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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여진정벌과 북방경영
ⅰ. 고려 영토의 북방한계선은 송화강 일대
고려 영토에 대해 국사교과서에서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이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넓었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 치부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료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면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넓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고려사』「지리지」서(序)를 보면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그(고려)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되었다.
『고려사』권56 「지리」
고려영토의 동북쪽이 고구려때보다 확장되었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역으로 보면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고구려의 동북계보다 넓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국사교과서에는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한반도를 넘지 못했다고 나와있을까? 이는 조선전기에 편찬된 지리지의 인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고려 고종 18년 이후 몽골이 고려를 침범하면서 고려 동북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변태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종 1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양계(羊界:북계와 동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해도(海島)로 들어가고, 다시 남쪽지방으로 옮겨 임시로 거처했으며, 덕주 같은 곳은 주의 치소가 5번이나 옮길만큼 이사(移徙)가 심했다고 한다.
치소의 변천은 덕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몽골의 침입으로 동북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주(州)나 진(鎭)들의 위치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몽골의 침입으로 동북계의 지명이 변화되고, 원 간섭기를 거치며 심화되었을 것이다. 동북계 지역을 몽골이 지배하면서 치소가 바뀌고, 훗날 조선이 동북면의 여진을 쫓아내고 4군6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지명의 이동 및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혼란은 고려의 동북쪽 영토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의 기록은 조선초기에 고려의 동북쪽 영토에 대한 지리적 인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세종실록』 권59 15년 3월 20일(계유)
누구보다도 통치지역에 대한 정보가 많았을 한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조선의 왕이 고려의 동북쪽 영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전기에 고려시기 동북계에 대해 정확한 지리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조선의 고려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국사교과서에서는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고려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고려의 영토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넓었음을 알려준다. 송나라 시기 이도가 저술한 『속자치통감장편』을 보자.
(원풍 5년, 1082) ‘선조(先朝) 시기에는, 여진이 항상 등주(登州)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馬行道)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마행도가 고려에) 막혀서 끊겨, (여진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더불어 왕래를 하는데, (고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여진의 사신은 끝내오지 않았다.
고려가 여진과 송의 교역루트인 마행도를 끊었다는 사료다. 당시 고려는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율하던 나라였다. 거란의 침입조차 제대로 막지 못한 송나라의 여진의 사신을 들여보내라는 말조차 무시할정도로 고려의 국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럼 고려가 막은 마행도의 위치는 어디일까? 마행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가 송과 여진의 교류를 차단하려면, 압록강이나 두만강 이북의 교통로를 점령해야만 했다. 고려가 점령한 마행도는 두만강 이북방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지만, 고려로서는 압록강 이북의 마행도를 막아 거란을 자극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행도의 위치
여튼『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은 고려의 군사가 함경남도 정평(定平)으로부터 두만강 이북을 넘어, 여진의 마행도를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마행도 점령을 일시적인 점령이라 보는 사람이 있지만, 일시점령이라고 하기에는 고려가 마행도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 여진과 송의 교역이 단절된 시간을 송 신종(연호가 원풍) 앞 임금인 영종(英宗, 1063~1067)으로 한정해서 살펴봐도 영종 1년(1063)부터 조서를 내린 신종 원풍 5년(1082)까지 1년 동안, 적게 잡아 신종 당대만을 놓고, 신종 1년(1068)부터 조서를 내린 원풍 5년(1082)까지 14년 동안 여진과 송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
물자의 보급문제와 여진의 반발을 생각하면 함경남도 정평 이하라는 고려의 영토선에서 멀리 떨어진 두만강 이북에 군대만 19년 내지 14년동안 길목을 막고있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가 최소한 14년동안 마행도를 막고 있었다면, 고려가 지속적으로 송과 여진의 교류를 막았음을 의미하고, 이는 기존의 고려의 영토가 두만강 이북까지 진출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려가 두만강 방면의 마행도를 점령했을 가능성은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파견하여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권5 현종 17년(1026)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치고, 고려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율하는 나라로 발돋움하자, 동여진의 고려로의 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위 기사의 동북여진은 간도와 그 이북지역에 위치하고있는 여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걸 거절할 정도로 당시 고려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 기사는 만약 고려의 영토가 지금의 압록강 하구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이라면 해석할 수 없는 기사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기 위해서 발해시기 교통로중 하나인 등주도를 통하는 것이 빠름에도 왜 고려 영토로 들어와 한반도를 동서로 갈라놓고 있는 백두대간을 넘어 함경도를 지나 간도지역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가는 루트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든다.
역으로 이 기록은 고려가 두만강 이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가 두만강 이북을 차지했음은 물론, 여진의 교역루트인 마행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역으로 보면 고려의 마행도 점령은 적어도 1026년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고려에게 빌려달라고 한 『고려사』의 기사는 고려가 여진과 거란 사이의 길목을 차단하였고,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기존보다 넓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의 최북단으로 알려진 정주(定州)의 위치에 대해 학계에서는 현재 함경남도 정평(定平)이라고 한다. 그리고 국사교과서, 한국사개설서에도 정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정평에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정주가 함경남도가 아닌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다고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로부터 대오를 정비하고 길주(吉州)로 가던 도중 나복기촌(那卜基村)에 도착했을 때 함주(咸州)사록 유원서(兪元胥)가 급보를 보내기를 “여진의 공형 요불(?弗), 사현(史顯) 등이 성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제 아지고촌에 가니(昨到 阿之古村)에 가니 태사 오야속(烏雅束)이 화친을 청하려고 우리들을 보내면서 귀국 병마사에게 이 뜻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전 중이므로 관문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바라건대, 우리가 있는 곳까지 사람을 보내, 태사의 말한 바를 상세히 전달받로록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윤관 등이 이 보고를 듣고, 성으로 돌아와서 다음날(翌日)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진으로 파견하여 여진의 장군 오사(吳舍)에게 통고하기를 “강화하는 일은 병마사가 오로지 못하는 것이니 공형 등을 고려의 조정에 보내어 임금께 아뢰어보라”하니 오사가 대단히 기뻐하였다. 요불, 사현 등이 다시 함주로 와서 말하였다.
『고려사』권96 윤관 전
위 사료들을 보면 정주와 길주 사이, 그리고 정주와 함주 사이에 나복기촌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지고촌은 완안부 여진이 살고 있는 아십하 유역의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阿城) 부근이다. 아지고촌에서 함주까지 여진의 사신 요불, 사현이 오는데 昨到阿之古村의 글귀를 통해 아지고촌에서 함주까지의 거리가 하루정도의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주를 기점으로 함주보다 먼 곳에 있는 여진촌락까지 하루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사료의 내용을 보건대, 여진과 접해있는 정주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부근 아성에서 하루 내지 이틀 정도의 거리 권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정설대로 정주가 함경남도 정평이라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다. 정주가 고려와 여진이 접촉하고 있는 곳이며, 고려가 여진의 마행도를 끊은 것을 들어 허인욱씨는 정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정평이 아닌 중국 길림성 안도현 송강진(松江鎭) 부근이라 비정하고 있다. 참고로 송강진 송강둔에서 서북쪽 12리 떨어진 곳에 고려성유지(高麗城遺址)가 있다. 이는 고려의 영토가 길림성까지 미쳤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고려의 두만강 이북 진출 가능성은 다음의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29정 함주(咸州)로부터 90리를 가면 동주(同州)에 이른다. 함주로부터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50리를 가면 동주에 이른다. 함주를 떠나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평지에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경작지가 넓고, 땅에는 기장을 널리 재배하고 있다. 동쪽으로 큰 산(大山)이 보이는데, 금나라 사람(金人)들이 신라산(新羅山)이라고 한다. 산의 내부는 깊고 멀며 도로가 없다. 그 사이에서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된다. 산속 깊은 지역은 고려와 더불어 경계를 이룬다. 산아래 길까지 30리 정도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
위 기록은 금나라 태종 즉위식에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허황종이 금나라를 여행했던 동안의 일정을 전하는 기행견문록으로, 『대금국지』에 전해지고 있는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일부분이다. 이 기행록은 금나라, 고려인이 아닌 제3국인이 기록한것으로 사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은 신라산이라 불리우는 대산(大山)이 고려와 금(여진)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산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함주나 동주, 숙주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고려와 여진의 경계지역이 어디인지 대략적이나마 추정할 수 있을 듯 싶다.
『중국역사지도집』을 보면 함주는 현재 중국 요녕성 개원현의 개원노성이고, 동주는 요녕성 개원현 남중고진이라 한다. 현재 개원에서 북쪽으로 동북평원이라 불리우는 넓은 평야지대가 존재한다. 이는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함주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평야가 펼쳐져 있다’ 는 기록과 합치된다. 결국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서 말하는 평야지대는 현재의 동북평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기록된 고려와 여진의 경계지역인 넓은 평야지대의 동쪽의 큰 산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를 보도록 하자.
갈라로 군사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지난날에 해마다 고려 경계에서 물개와 해동청, 큰부리까마귀, 송골매를 잡았습니다.근래에 배 두 척을 가지고 갔더니, 저들이 14척의 전함으로 막고 공격해서, 두 배에 칸 사람들을 죽이고 그 병장기를 빼앗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금사』태종2년(1116) 5월 을사
금나라 군사가 연례적으로 고려의 경계에 가서 해동청(海東靑)을 잡았는데, 고려 군사가 공격해서 금나라 사람들을 죽였다고 보고를 올리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동청이다. 『금사』등의 사료에 의하면 해동청의 주산지는 오국부(五國府)라 기록되어 있다. 오국부는 여진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그 위치를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依蘭)지역으로 보고 있다.
오국부의 위치
그런데 고려의 전함이 여진인이 경계를 침입했다는 이유로 공격했다고 한다면, 고려의 영역과 오국(五國) 즉 의란 지역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한다. 이 말은 고려의 북방경계선이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보다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려가 상경용천부를 영역으로 하고 있음은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짐(朕:요나라 도종)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삼가 정삭(正朔)을 받들고 공물을 보내왔다. ……"
『고려사』권12 숙종 정축 2년(1097) 12월 계사
이 기사는 요(遼:거란)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책문 내용 중 일부다. 주목할 것은 고려의 영토가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른다는 점이다. 이는 거란과 고려 양국이 용천이라는 지명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용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용천은 고려와 거란이 대치하는 지역도 아니고, 고려의 큰 행정구역 명칭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용천은 고려와 거란이 공통적으로 알고있는 역사속의 큰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불리웠고, 거란왕이 보낸 책문에 나타난 용천과 한자도 동일하다. 그렇다는 건 거란왕이 책문에 기재된 용천(龍泉)이라는 지명은 상경용천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금사』와 『고려사』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의 영토가 상경용천부와 그 이북지역까지 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과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와 여진의 접경지인 대산의 위치를 추론해보자. 신라산이라 불리우는 대산이 고려와 여진의 국경선을 이룬다고 한 기록을 보면 대산은 현재의 산맥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도로나 운반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거대한 자연지형(산맥)이 국경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동북평원의 동쪽에 있는 산맥 중 하나가 대산일 가능성이 높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산이 깊고 멀며, 도로가 없을 정도’로 묘사된 대산은 사람이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산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산 아래까지 30리’라는 부분을 통해 대산을 통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보이는 대산은 『고려사』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영가(盈歌)와 오야속(烏雅束)이 계속하여 추장으로 되어 자못 군중의 지지를 받게되자, 점차 그기세가 횡포하게 되기 시작하였다. 이위(伊位)의 경계선 지점에 연달아 산줄기가 있는 바 그것이 동해안으로부터 불끈 솟아서 고려 북부 국경까지 뻗쳤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무성하여 사람과 말의 통행이 지극히 곤란했다. 그 사이에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것을 ‘병항(甁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단 한 구멍으로 출닙하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려사』권96 윤관 전
고려사의 고려와 여진의 경계인 산줄기에 관한 기록은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대산에 대한 설명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럼 고려와 여진의 국경역할을 한 산맥을 찾아보자. 동북평원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장광재령과 서노야령, 길림합달령으로 이어지는 산맥과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있다. 산이 험하고 통행로가 거의 없다는 것을 근거로 경계가 되는 산맥을 찾으면,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사료에서 말하는 대산으로 보인다. 전자가동북평원과 통하는 교통로가 많은 반면,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경우, 위호령을 넘는 길이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고려와 여진의 경계인 대산은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광재령과 위호령이 고려와 여진간의 경계가 되면, 발해의 상경용천부와 경박호 등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고려의 영토로 포함된다. 국사교과서,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려의 영토가 함경북도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당대의 사료에는 고려의 영토가 두만강을 넘어 송화강 유역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고려사』, 『속자치통감장편』, 『선화을사봉사행정록』등의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고려는 상경용천부인 현재의 동경성을 넘어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과 가까운 부근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고려영토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ⅱ. 고려 문종의 여진정벌
고려의 대외정벌에 대해 우리는 윤관의 여진정벌을 꼽는다. 그런데 윤관 이전, 고려 문종 시기에 여진을 정벌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윤관 이전, 고려 11대 문종시기, 고려는 덕종 이래로 끊임없이 국력을 키웠고,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고려가 끊임없이 신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키운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거란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진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여진견제는 고려가 추진한 북진정책과도 맞닿아 있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로 고려는 지속적으로 북방 경영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고려의 국시인 북진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문종 3년인 1049년 동여진 해적 침구사건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북방에 대한 고려조정의 의지를 보여준다. 1049년 6월과 7월 동여진 해적이 고려 해안을 노략하자 그들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0월 또 다시 이들이 침입하자 병마녹사 문양렬은 원흥진 도부서 판관 송제한과 함께 군선을 몰아 추격전을 펼쳤고, 철저한 강공작전을 펼쳐 동여진 해적 소굴까지 쫓아가 그들의 가옥을 불태우고 20여명을 참살하고 개선하였다.
해적 소탕에 자신감을 얻은 문양렬은 문종 4년 1050년 9월 해적들이 또다시 침략해오자 23척의 수군선단을 지휘하여 추자도 부근까지 해적들을 추격하며 맹공을 퍼부어 9명을 참살하고 30여 채의 가옥을 전소시켰을 뿐 아니라 8척의 적선을 파괴했으며 해적들이 쓰던 온갖 병장기를 수백여 점이나 노획했다. 아라비아와 고류하던 해양강국 고려의 수군의 강력함을 증명한 승리였다. 문종은 이에 문양렬 수군에게 상을 내렸을 뿐 아니라 수군과 함께 지상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그렇지만 북방 여진족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1051년 8월 여진족이 귀주와 창주에 침입했고 같은 해 9월 동여진이 쳐들어왔다. 거듭된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여 고려는 1051년 10월 유음기광군이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던 차에 1055년 거란이 변경근처에 궁구문란을 설치하여 침략의도를 드러냈다.
북방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정벌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문종은 1056년 7월 여진의 침략조짐을 눈치채고 적극적인 북벌정책을 감행했다. 동로병마사 김단을 지휘 책임자로 북벌부대를 움직여 동여진의 20여 개 마을을 말끔히 소탕하게 했다. 이는 문양렬 수군선단의 해적 소굴 격파에 이은 지상병력의 북벌작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방민족의 간헐적인 침입은 계속 이었다. 1061년 8~9월, 1062년에 여진족은 고려 국경을 침범했다. 이에 고려는 또다시 북벌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1080년(문종34년) 고려는 중서시랑평장사인 문정을 중심으로 보기병 3만을 파견하여 정주성 외곽을 지키고 있던 여진족을 공략하였다. 문정의 대군은 10여 개의 여진 부락을 무찔러 392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지휘자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숱한 병장기와 100여 필의 우마를 노획하여 귀환했다.
고려의 북방원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북방 여진족을 굴복시킴으로써 고려의 힘을 북방에 과시하였을 뿐 아니라 계속 이어지던 여진족의 침입을 분쇄시키고, 나아가 여진을 고려의 영향력 하에 두었기 때문이다.
ⅲ. 여진족의 귀부와 고려 문종의 북방영토 개척
고려의 영토가 송화강과 목단강 유역으로 크게 확장된 시기는 언제일까? 허인욱씨는 고려 문종시기 여진족의 내부가 대거 이루어진 점을 들어, 고려 문종 때 고려의 북방영토가 허얼빈 근처까지 확장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고려와 거란은 여진 지배를 놓고 경쟁했는데 서여진은 거란이 동여진은 고려의 영향력이 강했다. 고려는 귀부한 여진에게 관작을 수여했고, 그 지역에 기미주를 설치해 간접 지배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해 지배하기도 했다.
문종 원년(1047) 8월 기사일에 몽라고촌(蒙羅古村)과 앙과지촌(仰果只村) 등 30개 촌락이, 10월 정미일에는 몽라등촌(蒙羅等村)의 고무제(古無諸) 등의 312호가 고려에 내부하였다. 이들에 이어 수많은 여진인들이 고려 경내로 들어오는데, 고려는 이에 대응하여 문종 4년 계미일에 관리에게 명령하여 동여진의 대걸라니촌과 소걸라니촌의 경계를 조사하여 확정하게 한 후, 적들의 침입을 방비하게 하였다. 경계를 조사 · 확정하고 적들의 침입을 방비하게 했다는 것은 고려가 이 지역을 고려의 영역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문종 19년(1065) 기록을 보면 고려가 옛 현토(玄?:현도)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책문에 이르기를 "짐은 천명을 받들고 삼가 큰 계획을 지켜 …… 아래로는 제후를 친히하여 나라를 세우고 널리 번국을 세웠도다.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 현도의 강토를 넓혔으며, 대를 이어 크게 왕사(王社)를 열고 충성을 바쳐 멀리 제신(帝宸)을 도왔도다. …… 표해(表海)에 봉작을 이어 계승하고 대하(帶河)의 맹서를 전하였다. 덕화를 진변(辰卞)에 펴니 흡족하도다. 편안히 위무하니 공(功)이 널리 떨쳐지고, 업적이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처럼 성하니 정묘하게 공수의 사신을 다하였다. …… "라고 하였다.
『고려사』권8 문종 19년 4월 계사(癸巳)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 현토의 강토를 넓혔다는 것은 고려가 고구려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현토의 강토를 넓혔다는 기록은이다. 현토의 강토를 넓혔다는 것은 고려의 영토를 넓혔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고려가 압록강을 넘어 옛 현토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고려의 영토확장은 여진의 내부와도 관련이 깊다.
지속적으로 고려에 내부한 여진족은 문종 27년인 1079년에 활기를 띠게 된다. 2월 동여진 귀순주의 도령 대상 고도화, 익창주의 도령 귀덕장군 고사, 전성주 · 공주 · 복주 · 온주 · 성주의 도령들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 안으로 붙어 군현이 되기를 요청하였고, 문종은 이를 승인하였다. 또한 4월 병자일 문종의 조서에는 동북 변강 15개 주 바깥에 있는 번인들이 계속 귀순해 와서 군현을 설치하여 달라는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5월 정미일에는 서북면 병마사가 서여진도 동번(동여진)의 예에 준하여 주 · 군을 설치해 달라며 청원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리고 있다. 서여진이 동번의 예에 준하여 주,군을 설치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보면 고려가 귀부한 동여진 지역에 주,군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가 귀부해온 여진을 단순히 번병이 아닌 행정적인 체계로 여진 촌락을 정비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고려의 영토로 편제하였음을 뜻한다.
고려가 귀부해온 여진촌락을 고려의 영토로 삼았음은 다음 사료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6월) 을미일에 동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동여진)의 대제자고하사(大齊者古河舍) 제12촌 곤두괴발(昆豆魁拔) 등 1,970호가 상곤(霜昆)의 예에 존하여, 우리에게 귀속되기를 청원하여 왔으며 두룡골이(豆龍骨伊), 여파한(餘波漢) 등 부락의 번장 아로한(阿老漢) 등도 우리의 주, 현으로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그 거리가 먼 관계로 예로부터 아직 조공한 일이없다가 지금 이렇게 모두 귀순하였습니다. 이제 만일 경계선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한다면 여파한령(餘波漢嶺) 바깥에 있는 제차고(齊遮古), 대사이(大史伊), 칭견(稱見), 곤준(昆俊), 단준(丹俊), 무을비화두(無乙比化豆) 등 지역은 그 한계가 끝없이 광활하고 번인들이 연달아 살고 있는만큼 그 곳에 모조리 요새지를 설치할 수 없으니 여파한령(餘波漢嶺) 바깥에 있는 번인들의 지역이 우리 주, 현으로 삼은 후 점차로 먼 곳에 있는 번인들에게까지 손을 뻗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승인하였다.
『고려사』권9 문종 27년
이 기사는 동로병마사가 여파한령(餘波漢嶺) 바깥에 있는 지역을 먼저 주, 현으로 편입한 뒤 순차적으로 그 지역보다 먼 지역으로 진출하자고 건의하는 내용이고, 이를 문종이 승인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해 고려가 귀부해온 여진족의 마을을 고려영토로 삼았음을 뜻한다. 다음의 기사 역시 귀순해오는 여진촌락을 고려영토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6월 무인일에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三山), 대란(大蘭), 지즐(支櫛)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所乙浦村)의 번장(蕃長) 염한(鹽漢)과 소지즐의 전리(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와 대지즐, 나기나(羅基那), 오안(烏安), 무이주(撫夷州), 골아이(骨阿伊) 번장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가 와서 국적에 들기를 청원합니다. 대지즐(大支櫛)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 해변까지의 장성에 이르기까지 700리에 달하며, 지금 번인들이 연락 부절하게 귀순하여 오고 있으니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해당관리로 하여금 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게 하는 동시에 주기(朱記)를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따랐다.
『고려사』권9 문종 27년
국적에 들기를 원하는 700리에 달하는 여진촌락 지역에 주의 명칭을 정하게 하는 동시에, 주기를 내려달라는 내용인데, 주기는 조정이 내외 관부 등에 지급한 관인(官印)이다. 『고려사』문종 27년 6월의 두 기사는 귀부해온 여진족을 번병으로서 여진촌락을 관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영토로서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여진족의 귀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7월에는 흑수 역어(譯語:통역관) 가서로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에 임명하고 고맹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9월에는 동여진의 대란촌 등 11개촌을 빈주, 이주, 복주 등 11개 주로 삼아 귀순주에 예속시켰다.
문종(1047)에서 순종(1083)에 이르는 시기에 고려 전기 귀화여진인 44,926명 중 약 44%인 19,259명이 집중되어 있고, 현종 때부터 예종 12년까지의 기간에 전체 귀화사례의 83%인 155회가 집중되어 있다. 귀화가 이토록 집중되었다는 것은 문종 치세 고려가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추정도)
그럼 문종이 확장시킨 고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일까? 고려 문종이 확장한 영토는 하얼빈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조 기사의 고려에 내부한 여진촌락 중 삼산이란 촌락을 주목하자. 『고려사』문종 27년 기록을 보면 삼산촌에서 여진족과 전쟁을 벌인 기록이 있다. 그런데 삼산촌을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 중에 나복기촌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복기촌은 정주에서 길주로 가던 길목, 그리고 함주와 정주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금의 상경회령부인 흑룡강성 아성(하얼빈)에서 정주까지 이틀 거리임을 감안할 때 나복기촌 역시 아성에서 이틀 정도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복기촌보다 북쪽에 위치한 삼산은 거리상 완안부 여진의 근거지 아성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고 보면, 지금의 동만주 지역에 위치했다고 여겨진다.
삼산촌이라 불리우는 지역의 경계 안에 포(浦나 해변(海邊)이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이를 한반도 동해안의 바닷가로 학계에서는 인식했다. 그런데 바다로 생각될 정도로 큰 호수에 해(海)라 불리웠음을 상기해보자. 금나라 시기 경박호를 홀한해(忽汗海)라 불리웠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고려와 여진이 전쟁하던 시기에도 해(海)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를 보면 경박호 안에 3개의 산이 그려져 있고, 그 산의 명칭이 삼산(三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산촌이 지금의 경박호 부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 경박호 북쪽 목단강 좌안에는 목단강 변성이 있다. 경박호보다 이북지역인 목단강시와 해림현 이북, 남성자고성 이서, 목단강 좌안에 자리잡은 강서촌 이서에는 목단강 변성이 존재하는데 길이가 백 리나 되는 장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고려사』문종 27년 6월 기사를 보면 대지즐(大支櫛)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 해변까지의 장성에 이르기까지 라는 문구가 있다. 목단강 변성이 바로 대지즐~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의 장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여진족들의 귀부가 활발해지는 현종 시기부터 고려는 북쪽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려 정종 7년에 고려가 간도 송강진 부근에 정주도호부를 설치하면서, 두만강 이북이 고려의영토로 확정되고, 문종 때 이르러 여진인들의내부가 절정에 달하면서 1097년을 전후한 시기, 경박호 부근과 허얼빈 근처까지 고려의 영토가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 후 고려 숙종, 예종 시기 완안부 여진과 전쟁을 치르면서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확정되고, 원 간섭기 이전까지 확장된 고려의 영토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종에 대해 『고려사』를 기록한 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칭송을 남겼다.
문종은 몸소 절약과 검소에 힘쓰고, 필요없는 관원들을 줄이고, 여러가지 비용을 줄여썼다. 그러므로 태창(개경의 곡물 저장창고)에는 양곡이 오래 쌓여 있게 되어, 붉게 썩기까지 했다. 집집마다 생활이 넉넉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인구가 늘고 나라가 부유란 좋은 정치가 이 때 이르러 가장 흥성했다.
가히 태평성대라 불리울만한 시기다. 조선의 태평성대라 불리우는 세종 때 조차 굶어죽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을 상기해볼때 문종시기는 백성들이 배를 굶지않는 요,순시대와도 같았을것이다. 창고에 쌀이 썩을정도로 집집마다 곳간에 곡식이 가득하다는 기록은 광개토태왕릉비 말고 고려사의 문종 시기가 유일하다.
문종은 고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을 뿐 아니라, 고려에 태평성대를 안겨다 준 위대한 군주였다. 이런 고려의 문종을 아는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ⅳ. 윤관의 여진정벌.... 과연 실패한 정벌인가?
추가로 윤관의 여진정벌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숙종 시기 윤관의 여진정벌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고려의 여진정벌을 실패라 한다. 하지만 고려의 여진정벌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여진의 완안부가 여진사회를 통합하여 금(金)제국을 건설하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북송까지 멸망시켜 회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그들은 고려를 자극한다거나 병탄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거란처럼 과거 사실을 들먹이며 고려에게 땅을 할양하라 요구하지 않았다. 거란이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고려를 굴복시키려 한 것과 비교해보면 여진의 고려정책은 특별했다.
왜 그들은 고려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지난 4년간에 걸친 고려-여진전쟁 때문이었다. 고려군은 여진군에 뒤지지 않는 최강의 군대였다. 고려는 거란, 송을 멸망시킨 여진의 군대와 4년 동안이나 물러섬 없이 그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워왔다. 그렇기에 금나라는 고려를 자극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고려 조정이 9성 환부를 한 것도, 새롭게 보아야 한다. 고려가 여진족에게 동북 9성을 돌려준것은 고려가 완안부로부터 빼앗아 새로이 구축한 동북 9성 지역에 대한 주권을 완안부에게 내준것이 아니라 문종 때 동여진 지역을 기미주로 삼아 간접지배한 것과 같이 이 지역을 기미주로서 여진족들이 살도록 허용하되, 어디까지나 고려의 속령으로서 고려의 신민으로서 고려에 충성을 바치라는 의미로 여진의 속민들에게 자치를 허용한 것으로 새롭게 봐야한다.
윤관은 동북9성 지역을 고려가 직접 지배하여 고려백성들이 살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고려 조정은 윤관의 건의를 가납하여 새로 개척한 지역에 대규모로 주민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함주에는 13,000호를 영주와 웅주에는 각각 1만호를 두는 등 9성 지역에 62,000호를 두었다. 인구수로 환산하면 31만명에서 43만에 이르는 대규모 인구이주였다. 훗날 조선의 4군6진 개척 후 이들 지역에 이주한 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주였으니, 당시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는 윤관의 의지가 어떠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고려가 구축한 지역이 매우 광범위하고, 끊임없는 완안부 여진의 공격, 물자보급, 군대보충 문제 등으로 고려조정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9성 경비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들어가고 있으니, 국가손실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9성문제로 고심하던 고려 조정은 마침 여진족이 9성 지역을 돌려주면 예전처럼 조공하겠다며 간청을 하자, 조정은 여진족들의 애걸복걸한 간청을 받아들여 9성환부를 결정했다.
고려 조정의 9성환부는 군현지배를 포기하고, 기미지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대로 힘겹게 얻은 땅을 대가없이 돌려준 것이 아니었다.
예종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요불 등을 접견하고 9성을 돌려주겠다고 하니, 요불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고려 황제의 은혜에 감사했다. 예종은 내시 김향을 시켜 여진 사신들을 국경까지 호송하게 하는 동시에 9성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9성을 돌려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어 고려의 행영병마별감(行營兵馬別監) 최홍정과 병마사 문관이 9성 지역으로 가서 여진 추장들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했고, 여진 추장들은 성문 밖에 단을 쌓아 하늘에 맹세했다.
앞으로 딴 마음을 품지않고 계속 조공하오리다. 이 맹세를 변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가 멸망할 것입니다.
고려군이 철수할 때, 동북9성에 거주하던 고려인들도 남쪽으로 되돌아갔는데, 기록에는 여진인들이 고려조정의 9성환부 결정에 감격하여 민간인과 노약자를 수레에 태워 호송하고 한 사람도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가 크게 패전한 것이라면 어떻게 여진족들이 고려의 민간인과 노약자를 수레에 태우고, 그것도 모잘라 호송까지 했을까? 게다가 여진은 9성을 환부한 다음해 약속대로 다시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
위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윤관의 여진정벌은 실패가 아니었다. 충분히 강력해진 완안부 여진을 상대로 4년이나 그들은 밀리지 않았다. 더욱이 9성을 환부하는 조건으로 고려는 여진을 문종시기처럼 다시 기미지배를 했으며, 그들의 충성서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여진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고려가 손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려는 완안부 여진을 상대로 얻은 9성을 환부했을 뿐, 그 이전 문종시기에 획득한 영토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문종시기 획득한 송화강에서 목단강 유역, 경박호, 장광재령 등지의 영토는 고려의 영토였다. 윤관의 여진정벌은 고려가 문종 시기 확장한 영토를 영구히 고려의 영토임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만주지역까지 확장된 고려의 영토는 원 간섭기 때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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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동북쪽 영토의 확장은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으려는 북진정책의 일환이었다. 북방사(北方史)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고려의 동북계 확장은 매우 중요하다. 『고려사』의 기록대로 고려의 동북쪽 영토는 고구려를 능가했을 가능성도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영토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광활했음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아직도 고려가 반도에 웅크린 작은 국가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여진을 호령하여 동만주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고려는 고구려 못지않은 자랑스런 우리의 선조국가였다. 그리고 고려 문종은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비견될만큼 훌륭한 치세를 남긴 위대한 군주였다.
이미지 출처 : 허인욱, 「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1
참고문헌
논문
허인욱, 「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1
허인욱, 「고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거란의 인식변화와 영토문제」,『한국중세사연구』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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