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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다.
제정러시아가 동방진출의 중요성을 깨닫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계획한 것이 1850년경이라고 한다.
1850년경이면 우리나라는 최재우 선생이 ‘칼의노래’를 불렀던 시기쯤 된다. 이후 1891년 니콜라이3세의 ‘동방을 점령하라’는 구호는 결국 그렇게 동방으로 진군했고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부동항을 1917년 얻어냈다.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 통상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을 개항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은 세계정세에 눈을 감고 있었다. 오로지 탐학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관료사족들에 의해 민중들은 유리걸식을 면치 못했다. 호환보다도 무섭다는 세금을 피해 걸인이나 도적이 되어갔다. 그중 일부가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벼농사를 지으며 주변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우스리스크에 뿌리를 내리고 이후 독립해방투쟁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조선인이 우스리스크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온 것은 1863년 13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근거로 조선인의 우수리스크 이주의 역사가 시작 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인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신유장군을 파병, 러시아군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북정일기) 이때부터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삼정이 문란해짐과 홍경래란. 탐관오리의 학정을 피해 불법 월경한 조선인이 농사를 지으며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우스리스크는 이상설선생의 헤이그밀사와 안중근선생 단지동맹의 피가 떨어진 곳이다. 그런 만큼 일제에 의한 한인들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일행이 묵념을 하고 돌아선 선생의 유허지 앞엔 ‘솔빈’강이흐른다. 느리게 흐르는 솔빈강은 강이기 보다는 내에 가깝다. 모래밭을 만들어 내며 구불구불 흘러가는 솔빈강은 어쩌면 선생의 고향 진천을 흐르는 덕산천과 너무도 닮아있다. 발 걷고 들어가 모래에 발을 넣으면 금방이라도 모래무지를 건져 올릴 것 같은 강 앞에 선생의 묘지를 보면서 선생이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짐작이 된다. 소나무를 둘러 심고 한쪽에는 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서있다. 진천 고향집 동구에 서있는 느티나무, 바람이 산들 불며 어머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동구 밖에 눈길을 준다.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노심초사 학수고대 하던 어머니다.
그뿐인가. 우수리스크는 레닌에 의해 고려인들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는 고난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돼 눈물과 한이 서린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우슈토베”로 강압적으로 실려 가는 시발이 되었던 역이 이곳 라즈돌로네 역이다.
라즈돌로네 역
아! 라즈돌로네 역
일행이 역에 도착했을 때 마침 철마의 쇠바퀴소리가 땅을 울리며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기차에 오른 것은 아닐 지라도 미지의 땅으로 두려움을 안고 떠나던 고려인들의 가슴을 십분이나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곳을 강제로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가. 이는 ‘아우스비츠’ 수용소로 실려 가는 유태인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강제이주에 협조하지 않으면 즉결 처단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차소리의 둔탁함이 그 무게를 말하려 함인지 가슴을 짓누르며 지나간다.
블라디보스톡은 광활하고 산림이 우거진 지역이다. ‘블라디’란 말은 ‘정복하라’란 말이고 ‘보스톡’은 ‘동방’이란 말이란다.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을 밟아본다. "한 때는 혁명이라는 한마디에 가슴 붉어지는 시기가 있었노라"는 노 정객의 고백을 들으며, 나도 혁명이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붉어져 본적이 있었는지 새삼 반추해본다. 러시아민중은 짜르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한 나라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91년 개혁개방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시장자본주의로 돌아 섰으나 사회곳곳에는 아직도 사회주의시절의 관습과 문화가 존재한다. 많은 곳에서 레닌 스탈린의 동상이 철거 되었지만 그들의 방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다시 짜르시대로 돌아간 것 아니냐는 푸념도 있지만 혁명광장을 지키는 ‘영원의 불꽃'이 상징 하는 것처럼 역사에서 최초로 무산자가 정권을 만든 경험은 오래도록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아니 남기려고 노력 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연해주의 애국계몽운동과 항일독립투쟁의 근거지가 신한촌이다. 지금은 신한촌 고려인집단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뜻있는 지사들에 의해 세워진 세 개의 비석만이 언덕위에 세워져있다. 하나는 고려인을 비롯한 재외 동포를, 또 하나는 북을, 나머지 하나는 남을 이미지화 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관리주체가 시 정부가 아닌 고려인 후세 이 베체슬라브씨이다. 이 분은 불편한 몸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이 비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고려인 후세 이 베체슬라브씨
블라디보스톡 역에는 모스크바까지의 거리인 9288이란 숫자가 밤을 밝힌다. 열차에는 각 칸마다 차장이 한사람씩 있고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다. 슬라브족의 특징인 뚱보아줌마가 우리열차의 차장이다. 역시나 뚱보아줌마 차장은 인심 좋게 패스포트를 넘겨받고 일단 승차를 허락한다. 게다가 필자는 꼴초인데 가끔 인심 좋은 차장을 만나면 기차와 기차연결통로에서 흡연을 허락하기도 한단다. 저 뚱보아줌마를 어떻게 구슬려 담배를 피워볼까를 궁리하며 살짝 인사하며 기차에 오른다.
속담에 "집나오면 개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역시 집 나온지 이틀 만에 수염은 살갖을 쑤시고 이를 닦는다든지 세면을 한다든지가 오히려 불편하다. 하루 이틀 안 씻어도 잘 먹고 잘 잔다.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그 시절 우리는 씻는 것을 잘 몰랐다. 세숫대야에 물 한바가지 퍼놓고 얼굴에 문지르면 그게 씻는 거였다. 겨우 눈꼽이나 떼는 행위로 일주일씩 버티곤 했다. 겨울이면 그나마도 잘 이뤄지지 않아 손등을 보면 까마귀가 "할배"하며 날아간다구 했을 정도니까.
오! 시베리아여
시베리아는 타타르어로 잠들어 있는 땅이란 뜻이란다. 러시아 국토의 7할에 가깝지만 인구는 2600만 명에 불과하다. 오랜 동안 유배와 처형의 장소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많은 문학예술인들은 시베리아를 노래하고 그렸다. 러시아 사람들의 시베리아 사랑이다.
"시베리아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은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것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눈이 녺을 때 보다는 겨울의 추위가 있을 때 쉽게 숨을 쉬며
아무 기척도 없는 야생의 밀림속에서 두려움보다 평안을 느낀다."
그렇게 시베리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시베리아횡단 철도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 했다. 동쪽과 서쪽의 도시들을 열어주고 각 대륙으로 향하는 항구를 열어 제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두고 레닌은 "철로의 길이 때문만이 아니라 건축가들의 끝없는 국고 약탈과 끝없는 노동력의 착취로 유명한길"이라고 했단다. 철길을 만드는데 들어간 엄청난 재정과 사람들의 피나는 노동이 만들어낸 것이란 뜻 일게다.
어둠을 가르며 자작나무이파리를 흔드는 기차바퀴 소리는 여기가 생명이 시작 된 곳임을 깨우치는 죽비소리 처럼 단호하면서도 가열차다. 끊임없이 석탄을 집어던져야하는 고된 노동으로 움직이던 기관차가 전기로 바뀌어 이제 그런 노동은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헉헉대는 숨소리가 철로에 굴러 떨어지는 느낌을 느끼고 있다.
또 한 축의 가열찬 투쟁
하바로프스크는 항일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빨치산들의 본거지 였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선생이 이곳에서 주로 항일 운동을 했다. 이동휘선생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제대로 된 평가도 없다. 이유는 훗날 고려공산당 대표로 사회주의계열 항일독립투사의 대표격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인 볼셰비키 여성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활동무대이기도하다. 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연해주로 이주한 아버지로 인해 우스리스크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학교를 마쳤다. 191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다. 1918년 이동휘, 김립, 박애, 오성묵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동맹을 결성할 때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동휘 등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과 달리 처음부터 볼셰비키였다. 1918년 9월 처형되기 전 극동볼셰비키당대회에 참석하여 하바로프스크 시당 비서로 선출 되었다. 또한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러시아볼셰비키당 인터내셔널 리스트였다.
현재 그는 하바로프스크의 마르크스가 24번지에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비문에는 "1917~1918년 이건물에세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프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했다. 1918년 9월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라고 기록돼 있다.
김알렉산드라
연해주에서 화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알 수 없는 고려인들의 눈물과 한숨이 떨어진 驛舍와 철길이 때마침 내리는 가랑비에 젖는다.
사람이 떠나버려 헐려버린 건물들이 듬성듬성 서있다. 아마 연방이 해체된 후 살 곳을 찾아 떠나버린 사람들의 흔적이리라. 을씨년스러운 모습과 넓은 초원이 이제는 모든 걸 버리고 ,몸도 마음도 내려놓고 쉬라고 하는 것 같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마음 착 내려앉는다.
이곳에 사람이 살 기회가 주어진 것은 두 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민족이 농경으로 접어들면서 쌀농사의 적지를 향해 이동한 것이 2만에서1만 년 전이다. 결국 한반도라는 땅에서 벼농사는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 땅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춥고 긴 겨울과 짧은 여름으로 벼농사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의 민족의 동진행렬은 쌀을 가지고 이동한 흔적일 것이다. 이보다는 더 아래 몽골지역으로 이동했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철길이 지나는 땅에도 발자국이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진 못한다. 그렇게 동진해서 결국 한반도에 쌀문화를 정착 시킨 민족이 우스리스크에서 다시 쌀농사를 시작하고 정착해 나가자 한민족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스탈린 시대의 비극으로 원치 않는 서쪽으로의 대이동이 시작 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우리민족의 시원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투르크'족이고 '투르크'는 '타타르'족의 변형된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관직이 '대대로'인데 이는 '타타르'의 차음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대대로'-'타타'르-'투르크'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한민족과 '타타르'는 형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땅에 피어나는 마타리꽃
저녁때가 되어 만주로 갈라진다는 분기점인 카림스카야에 도착 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그쳤다 반복하고 여전히 마타리와 술패랭이가 피어있고 백자작나무와 금빛 소나무들은 도열해 기차가 지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마타리는 우리 땅 어디에나 물기가 있는 곳이면 피어난다. 노랗게 작은 꽃들이 펼친 우산대모양으로 8월9월에 핀다. 항상 다정하게 바라보던 마타리를 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본다. 기찻길 옆에 핀 마타리, 그것은 결국 조상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며 발끝에 묻혀온 것이리라. 어디 그뿐인가. 술패랭이랑 부처꽃도 지금 내 마당앞에서 본 듯하니 분명 이 길은 한민족의 동진경로라고 확언하고 싶다.
일행들은 상당수가 농업관련자 들이라서 자연스럽게 해외농업에 대한 예기가 오갔다. 해외농업의 역사에서 현재상황까지 꿰뚫고 계시는 분이 게시기에 가능 한 일이다. 결론은 해외농업에대한 부정적 견해가 더 많았다. 이미 경험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정계에서 은퇴하신 한분이 필자에게 드넓은 초원을 보며 러시아 당국으로 부터 땅을 임대해 줄테니 농사를 지어 보라고 한다. 충분한 해외농업개발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신 분들임에도 쉽게 그런 말이 나온다. 땅에 대한 포한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란다. “자갈논이라도 좋으니 내 땅 한마지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하는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우리 농민들에게 땅은 그야말로 포한이었다. 그러나 이 초원은 긴 겨울과 짧은 여름 때문에 목초생산량이 많지 않아 목축업도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감자농사도 상업적 시도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우리민족이 이동한 경로보다 북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한국공산당 祕史를 엿보다
바이칼호변을 따라난 환바이칼 철도의 한쪽 끝을 붙들고 마지막 숨을 헐떡거린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참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시아군은 환바이칼 구간철도가 완성되지 않은 탓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전쟁에 패한 것이라고 한다. 보급이 중단된 러시아군은 만주에서 나는 콩을 먹게 되고, 콩은 단백질은 우수하지만 '이소플라본'이라는 여성홀몬과 유사한 물질이 있어 여성화된 병사들이 전쟁에 지게 됐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이루쿠츠크의 시작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인해 시작된다. 러시아의 귀족청년장교들의 파리여행은 러시아에도 경험주의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봉건제도를 타파하겠다는 젊은 혁명가들의 12월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유형의 도시 이르크츠크에 보내졌다. 그들을 '데카프리스트'라고 한다. 젊은 혁명가들을 따라온 그들의 여인11명에 의해 이르크츠크는 문화의 도시로 발전해 푸시킨에 의해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런 문명의 도시에 혈기왕성한 조선의 지식인과 혁명운동가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1919년 항일무장투쟁과 한국공산당창당을 협의하고 이끌었던 것이다. 이후 22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이르게 된다. 중국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서 창당이 된 것이다.지금도 남아있는 당사 건물은 붉은 벽돌과 흰색으로 깨끗하게 단장돼 오페라음악당으로 사용 중이란다. (이창주. 조선공산당 비사)
한국공산당건물
앙가라 강변에는 레닌동상보다는 카자크인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카작크인이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 ‘스텐카 라진’이 생각난다. 볼가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진격하는 농민군들에게 반란의 당위성과 아름다운 공주와의 사랑을 그린 노래로 러시아 민요가 됐다고 한다. 학민사 대표 김학민에 따르면 유인태 전의원이 잘 불렀다고 한다. 1690년 카자크 농민군과 1980년 한반도 남쪽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어떻게 동일하며 어떻게 달랐을까. 더군다나 러시아에서는 데카프리스트 들의 혁명은 혁명으로 인정하지만 15~16세기 농민반란은 혁명사에 포함하지도 않는다는데 말이다.
앙가라강에 뛰어들다.
민속촌 구경을 마친 일행들은 저녁도 먹을 겸 ‘반야’라고 하는 이곳 전통식 사우나탕에 들렀다. 사우나탕은 달궈진 돌에 물을 부어 증기를 만들어 자작나무 가지로 몸을 두들겨 혈액순환을 촉진해주는 방식이다. 그리곤 몸이 더워지면 앙가라강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기온이 18도 밖에 나가지 않아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막상 몸이 달구어지고 나니 강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강으로 뛰어들고 나니 나이 지긋 하신 분들도 따라 나와 강에 몸을 던진다. 몇 차례하고 나니 출출해져 ‘사슬릭’이라는 돼지고기 꼬치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알혼섬은 전 세계 샤먼들의 성지라고 한다. 가는 곳마다 서낭당이 보이고 나무마다에도 오방색 천을 둘러 어렸을 때 본 서낭당과 너무도 닮아 있다.
알혼섬 부르한 바위
‘알혼섬’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알온섬‘, 알논섬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민족의 난생설화의 오랜 버전이다. 알이 왔던지 알을 낳았던지 하는 말이 ’알혼‘이 되었을 것이다. ’부르한‘ 바위는 ’불알‘ 바위 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부랄’ ’부르알‘ ’부르한‘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르한 바위는 두 쪽으로 마치 음낭과 같은 형상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어떤 상당한 기운은 사람을 압도한다고 한다. ’
광복절 기념식과 평화기원제를 올리다.
일행들은 가져간 제수를 차리고 광복절 기념식과 평화기원제를 올렸다. 행사는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돼 정신이 없었지만 평화기원제 헌시를 쓰고 낭송했다.
바이칼이여, 우리의 시원이여
(동북아 평화기원제에 바쳐) 한 도 숙
바람이 불고 눈 날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라
누가 너의 등을 떠밀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벽을 뚫고
빛이 쏱아지는 곳으로 진군하라
동트는 안개속으로 들려오는
알혼의 거친 숨소리
콧속을 얼리는 툰트라의
칼바람으로
시베리아의 지축을 울리며 진군하라
그리하여
그리하여
바이칼 호수에 깃발을 올리고
유라시아 벌판에 말채찍을 휘두르자
이제
패랭이꽃 피어나는 땅에
우리 영혼의 육화를 위해
하늘 ,바람, 우레 그리고 땅의 신 앞에
향기로운 술을 올려라
그리하여
그리하여
우리 돌고 돌아온 시간이 바래어
시작과 끝이 하나가 된
그 시원을 뜨겁게 하라
그 뜨거움으로
자작나무 음습한 그늘을 벗겨내고
이끼에도 햋볕을 나누는 세상을
밝히리라
고된 걸음으로
진한 고통으로
뜨거운 열망으로
또 다시 하나가 되어라
우리가 만나는
돌 하나, 풀꽃 하나
그 어디에도 밝은 빛이 되리라
오! 바이칼이여
숨어있는 땅별의 영혼이여!!!
태고의 숨소리가 들리는가?
저녁을 먹고 '바냐'를 하러 들어갔다. 달궈진 돌에 물을 뿌리고 땀을 내고 있는데 묘령의 아가씨가 비키니 차림으로 들어온다. 러시아의 삼대보물이 무엇인가. 첫째가 보드카다. 많은 사람이 즐겼지만 그로인해 사망자도 부지기수지만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사랑받는 술이다. 두번째가 불곰이라고 했나? 러시아인들의 속을 모르겠다고 할 때 곰이라고 했다. 러시아하면 상징이 붉은 곰이다. 나폴레옹과 싸움, 히틀러와의 싸움을 가당치 않게 물리친 러시아인들의 음흉한 모습을 불곰을 빗대 말하고 있다. 세번째가 러시아 아가씨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러시아 보물이 내 앞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앉아있는 눈호사(?)를 했다. 하기야 내가 눈 둘 곳이 없어 쩔쩔매고 그 아가씨는 애인과 쫑알대느라 이방인에겐 관심도 없었다. 새벽 5시에 깨어 스텝언덕을 오른다. 이렇게 초원을 밟아보는 것이 이 땅을 이해하는 방법이리라. 스스로 몽골식으로 이름지은 ‘바람이 모이는 산’을 올랐다. 짧은 사초들은 이미 꽃을 피우고 열매를 퍼트렸다. 두메양귀비 노란 꽃들이 인사한다. 바위솔도 아침이슬에 반짝인다. 용담꽃도 얼른 피우고 겨울을 맞아야지... 다시 걸음을 옮겨 바이칼 호수로 내려간다. 오오 ! 귀한 것 오직 노고단에 예약하고 올라야 볼 수 있는 물매화가 무리를 이루고 피어있다. 물매화가 하얀 꽃잎을 펼치고 세속의 때를 정화하시라고 반짝거려 인사한다. 호수는 고요하다. 아침햇발을 받으며 환하게 주위를 비춰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탄성으로 화답한다. 저 깊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태고의 숨소리를 함께 한다.
300여개의 강과 내가 호수로 흘러드는데 흘러나가는 곳은 앙가라 강하나 뿐이란다. 그런데도 수위에는 변동이 없어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있단다. 속설에는 몽골에 있는 흡수골호수와 땅 밑으로 연결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곳 이루크츠크역에 도착한 고려인은 17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다시 노보시브르스크까지 보내지고 거기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에 9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7만6천여명과 키르키스탄으로 나누어 보내진다. 운명의 앞날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그중일부가 이루크츠크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들은 과연 이곳에 정착 했을까. 아니면 여기서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대부분이 그렇듯 언제 어디서 죽은 줄도 모르게 사라져 갔을까.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한 특강으로는 상태베테르부르크 대학 석좌교수인 이창주박사의 한반도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들었다. 답답하기만 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은 것 같다. 러시아는 대북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우리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뱃는 외교이상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북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동북아진출과 러시아와의 경제협력도 가능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저녁시간이 되어 도착한곳이 우랄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이다. 여기서 시베리아는 끝이 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약 7천km를 달려왔다. 이제 하루를 더 지내면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
이도시의 이름은 여제인 여카트리나 1세의 이름을 따 예카트린부르크라고 했다가 소련시절 공산혁명가 스베르들롭스크로 변경했으나 연방이 해체된 1991년 다시 예카트린부르크가 되었다. 1918년 니콜라이2세 황제와 그의 가족이 볼세비키혁명군에 의해 유배 후 처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걸 세상인심이라고 하나? 레닌그라드가 상태베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꾼 것을 봐도 레닌동상이 일부지역에서 뽑혀져 나가는 것을 봐도 세상인심은 변덕쟁이처럼 잘도 변한다. 계급혁명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프로레타리아트는 사라지고 돈 가진 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믿을 수가 없다. 민중을 억압하며 생살여탈을 주무르던 황제를 복권해주는 듯한 행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주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다는 생각들이 세상의 인심을 변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기차길옆에 매대에 코카콜라 전광판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러시아가 두려운 것은 광대한 땅이다. 단연코 그렇다. 화성에서 농사짓기는 어렵지만 시베리아에서 농사는 쉽게 지을 수 있다. 온실과 냉해에 견디는 작물과 조생종이라면 지금도 농사는 가능하다. 그런 만큼 러시아는 식량에서인류의 미래에 단단한 몫을 해낼 것이 분명하다.
모스크바가 백야일 것이라는 생각은 무식한 생각이었다. 백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월 하지 지나서 7월말 정도가 절정이라고 헌다. 우리가 도착한 8월18일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래도 그 기운은 남아 오전 5시 해가 뜨고 밤9시에 어두워진다. 낌새는 느끼는 것이다.
오. 모스크바여! 혁명의 도시여! 그리고
모스크바와 우리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민영환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미,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그 해 4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은 5월 26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선생은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로 길을 떠났다.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해, 나카사키, 동경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선생은 여기서 기차편으로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으로 갔다. 미국 뉴욕에 3일간 머물렀던 선생은 근대화된 도시와 선진 문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어 선생 일행은 상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하였고,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 일행은 5월 26일 크레믈린궁에서 거행된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을 참관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에 머물면서 선진 문물과 제도 등을 견문하였다. 이때 선생은 러시아의 근대식 군사제도와 신식 무기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두 차례의 병조판서를 지낸 경험과 함께 당시 외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조국의 현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910년 7월29일 열강들의 각축 속에 러시아를 통한 국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 민영환은 모스크바를 다녀갔다. 이후 합방이 일어나자 민영환은 자결로 그 책임을 다하고 만다.
1917년 프로레타리아뜨 혁명이 일어나고 짜르는 무너졌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크렘린을 중심으로 혁명을 완수해 나간다.
크렘린 입구에 칼막스동상 앞면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하지만 혁명을 완수했지만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고 사회주의는 붕괴하고 말았다. 당시 이념의 흔들림 속에서 방황하던 젊은이가 기하며 사회주의 종언을 외치며 이른바 전향한 지식인 젊은이들이 기하이었던가. 지금의 크렘린은 어떤 생각인지... 푸틴은 독재자라고 하면서도 당분간은 푸틴외의 사람이 대통령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억센 지지율이 있단다. 그러면서도 죽은 사회주의가 교육, 의료등 복지가 이들의 자존심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자본과 시장이 성장을 주도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모스크바는 이제 모스크바가 아니었다.
상품의 소비시장, 예술과 문화의 전당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이 철거되고 겨우 관공서 건물 앞에 명목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의 표상, 이제는 한낮 관광 상품이 되어버리고 돈을 찾아 날아드는 부나방들이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부정했던 짜르시대의 유물을 팔고, 죽었던 종교를 되살려 종교마저 상품으로 내 놓은 듯한 모습에 실망스럽기도 한데, 그래도 한때 유럽의 자본주의가 심각한 부패로 진행하지 않도록 한 역할은 아직도 긍정적이라 할 만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기적소리 울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러시아의 기틀을 만든 페테르대제가 만든 요새에서부터 출발하는 인공운하도시다. 이 도시는 레린 사후 그에게 도시 이름을 헌정해 레닌그라드라고 불렸으며. 우리세대는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이후1992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원되었다. 인구 600만의 도시 그러나 서울의 2.5배나 되는 거대도시 핀란드만으로 연결되어 크루즈선이 들어오는 도시, 북구의 베니스로 불리는 도시, 피의 일요일,과 2월 혁명이 일어난 피의 광장과 니콜라이 2세가 결국 민중의 성난 파도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난 화려한 궁전이 자리한 도시다.
피의광장
우리에게는 까마득히 잊혀진 도시, 그러나 우리 민족의 처절하고 뜨거웠던 근대에 일본으로 부터 국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루크 뻬스첼랴 거리 5번지에 있는 대한제국 주 러 영사관이 있던 건물이 있다. 바로 이범진공사가 집무했던 곳이다. 이범진 공사는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친러정책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헤이그밀사 삼인 중 한 사람인 이위종의 아버지로 평생을 이곳에서 러시아통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관파천을 주도했으며 1900년 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3개국 겸임공사로 상트페테르부르그에 부임했다. 눈 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며 이범진 공사는 이곳에 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된 뒤에도 황제의 밀사명목을 내세워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에 노력했고 특히 1907년 이 준 열사 등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3밀사를 러시아 황제가 지원하도록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후 병탄이 되자 1911년1월13일 그의 자택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그는 이곳 공동묘지에 안장돼있으며 정부의 노력으로 순국비가 세워졌다.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많은 부분이다. 어쨌든 국권회복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들이 빼앗긴 나라 그들이 책임져야한다. 구한말의 지도자들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구역질이 나오도록 역겨운 자들이 부지기수다. 철저한 양반의 나라였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은 오히려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짓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오로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국권회복에 몸을 바친 이들이 적지 않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상승해가는 인권에 대한 인지는 눈꼽 만큼도 없었으며 봉건체제의 유지만이 그들의 목표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예우를 존중하는 지도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신들의 체제를 굳건히 해야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지 않는가.
특히 독립해방투쟁에서 무수히 공을 세우고 산화해간 선열들을 모두 예우하지 못하는 좀생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라도 좌우를 가리지 말고 독립해방투쟁에 몸을 바친 모든 선열들을 기리도록 해야 한다. 서대문에 공원을 만들고 이들 모두를 차별 없이 기려야 할 일이다.
그들 열혈선열들 아니면 우리가 어찌 나라의 국권을 회복 할 수 있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푸시킨의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하는 시구는 어렸을 때 이발소 액자 속에 주로 있었던 시구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푸시킨은 당시로선 상당히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글을 썼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를 백골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일갈할 정도로 세상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부인과 프랑스 군 출신 조르주단테스와의 염문에 발끈하고 결투를 신청한다. 그렇게 레몬에이드 한잔을 마시고 광장으로 나가 결투를 벌이고 그는 복부총상으로 이틀 후 숨졌다고 한다. 그가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고뇌에 찬 모습은 밀랍인형이 되어 찻집에 홀로 앉아 찻집의 매상을 올려주고 있다.
푸쉬킨의 밀랍인형
네바강을 피로 물들였던 역사는 흘러가고 이제는 관광으로 먹고 살아가는 도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전체 도시가 유네스크에 지정된 유적이며 궁전들의 당당함과 더욱 성스러워지는 듯 한 성당들, 그리고 푸시킨의 거리에서 푸시킨과 한판 토론이라도 붙을 듯 찾아드는 손님들이 마시는 ‘레몬에이드’ 그 맛은 무슨 맛이었을까.
여행은 계속되지만 이제 눈을 붙이고 싶다.
이번 여행은 농업계의 '호병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 농특위 위원장이셨던 분이 농민들 중심으로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동북아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미래평화를 그려보자는 제안으로 함께 하게 됐다. 일정이 너무 길어서 여러 가지 걱정들이 있기는 했으나 좋은 기회인지라 큰맘 먹고 함께 했다.
마지막 빙하기말기쯤에 바이칼 호 부근에서 살았을 것이라 추정되는 민족의 시원을 찻아서, 거꾸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회귀된 조선족들의 고통과 분노, 회한을 들여다보고 또한 나라를 잃어버린 저간의 세월을 오로지 나라를 되찾을 각오로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싸우다 죽어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선열들의 흔적을 찾아서 그렇게 길을 나섰다.
긴장이 더해지고 있는 한반도에 삶을 꾸려가는 장삼이사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현재를 ㅂ준석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의무이지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이 그런 것들을 충족했다고 보이진 않는다. 더 많은 여행의 이야기로 살들이 붙고 서로의 생각을 덜고 보태는 것들도 여행의 의미를 깊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광야'에서를 부르며, '선구자'를 부르며 가도 가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텡그리'신의 땅, '당골'의 땅, '단군'의 땅이 다르지 않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농사를 통한 인류의 이동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이제 눈을 붙이고 싶다. 아련히 망막속으로 사라져버린 벌판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 '브랴트' 아주머니가 오래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분홍바늘꽃' 한줌도......
첫댓글 제주도는요?
백남기사망으로 바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