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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다엔 애끊는 염원이
2003년 9월 20일, 드디어 군 철조망 답사(?)가 시작되었나 보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47번 국도에서 올라서자 마자 곧 철조망을
따르다가 잠시 벗어나기를 반복하며 나아가야 했다.
아니, 정맥을 겉도는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높다란 감시 초소의 초병들은 일부러 이
늙은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너무 무료해 올려다 보아도 못본체로 일관했다.
이 지역을 포기하고 굴고개에서 곧장 수원산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단다.
그러나 발원(發源)지라는 710m수원산 정상은 올라설 수도 없다.
역시 군부대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황당한 짓인가.
부대를 통과해 후문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늙은 이와 이를 당직
사관에게 전화하는 초병 모두 다.
이렇게 라도 밟아봐야 하나 회의도 해보지만 걸음마다엔 정맥이
복원되는 날이 하루 속히 오라는 애끊는 염원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날에는 군이 모두 철수함으로서 복원은 물론이고 한북정맥뿐
아니라 백두대간을 따라 끝까지 북상할 수 있을 테니까.
군(軍)이야 국운 때문에 그렇다 치지만 멧돼지, 개 사육장에 개
훈련장으로 까지 전락시키다니.
국사봉 아래 채석장은 백두대간 추풍령 금산의 재판이다.
분심(忿心)을 다스리지 않고는, 진정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어갈 수 없는 정맥임을 거듭 확인하며 큰넓고개 <육사
생도6.25참전기념비> 앞에 당도했다.
사관이 되려는 젊은 이들이라 해도 아직 생도인 그들이 최초로
적과 조우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막판엔 탄환이 없어 처참한
백병전을 벌이며 장렬하게 산화한 이 곳에 들어선 비다.
육사생도6. 25참전기념비
잠시 묵념을 올리는 중에 문득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떠올랐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중략>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후략>
미로를 헤맨 느낌이다
큰넓고개는 포처시 가산과 내촌 사이 87번 도로상의 고개다.
이후의 정맥은 더욱 한심하다.
군(軍)과 관계 없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하긴, 야산지대를 그냥 외면하거나 방치할 리 있겠는가.
게다가 대간 상주땅 못지 않은 묘지천국이다.
다소 높은 죽엽산(607m)은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다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썬산악회가 잣나무 몸통에 매달아 놓은 덕이다.
죽엽산
고압송전탑이야 불가피하다 해도 세우느라 파헤친 임도는 공사
후 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즐비한 송전탑들 때문에 하필이면 정맥이 당해야 하는가.
이즈음은 미리 조립하여 헬기로 이동하기도 한다는데.
비득재는 식당가로 변했다.
가가호호, 아니 각자의 자가용 차가 맛과 분위기 찾아서 어덴들
가지 못하겠는가.
통신 중계탑과 고모리산성 안내판이 서있는 고모산(일명 노고산,
해발 380m)은 비득재 고개마루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185호인 이 산성은 고모산 정상부와 계곡을 에워
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란다.
대부분이 토성이고 일부가 토석 혼축으로 되었으며 산성의 축성
연대를 백제 초기로 본다고 설명한다.
천도교 묘지와 공원묘역이 또 정맥을 차지해 버렸다.
다음에는 다시 군부대가 길게 점령해 정맥은 지리멸렬이다.
이후에는 미로를 헤맨 느낌이다.
반복해도 여전히 그럴 것 같다.
고백컨대 도로의 유혹을 뿌리치느라 애먹었다.
축석고개 직전의 군 철조망을 끼고 돌 때는 더욱 그랬다.
석양이 뉘엿거리는 시각에 43번 도로상이며 의정부와 포천을
가르는 축석고개에 도착한 내 몸은 이미 파김치였다.
확신이 없다
단잠의 효과인가.
한북정맥이 막바지에 이름으로서 고무되어서 인가.
밤새에 거뜬해진 몸이 새벽길을 재촉하게 했으니까.
축석고개마루에서 정맥으로 올라 서북으로 진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천보산맥 분기점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꿨다.
직선상의 멀찌막에 천보산이 제법 높게 느껴졌다.
200m대에서는 300m대도 꽤 높게 느껴지는 것이 시각효과의
상대성이라 하겠다.
높이로는 야산에 불과하겠으나 제법 우럄한 암릉들이 잠시나마
산맛을 보게 했다.
이런 분위기는 백석이고개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로얄
컨트리클럽이 초를 친 셈이다.
이른 아침부터 라운딩 중인 골퍼들을 피해 그린을 가로지르다가
우회하여 정문으로 나선 이후는 점입 가경이다.
"정맥은 어디론가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덕고개에서 만난 홍갑표의 말이다.
교직에서 갓 정년퇴직해 고향 덕고개로 환향했다는 그는 난잡한
개발에 고향이 죽어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고 했다.
그의 복잡한 직함들은 맘에 들지 않으나 체질화 된 선생식 설명
이라 해서 죽어버린 정맥이 부활할 리 없지 않은가.
지저분한 영세 공해공장들로 인해 길들이 갈기갈기 찢겨 미로
같고, 코를 찌르는 악취의 축사들, 고층아파트들이 정맥을 토막
토막 잘라버린 것이다.
앞마당을 거치고, 논둑, 밭고랑을 밟아 겨우 찾은 정맥은 이내
끊기거나 없어지고 만다.
아니 내가 찾았다는 이 길이 정맥이라는 확신도 없다.
일부가 살아남아 있다 해도 미구에 도로나 아파트 또는 공장이
들어설 것이 분명한 이미 선민(?) 지역 아닌가.
로얄컨트리클럽 이후 덕고개~막은고개~샘내고개의 현실이다.
그래도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불곡산이
금강산도 식후경이기 때문이었을까.
샘내고개 3번 국도를 건너 정맥으로 오르기 직전의 잔디 위에서
두 다리 쭉 뻗고 막걸리를 반주로 해서 먹은, 집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의 맛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 만큼 특출하게 맛이 있었다는 느낌이었기에.
증발해 버린 정맥 찾느라 고생했다고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건가.
샘내고개 이후의 정맥은 잠시나마 아기자기했다.
산 오르기 보다 길 찾기가 더욱 힘든 일이라는 뜻도 된다.
303m 봉에서 남서로 방향을 틀어 능선 따라 난 임도를 타고 내려
가다가 산길을 번갈아 이용할 즈음부터 유격훈련시설들을 통과해
청엽굴고개에 도착했다.
주내 산북리와 백석 방성리를 기점으로 차량이 올라오기도 한다.
유격훈련장은 불곡산 턱 앞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암반 위에 깔린 마사토 때문에 훈련 시설물들을 잠시 활용하며
정맥 마루에 올랐다.(불곡산 주봉은 좀 더 떨어져 있다)
불곡산은 높지는 않으나 옛부터 양주의 진산이라고 했다.
암릉과 암봉이 도봉산을 닮았다 하여 미니 도봉산이라 부르기도.
또한 사방으로 막힘이 없어 상쾌하다.
실제로는 사라진 정맥도 여기에서는 쉽게 어림되기도 했다.
나아갈, 조금 남은, 도봉산에 이르는 정맥도 시야에 담겨졌다.
불곡산
아직 중천의 해와 초가을의 상쾌한 날씨가 전망 좋은 이 꼭대기
에서 미적거리게 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머무를 수 없었다.
곧 하산할 등산객들이 많이 몰려올 듯 해서 였다.
60m 남짓한 세미 - 클라이밍 지역을 하강하려면 두 번에 걸쳐
밧줄에 매달려야 하는데 자칫하면 심한 정체가 일겠기에.
정맥이 부대로 인해 다시 한 번 저지당하는 지점에 조성된 휴게
공간에는 뭇태안 쪽에서 잠시 올라온 듯한 이들이 꽤 많았다.
일요일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 건강을 챙기려 올라왔음이 분명한 연만한 분들의 눈엔
긴 수염에 남달리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늙은 이가 이국적
으로 보인 것일까
외국인으로 보는가 하면 배낭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궁금한지
꼼꼼히 묻기도 했다.
우리는 구면의 허물 없는 사이인 듯 함께 담소했고 이 웃음이
거의 종일 상했던 내 마음을 달래주었는가.
한결 편한 마음으로 퇴근하는 것 같았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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