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요시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삼척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에는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당시 원주 목사 김제갑은 68세의 고령으로, 당시 원주에는 지난 4월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지원했던 터라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김제갑목사는 원주에서 동쪽 30리 지점인 치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여 적을 방어할 계획을 세운 후 군,민 남녀 4천여 여 명을 이끌고 8월 22일 영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영원산성에는 미리 한 달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과 모을 수 있는 무기도 모두 모아서 운반해 놓았다.
8월 23일. 김제갑은 휘하 박종남에게 군사 수십명을 뽑아 원주 남쪽의 가리령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박종남은 매복을 하지 않고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쫓겨 돌아왔다.
25일 아침.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김제갑은 군민을 독려하여 활을 쏘고 돌을 굴려 일본군의 접근을 저지하며 항전하였으나, 저녁 무렵에 일본군의 돌격대 수십 명이 절벽을 타고 올라와 성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3천 여명의 일본군이 일제히 돌격해 올라왔다.
성 안에는 화살도 바닥이 났고,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원주 목사 김제갑은 전사하였고, 그의 처도 자결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 김시백도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