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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촌·조양은 40년 흥망사 (2) “깡에선 김태촌이 최고” “조양은, 김태촌을 아기로 생각”
두 사람의 옛 동생들은 자신이 모신 보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김태촌씨의 한 동생은 “건달 중에서 가장 야문 사람이 김태촌”이라며 “기질과 깡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 앞에선 조양은도, 선배들도 꼬리를 내렸다”고 평했다. 그에 따르면 김씨는 싸움을 하면 늘 앞장을 섰고 조씨는 뒤에서 폼만 잡는 스타일이었다는 것. 반면 조양은씨의 옛 심복은 “김태촌은 조양은보다 한 수 아래”라며 “조양은은 김태촌을 아기로 생각했다”고 완전히 다른 얘기를 했다. 또 다른 동생은 “당시 서울 중심부의 유흥가는 우리가 다 장악했다.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두 사람은 1970~80년대 OB파의 이동재씨와 더불어 이른바 3대 패밀리 시대를 열었다. 그 시절 3대 패밀리는 국내 조직폭력의 상징이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무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이씨. 1988년 양은이파 방계조직인 순천시민파로부터 온몸을 난자당한 이후 주먹계를 떠났다. 그의 퇴장으로 3대 패밀리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김씨와 조씨는 교도소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며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어머니 괴롭힌 깡패들에 복수한 김태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출소 직후 조직생활 청산과 신앙인의 길을 선언했다. 먼저 사회에 나간 사람은 조씨. 1995년 3월, 15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이후 자서전 출간, 영화 출연, TV 토크쇼 출연 등 갖가지 화제를 뿌리다 이듬해 사기, 폭행 등의 혐의로 재구속돼 2년 실형을 살았다. 2001년에는 해외원정도박 혐의로 다시 구속,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2005년 8월, 17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김씨는 “조양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기독교 신앙인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였다. 신앙간증과 청소년 선도 강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진주교도소 복역 시절 보안과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1년여 만에 재구속됐다. 검찰은 지난 2월 탤런트 권상우씨 협박사건(강요 미수)으로 그를 추가기소했다. 같은 호남 출신인 두 사람의 운명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서울에서다. 먼저 서울에 터를 닦은 사람은 조양은씨. 광주 지산동에서 태어난 조씨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소년원을 구경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화신8인조를 만들어 광주 시내 조직 간 전쟁에 개입했다. 당시 광주 조직폭력계의 양대 산맥은 충장로파와 대호파(OB파의 전신)였다. 조씨는 충장로파 두목 전희○씨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다 1960년대 후반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과 함께 서울로 진출했다. 조씨가 성인이 되어 처음 구속된 것은 1970년 2월. 명동 캠퍼스다방에서 벌어진 패싸움으로 8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출소 직후 소공동의 명소이던 조선호텔의 고고클럽 투모로우 관리를 맡았다. 이듬해 8월엔 중앙정보부 간부로 호남주먹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문모씨에게 대들었다가 괘씸죄로 구속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사건 당시 조씨를 질책했던 선배 주먹들은 출소할 때는 구치소로 마중을 나가 환영했다. 그 무렵 김태촌씨는 광주에서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김씨의 상경은 조씨보다 늦었다. 1973년 주먹계 대선배인 송태○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서울 유흥업계에 자리를 잡은 조양은씨와 달리 1976년까지 서울과 광주를 왔다갔다했다. 김씨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 서방면에서 자라났다.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구속돼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소년원을 세 차례 들락거렸다. 김씨와 함께 광주에서 학생 깡패로 활동했던 김용○씨는 “조양은은 징역을 살면서 유명해졌지만, 김태촌은 싸움을 통해 전국적인 보스가 됐다”고 두 사람을 비교했다. “태촌이는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고 무척 야물었다. 고교 때 김태촌과 나를 포함해 11명이 서클을 조직했다. 하루에 몇 차례나 싸움질을 했다. 태촌이는 고2 때 퇴학당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후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광주를 완전히 평정했다.” 김태촌씨가 주먹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깡패들에게 행패를 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깡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씨는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뜨렸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섞인 분풀이였다. 이 사건 직후 김씨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뜻이 맞는 아이들을 모아 나중에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린 깡패들에게 복수했다고 한다. 김태촌씨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성인이 된 후 1976년까지 폭력사건으로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76년은 그의 주먹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양은이파와의 3년 전쟁에 불을 지른 오종○씨 난자 사건, 1970년대 정치폭력의 상징인 신민당 전당대회 난입사건이 다 그해에 일어났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중심가에는 호남 주먹이 많이 진출해 있었다. 당시 호남 주먹의 대부는 송깡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태○씨였다. 북창동에 터잡고 있던 송씨는 호남 출신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다. 송씨의 왼팔, 오른팔이 정학○씨와 박종○씨였다. 두 사람 다 목포 출신. 사보이호텔의 오인 가격 ▲ 1975년 1월 조양은씨와 동생들은 사보이호텔 커피숍에 있는 신상사파를 기습했다.
사진은 조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스’의 장면.
경희대 태권도 선수 출신인 정씨는 서울역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진로그룹 후계 싸움에 개입한 것을 계기로 진로에 입사한 후 계열사 사장에까지 올랐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모 스포츠구단 사장을 지내며 정치권의 숨은 실력자로 통했다.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당시 주먹계에서는 “정학○가 최고 실세 주먹”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3년 5월 나라종금 로비의혹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번개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박씨 역시 ‘태권도 주먹’이다. 1988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씨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와 결연의식을 치러 물의를 빚었다. 1990년엔 김태촌씨가 조직한 신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태권도협회 고위직을 역임한 그는 2003년 12월 태권도협회 폭력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달아나 기소중지됐다. 박종○씨의 아래로 박영○, 그 다음이 오기○씨였다. 전 국회의원 신모씨의 사위인 박영○씨는 광주 동아파 출신. 김태촌씨를 신민당 전당대회 폭력사건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김태촌씨의 직계 선배인 오씨는 뒷날 신우회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김씨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현준 게이트에 연루돼 해외로 도피했으나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무교동에는 목포 출신의 오종○씨가 자리잡고 있었다. 양장점을 운영하던 오씨는 신사 주먹으로 통했다. 서울로 올라온 조양은씨를 친동생처럼 돌봐주고 이끌어준 사람이 바로 오씨였다. 오씨는 박종○씨와 더불어 서울 호남 주먹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주로 전남 출신인 이들 호남 주먹들은 주먹사에서 범호남파로 분류된다. 범호남파에는 걸출한 주먹이 많았지만, 전통의 서울 조직인 신상사파에는 밀렸다. 신상사파 두목 신상○씨는 1950년대 명동을 장악하고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이화룡씨의 행동대장 출신이다. 조양은씨가 호남 주먹계의 샛별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신상사파를 공격하고 나서였다. 1975년 1월2일, 서울의 주먹 판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터졌다. 그 유명한 사보이호텔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1974년 연말에 정학○씨의 직계 후배인 이모씨가 신상사파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었다. 이씨는 노모씨의 이권(利權)과 관련해 사보이호텔에 있는 신상사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신상사의 측근 정모씨 등에게 각목으로 구타당해 만신창이가 됐다. 노씨는 대구 출신 주먹 조창○씨의 친구였다. 당대 최고의 주먹으로 꼽히던 조씨는 특별한 조직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호남 주먹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양은씨의 측근이던 모씨는 “창○ 형은 의협심이 강해 존경하는 동생이 많았다”며 “당시 맞장 떠서 창○형을 당할 사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사건 직후 정학○씨는 후배인 오종○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오씨는 심복인 조양은씨를 불렀다. 조씨는 동생들과 함께 1월2일 낮 1시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급습했다. 이들은 닥치는 대로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커피숍에는 신상사 식구들 외에 조씨의 호남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싸움은 불과 1~2분 만에 끝났고 조씨 일행은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정작 주 표적인 정모씨와 신상사는 현장에 없어 해를 입지 않았다. 사보이호텔 사건 내용은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졌다는 게 주먹계 정설이다. 내막을 잘 아는 주먹 출신 사업가 김모씨에 따르면 그날 다친 사람은 신상사파 실세인 김수○씨와 조씨의 호남 선배인 박모씨 두 사람 정도였다.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어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박씨의 경우 오인(誤認) 가격이었다. 신상사의 후원자로 야쿠자 동생을 둔 니시야마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장발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박씨가 장발이었다. 니시야마의 얼굴을 잘 모르는 조씨의 동생들이 박씨를 니시야마로 잘못 알고 때렸다는 것이다. “늘 칼 차고 다녔고, 만나면 싸웠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서울 주먹계의 절대 강자이던 신상사파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행동대장급에 지나지 않던 조양은씨를 일약 차세대 주먹의 선두주자로 부각시킨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그의 숙적인 김태촌씨가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신상사파와 가까웠던 박종○, 오기○씨 등 호남파 주먹들이 후배인 김씨에게 보복 명령을 내린 것. 김씨는 당시 신상사를 큰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김씨는 특공대를 조직해 조씨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두 사람 간에 벌어진 이른바 ‘3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조씨를 찾아다니던 김씨는 어느 순간 표적을 조씨의 보호막인 오종○씨로 바꿨다. 오씨를 제거하면 조씨가 설 땅이 없어지리라는 계산에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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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쥐잡자 원문보기 글쓴이: j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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