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왕 자리는 맏아들이 잇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장남이 아니라 손아랫동생이 국왕으로 등극하는 사례가 많았다.
사실상 태조 이성계 이후 2대, 3대, 4대 국왕은 모두 장자가 아니었다.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3대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남이었다. 야심가였던 태종은 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킨 뒤 둘째형 방과를 등극시켰다. 맏형 방우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킨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1400년) 직후 스스로 왕좌에 올랐으며 난을 일으킨 넷째형 방간을 제거했다.
'국왕의 형'은 가족 서열로는 앞서지만 군신 관계로는 신하라는 애매한 자리다. 명예롭기보다는 자칫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자리다. 4대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평생 전국을 떠돌며 풍류를 즐긴 이유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처세술이라는 평가가 있다.
9대 성종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와 소혜왕후 한씨의 둘째아들이다. 소혜왕후는 '차남이 군왕의 자질이 있다'는 이유로 형 대신 아우를 왕위에 올렸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은 스스로 '풍월정(風月亭)'이라는 호를 짓고 풍월로 일생을 보냈다.
국왕의 형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다. 15대 광해군은 14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차남이다. 광해군은 등극 이후 동복형 임해군에게 사약을 내린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 자신은 형을 사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신하와 종친들의 상소가 줄을 이었다.
26대 고종도 이복형 이재선을 사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은 1881년 민씨정권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제주로 유배된 뒤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이후 대원군과 고종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됐다. 대원군은 1887년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개)와 결탁해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을 옹립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