작품의 형식에서는 리듬감도 있구요. 김남주 시인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넘어 정치적 탄압에 대한 분노가 일기도 해요.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추석 무렵」은 제가 읽어볼게요.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추석 무렵」 전문
김남주 시인이 보낸 서신(날짜가 정확하지 않은데, 내용으로 보면 1985년으로 유추됨)을 보면 선생님은 남민전 재판의 법정에서 최후 진술로 윤동주의 「서시」를 읽었다고 하는데요.
박광숙 : 제가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양정여중을 다녔어요. 6․25전쟁 전후 경기도에서 알아주는 명문 학교였어요. 미국 동부 북감리교회의 재단이 설립했어요. 석조 건물로 된 교실마다 피아노가 있었고, 대강당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어요. 도서관에는 책들이 꽉 차 있었구요. 가을이 되면 추수 감사절이 열려 학생들이 미국에서 온 할머니들 앞에서 발레 공연, 합창 등을 했어요. 그렇게 저는 중학교 때 서양 음악, 서양 예술 등을 접했고,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어요. 윤동주의 「서시」를 읽은 것은 그와 같은 교육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여요. 그때 시들을 필사한 노트를 소장하고 있어요.
맹문재 : 언제 그 노트를 구경하고 싶네요. 1985년 11월 11일의 서신을 보면 김남주 시인이 옥고를 치른 지 6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내 머리는 반백이 다 돼 버렸소.”(374쪽)라고 했어요. 김남주 시인이 출소할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요?
박광수 :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이었어요.
맹문재 : 1986년 1월 1일의 서신을 보면 김남주 시인이 『고요한 돈강』을 영어로 된 원서로 읽었어요.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내비쳤어요. 김남주 시인이 외국어 공부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광숙 : 영어, 일본어, 독어를 잘하셨어요. 러시아어와 스페인어는 좀 배운 것 같았어요.
맹문재 : 1986년 1월 29일의 서신에서는 김남주 시인이 남민전에 가담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어요. “‘최선을 다하는 사람’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은 미일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과 그 하수인인 매판자본가․군벌․특권 관료들을 박멸하기 위해, 뿌리째 뽑기 위해, 그 씨를 말리기 위해 혁명적인 실천을 하는 사람이오. 고립되어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조직 속에서 하는 것이오.”(384쪽)라는 데서 확인할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도 이와 같은 이유로 조직 활동에 참여했겠지요?
박광숙 : 당시에는 모순된 사회에 맞서고자 한 지식인들이 많았어요.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집회도 있었고, 흥사단 아카데미 같은 데서 저명인사들의 강연도 많았어요. 저도 그러한데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에 연결된 것이에요. 지식인의 의무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의 산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가두던 70년대. 박정희 독재 정부에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는 진정한 젊은이가 아니었습니다. 70년대는 그랬습니다.”(174쪽)라고 하셨어요.
박광숙 : 제가 1978년부터 명성여자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어요. 학생들이 유신체제에 대해 질문할 때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어요.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들었어요.
맹문재 : 남민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셨는지요?
박광숙 : 출판 홍보팀에서 일했어요. 김 시인을 거기에서 만났어요. 그의 이름을 몰랐고, 그가 팀장인지 아닌지 몰랐어요. 김 시인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늘 집이 없다고 했어요. 제가 조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사건이 터졌어요. 그래서 조직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요. 저와 같은 사람이 많았어요. 저는 1심에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고, 김 시인은 15년 형을 받았어요. 그의 옥바라지를 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에요.
맹문재 : 1986년 2월 10일의 서신을 보면 수감자들은 붓과 종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진실이 담긴 책들은 금서 취급을 받았어요. 가족 외에는 얼굴은 물론 글도 교환할 수 없었어요. 4월 5일의 편지를 보면 김남주 시인은 소설책 불허에 맞서 교무관 전담반에 찾아가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해요. 그리고 “‘시인에게 펜을!’ 나는 이 슬로건 밑에서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펜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루 한 끼가 아니라 세 끼를 몽땅 굶는 한이 있더라도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펜의 자유를 위해 온갖 형태의 싸움을 할 생각입니다.”(393쪽)라고 했어요. 집필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각오한 것이지요.
박광숙 : 김 시인의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 오늘날 재소자들의 집필이 가능하게 된 것이에요. 재소자들의 집필을 허용하라는 김 시인의 글이 1988년 8월 『한겨레』 신문에 실린 뒤 집필과 신문 구독이 가능해진 것이에요. 제가 김 시인의 글을 들고 직접 신문사에 찾아가 전했어요.
맹문재 : 박광숙 선생님께서 1989년부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총무를 맡아 봉사하셨어요.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주신다면?
박광숙 : 남민전에 참여한 분들뿐만 아니라 통혁당에 참여한 분들, 재일교포 분들 등과 함께 활동한 것을 들 수 있겠네요. 장기 구속자의 석방 탄원서를 쓸 때나 추기경 등을 방문할 때 함께했어요. 운동권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9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어요. 그런 뒤 두 분이 1989년 1월 29일 광주 문빈정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박광숙 : 저의 오빠를 비롯해 주위 분들이 서둘러 주선했어요.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어요.
맹문재 : 1990년 1월 12일 아들 토일이 태어났어요. 그 무렵의 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박광숙 : 되돌아보면 김 시인을 만나 결혼한 뒤 아기 낳고 키울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맹문재 : 지난해 9월 9일 남산예술원 웨딩홀에서 토일이 결혼식이 있었어요. 저도 반갑게 참석했는데, 참으로 밝은 얼굴이었어요.
박광숙 : 대학에서 영문학은 전공했어요. 강화 전통시장에서 피자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현재는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근무해요. 며느리가 명랑하고 쾌활해요. 시댁을 거부하지 않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맹문재 : 강화 전통시장에서 피자 만드는 일은 그만두었는지요? 갈 때마다 참신한 발상과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박광숙 : 재래시장 사업은 완전히 정리했어요.
맹문재 : 1993년 11월 15일 안타깝게도 김남주 시인은 췌장암 말기를 진단받고 투병 생활에 들어가요. 이전에 어떤 증세가 있었는지요?
박광숙 : 전주교도소에서 어지럽기도 하고 불편함이 있었대요. 그런 상태로 출옥한 뒤 새로운 삶을 살다 보니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이에요. 그러다가 피로감이 쌓여 증상이 나타났어요. 목덜미 쪽에 종기가 났는데 고약을 발라도 낫지를 않았고, 등짝이 굉장히 뻐근하게 아프다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암 증상이에요. 김 시인은 여러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암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다들 위염이나 위궤양 정도로 진단하고 약을 지어줬어요. 나중에 김 시인이 암으로 세상을 뜬 것을 알고 그를 진찰했던 의사들이 자책하며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처음에는 현대의학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첨단 장비를 가지고도 췌장암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원망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고려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바짝 마른 상태였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박민규 시인과 함께 교대로 돌봐드리기로 했지만, 살아가는 데 쫓기다 보니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에요. 선생님께서는 결혼 생활 5년 만에 남편을 잃은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선생님께서 강화에 온 지 30년이 넘었네요. 강화로 거처를 옮기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박광숙 : 김 시인이 서울살이보다 흙을 딛고 싶다고 했어요. 시골로 돌아가 땅을 일구고 시를 쓰면서 살고 싶어 한 것이지요. 그래서 목동에서 가장 가까운 강화로 이사한 것이에요. 그런데 김 시인은 남쪽 사람이어서 북쪽의 환경을 낯설어했어요. 그래서 남쪽으로 다시 내려갈까 생각했는데,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맹문재 : 그동안 강화의 집에 지인들이 많이 찾아오셨는지요?
박광숙 : 초기에 많이 오셨어요. 박석무 선생님께서는 일부러 오시기도 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안심된다고 하셨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김남주 시인에게 쓴 서신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요?
박광숙 : 몇 번 이사 다니면서 죄다 잃고 말았어요. 출판사 등에서 가지고 가서 안 가지고 온 것도 있어요. 사진도 그렇구요.
맹문재 : 그동안 김남주 시인을 추모하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고, 올해도 있겠지요. 시인을 추모하는 행사들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지요?
박광숙 : 그동안 추모식, 시비 건립, 생가 복원, 아카이브전, 전집 간행, 기념홀 건립 등 많은 사업이 있었어요. 저는 그만해도 될 것 같아 늘 행사를 추진하는 분들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불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무슨 일이든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저의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저 흐름에 따르고 있어요.
맹문재 : 저는 김남주 시인은 한 개인의 영역 이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추모 행사를 추진하시는 분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김남주 시인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또 역사를 전망할 수 있지요. 저는 김남주문학상이 얼른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남주 시인의 시는 생명력이 있어요.
박광숙 :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상황이어서 그렇겠지요. 김 시인의 시 세계는 민중성과 역사성의 뿌리를 지니고 있어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까지 진학했으니 지식인으로서의 의무감이 큰 것이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귀한 말씀 감사해요. 또 찾아뵐게요. 늘 건강하세요.
■ 박광숙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명성여중 교사와 대한가족계획협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에서 활동했다. 1978년 남민전 활동에서 김남주 시인을 만나 10년여 옥바라지를 했고, 결혼한 뒤 아들 토일을 두었다.
■ 맹문재
1993년 김남주, 신경림 시인의 심사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했다. 김남주기념홀 건립 전문위원, 김남주 시인 개인화 음성합성 기술(P-TTS) 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안양대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