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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健元陵의 특징 조선조(朝鮮朝)의 건국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7년)의 건원릉은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입니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紅살門)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獻陵)에도 있습니다.
太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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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392 |
1년 |
7월, 이성계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 |
1396 |
5년 |
8월, 신덕황후 승하 |
1393 |
2년 |
2월, 국호 조선(朝鮮)으로 정함 |
1397 |
6년 |
9월, 흥천사(興天寺) 창건 |
1394 |
3년 |
10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
1398 |
7년 |
8월, 1차 왕자의 난 { 정도전,남은 피살 } |
1395 |
4년 |
9월, 경복궁(景福宮) 완성 |
9월, 세자 방과에게 전위(傳位) |
뒷 이야기 : 이자춘{추존 환조}과 부인 최씨{추존 의혜왕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 국호(國號) 변경, 한양(漢陽) 천도(遷都) 등 새로운 왕조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의 암투(暗鬪)로 인한 자식들의 분란을 당하자 차남 방과{定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됩니다. 그 후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으로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자식은 모두 8남 5녀를 남기고 창덕궁에서 승하{태종 8년}합니다. 건원릉에는 다른 왕릉과 다르게 봉분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습니다. 이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명하듯이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는 이성계에게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풀로 일종의 의복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위화도회군}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이었지만 말년의 생활이 자식들의 피를 보는 불우한 일생을 마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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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太祖의 신의왕후(神懿王后) - 제릉(齊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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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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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陵의 특징 :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開國) 이전에 승하(昇遐)했기에 개성 근처에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追尊)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신의황후 약사(略史) :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성계와의 슬하에 6남{방우, 방과<정종(定宗)>, 방의, 방간, 방원<태종(太宗)>, 방연} 2녀{경신, 경선}를 두고 55세[공양왕 3년]에 승하했습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가 즉위한 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고 태종 10년에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했습니다. 근세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
제1대 太祖의 계후(繼后) 신덕왕후(神德王后) - 정릉(貞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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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 87 사 적 : 제 208 호
貞陵의 특징 :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 -1396)의 정릉은 처음 도성(都城) 안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승하 후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었던 일{1차 왕자의 난<1398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밖 양주군[현재의 정릉 자리]으로 능을 옮겼습니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했고, 세종 즉위년에는 전세(田稅) 5결(結)을 주고 족친(族親)들에게 제사를 맡기기까지 합니다. 그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습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이나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神德王后 약사(略史) : 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젊은 시절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을 하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보고 화를 냈다가 이유를 알고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太宗)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顯宗代)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끔 찾는 능이기도 한데, 다소 초라한 모습에서 조선 초대 국모(國母)의 위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왕릉의 모습보다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운동공간이 되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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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厚陵의 특징 : 定宗(이방과: 1357-1419 , 재위 2년, 상왕 20년)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후 后 金氏: 1355-1412)의 후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게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지역에에 소재하고 있어 자세한 경관은 볼 수 없지만 북한에서 발간된 사진으로 볼 때 많많은 풍화(風化)와 소실된 모습에서 우리의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함을 안안타깝게 여깁니다.
定宗代의 사료(史料)
연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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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1399 |
1년 |
3월, 문신들을 집현전(集賢殿)에 회합 |
1400 |
2년 |
1월, 2차 왕자의 난{방간 유배} |
11월, 세자 방원에게 선위(禪位) |
뒷 이야기 : 정종은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조 7년[1398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방석석(芳碩)이 죽자 대신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같은 해 9월에 태조로부터 선양(禪讓讓)을 받아 즉위합니다. 정안왕후와의 슬하에는 후사가 없으나, 후궁들 사이에 115명의 군(君)과 8명의 옹주(翁主)를 두었습니다. 또한 2년간의 왕위(王位) 시절 역역시 실질적으로는 동생 방원{태종(太宗)}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졌기에, 결국국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 머물면서 말년을 지냅니다. '정종(定宗)'이란 묘호(廟號)는 사후(死後)에 바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숙종 7년[[1681년]에 와서야 진상되어 묘호를 정종(定宗)이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는 명(明)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시호(諡號) 공정(恭靖)을 칭호(稱號)로 삼아 '공정왕(恭靖王)'이라 했기에 실록 역시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라 했었습니다다.
정안왕후는 고려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었던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로 태어나[1355년] 태조 7년에 덕빈(德嬪)에 책봉되고 정종 즉위로 왕왕비에 올라 정종(定宗)의 내조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정안왕후는 정종이 실권자인인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편안한 말년을 보내며 천수(天壽)를 다 했습니다다. 하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이 58세의 나이로 태종 12년에 승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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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 헌릉(獻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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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獻陵의 특징 :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년, 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종대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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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01 |
1년 |
7월, 신문고(申聞鼓) 설치 |
1410 |
10년 |
2월, 주자소에서 서적을 인쇄 판매함 |
1402 |
2년 |
1월, 과거에 무과(武科) 설치 |
1411 |
11년 |
11월, 한성에 오부학당(五部學堂) 설치 |
8월, 호패법(號牌法) 실시 |
1412 |
12년 |
2월, 한성 개천(開川) 공사 끝남 |
1403 |
3년 |
2월, 주자소(鑄字所) 설치{계미자} |
1413 |
13년 |
3월,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 완성 |
1405 |
5년 |
1월, 최초 여관(女官) 임명{3월 폐지} |
12월, 백성들에게 호패 패용토록 하명 |
10월, 창덕궁(昌德宮) 완성 |
1417 |
17년 |
5월, 명(明)에 바칠 처녀 선발 |
1408 |
8년 |
5월, 태조 이성계 승하{1335- } |
1418 |
18년 |
6월, 세자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 책봉 |
1409 |
9년 |
8월, 태조실록 편수 하륜에게 하명 |
8월, 세자{忠寧大君}에게 선위(禪位) |
뒷 이야기 :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開國)에 1등 공신(功臣) 역할을 했습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高麗)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王權)에 있었습니다. 세자(世子)였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 방석(芳碩)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芳幹)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세종대(世宗代)의 성대(盛代)에 기반을 세웠습니다. 태종은 18년간의 왕위(王位)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明), 일본(日本), 여진(女眞)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특히 세종(世宗)에게 선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주도했으며, 그 후 별궁(別宮)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원경왕후는 고려말기의 신하였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세종(世宗)과 양녕, 효령, 성녕의 3대군(大君)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의 4공주(公主)를 두었습니다. 말년에 태종과의 불화(不和)로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처형 등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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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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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世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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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19 |
1년 |
6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쓰시마정벌 |
1443 |
25년 |
4월, 세자에게 정사를 섭행 시킴 |
9월, 정종(定宗) 승하{1357- } |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
1422 |
4년 |
5월, 태종(太宗) 승하{1367- } |
1445 |
27년 |
11월, 실록(實錄)을 충주, 전주, 성주(星州)의 삼고(三庫)에 분장시킴 |
1423 |
5년 |
2월, 남산에 봉화대(烽火臺) 설치 |
1424 |
6년 |
9월, 조선통보(朝鮮通寶) 주조 |
1446 |
28년 |
10월, 공문서에훈민정음 사용 |
1426 |
8년 |
8월, 춘추관<정종실록(定宗實錄)>완성 |
12월, 이과(吏科),사전(史典) 등 시험에 훈민정음 시험과목화 함 |
1431 |
10년 |
춘추관 <태종실록(太宗實錄)> 완성 |
1434 |
16년 |
7월, 신활자 갑인자(甲寅字) 주조 |
1448 |
30년 |
7월, 성균관생 및 오부학당 생도 등이 불당 건립에 반대하여 동맹휴학함 |
1437 |
19년 |
1월, 흉년으로 도적 성행-관리봉록삭감 |
1440 |
22년 |
2월, 남녀 성혼기 정함(남16,여14이상) |
1450 |
32년 |
2월, 세종 승하{1397- }, 왕세자(文宗) 즉위 * 독일 구텐베르크 활자인쇄술 창안 |
1441 |
23년 |
8월, 측우기(測雨器)비치,양수표 세움 |
뒷 이야기 : 32년간 재위(在位)했던 세종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치적을 살펴보면 다른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志)'의 수록을 통해 당대의 완비된 문물(文物) 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아악(雅樂)에 관한 {악(樂)}, 역사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天文)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슬하에는 문종(文宗), 수양<세조(世祖)>,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의 8남과 정소, 정의공주의 2녀를 두었습니다. 수많은 치적을 이룬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세종과는 달리 왕비 소헌왕후는 영의정을 지낸 부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이 태종에 의해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겪고, 세종 14년[1432년]에야 왕비로 개봉(改封)됩니다. 또한 자신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다소 불우한 일생을 마쳤습니다.[세종 28년] 영릉의 원찰(願刹)인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여주로 영릉을 옮긴 후에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했지만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원찰(願刹)제도가 사라져 본래의 신륵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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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 현릉(顯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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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顯陵의 특징 : 문종(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홍살문(紅--門)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릉은 웅장하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까지 두르고 있지만, 현덕왕후릉은 다소 치우쳐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본래 현덕왕후가 세자빈 때(1441년: 세종23년) 단종(端宗)을 출산하고 승하해서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추숭되어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가 단종 즉위년[1452년]에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집안이 동생이 단종의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세가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다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文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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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51 |
1년 |
6월, 새로운 진법(陣法)을 찬함 |
1452 |
2년 |
2월, 세종실록 편찬 시작 |
5월, 문종 승하{1414- }, 세자 단종 즉위 |
뒷 이야기 :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20여년간의 세자(世子) 생활로 정치력은 우수했으나 평소 몸이 허약했기에 재위 2년 4개월만에 승하하게 됩니다. 이에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계유정란(癸酉靖亂 :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치하고 군부를 장악함)'과 세조의 찬위(簒位), 사육신(死六臣) 사건 등을 초래하게 됩니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문종 대는 병법서(兵法書)인 <동국병감(東國兵鑑)> 등을 간행하고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는 등의 작업과 함께 서울의 도성(都城)을 비롯한 각 도의 주요 읍성(邑城)들을 개축(改築)하는 등의 치적을 올립니다.
생전과 사후 모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단명(短命)한 비운의 왕비 현덕왕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안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단종과 경혜공주를 두었지만, 세자빈 책봉 4년만에 승하해 현덕(顯德)의 시호(諡號)를 내렸고 문종 즉위 후 왕후에 추숭(追崇)됩니다.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 사 적 : 제 196 호
莊陵의 특징 :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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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53 |
1년 |
1월, 문종실록(文宗實錄)찬수 시작 |
1454 |
2년 |
3월, 춘추관 '세종실록' 163권 완성 |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 발생 |
6월, 단종 수양대군에게 왕위 선위 |
뒷 이야기 :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세종 23년] 단종은 8세 때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어린 단종을 보위했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성삼문, 박팽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궁중의 역사(力士)였던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단종을 보위했던 충신들을 제거하는 일대 거사를 일으킨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사변(事變)을 일으킵니다. 곧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상왕(上王)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 사건이 터지자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단종의 실록 역시 처음에는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불려지다가 숙종 때 복위되면서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명칭을 되찾게 됩니다. 결국 권력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심으로 단종의 폐위와 사망. 1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 단종에 대한 비애는 그가 유배(流配)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나 '금표비(禁標碑)' 등지에서 가슴에 느껴집니다. 또한 영흥리의 '자규루(子規樓)'에서 자규시(子規詩)를 읊조리던 어린 단종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왕위의 선위(禪位)에서 유배 생활과 사약(賜藥)을 받고 승하할 때까지의 단종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권력의 비애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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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 사릉(思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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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 사 적 : 제 209 호
思陵의 특징 :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1521)의 사릉(思陵)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송씨의 불우한 일생을 대변하듯이 다소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장릉이 멀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지만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이었기에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어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역시 추봉된 능이었기에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없이 봉분만 조성하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한 쌍씩만 주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정순왕후의 약사(略史) : 여산송씨(礪山宋氏)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1457년(세조 3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했습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世祖)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 21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도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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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 광릉(光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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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사 적 : 제 197 호
光陵의 특징 : 세조(이유 : 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王妃)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지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주위의 수목원을 떠올리면 되겠지요.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세조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石室)과 석곽(石槨)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灰隔: 관(棺)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石灰)로 다짐)으로 석실, 석곽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하다가 성종(成宗)이 먼저 건립한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 인해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됩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 명으로 중건된 세조의 명복을 빌었던 광릉의 원찰(願刹)입니다.
世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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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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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 |
1년 |
11월, 춘추관 문종실록 13권 완성 |
1462 |
8년 |
5월, 신숙주 영의정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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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 |
2년 |
6월, 성삼문,박팽년 등 6신{死六臣}이 상왕{단종} 복위 도모로 사형 |
1465 |
11년 |
4월, 한성에 원각사(圓覺寺)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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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 |
13년 |
5월, 길주인(吉州人) 이시애(李施愛) 반란 8월에 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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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 |
3년 |
6월, 상왕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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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왕세자(덕종) 죽음{1438- } |
1468 |
14년 |
9월, 세조 승하{1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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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노산군(魯山君) 승하{14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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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 세종의 차남으로 태어난 세조는 세종 27년(1445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됩니다. 세조는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1452년 단종(端宗) 즉위 후 단종을 보호했던 안평대군 이하 수십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455년[단종 3년]에 단종에게서 왕위(王位)을 받아 왕권(王權)을 쥐었고 52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하지만 재위 시절에는 평소 좋아하던 무술로 인해 조선군의 무력을 크게 강화해 두 차례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안으로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한 치적도 남겼습니다.
정희왕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덕종(德宗), 예종(睿宗)의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장남 덕종이 요절(夭折)하고 차남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만에 승하하자 당일 덕종의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 : 成宗)을 즉위케 했습니다. 성종 역시 13세의 나이에 즉위했기에 정희왕후가 7년간 섭정(攝政)을 할 정도로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두 차례의 섭정 등에서 보듯이 성종 14년(1483년)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궁궐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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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 - 경릉(敬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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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敬陵의 특징 : 아들{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왕의 아버지로 뒤에 추존(追尊;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올리던 일 - 추숭(追崇))된 덕종(이장(李暲) : 1438-1457 : 세조의 장남)과 왕비(王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 : 1437-1504)의 경릉(敬陵)은 서오능(西五陵)에서 처음으로 조성되었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했는데, 특이하게 일반적인 능 배치와 상반되게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고 왼쪽이 소혜왕후의 능입니다.
덕종의 능은 세자(世子)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세조(世祖)의 평소 소신인 간략한 장례로 인해 봉분에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도 없이 대군묘(大君墓) 형식으로 간략하게 조성되어 이후의 추존(追尊)된 능의 전례를 삼게 됩니다. 그러나 소혜왕후의 능은 생전에 덕종 추존과 함께 왕비(王妃)로 추숭(追崇)되었고, 예종(睿宗)보다 뒤에 승하했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昌陵)을 모범으로 조성되어 병풍석(屛風石)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왕릉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추존(追尊) 약사(略史) : 수양대군{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종은 총명하게 자라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슬하에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두고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에 성종 2년[1471년]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되고, 성종 7년[1476년]에 묘호를 덕종(德宗)으로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소혜왕후 한씨는 1437년[세종 19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나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됩니다. 덕종 승하 후 예종(睿宗)을 지나 아들 성종(成宗)대에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후에 책봉되었고, 손자 연산군대(燕山君代)까지 살다가 승하[연산군 10년]했습니다. 특히 소혜왕후는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들을 위한 <여훈(女訓)>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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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예종(睿宗)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 창릉(昌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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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7 호
昌陵의 특징 :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이황(李晄) : 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
睿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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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69 |
1년 |
1월, 한명회 영의정으로 함 |
1469 |
1년 |
11월,예종 승하{1450- } |
9월, 경국대전(經國大典) 4전 완성 |
정희대비 명으로 자산군{성종} 즉위 |
뒷 이야기 : 세조의 차남으로 태어난 예종은 세조가 즉위하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세자였던 형 의경세자(懿敬世子 : 덕종(德宗))가 요절[세조 3년, 1457년]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1468년 세조 승하 하루 전에 선위(禪位)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1469년 11월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태어났는데,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요절하자 세조 8년[1462년]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왕비에 오릅니다. 예종 승하 후 성종 2년에 인혜대비(仁惠大妃)로 봉해지고 연산군 3년(1497년)에 다시 명의대비(明懿大妃)에 봉해집니다. 슬하에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를 두었고 연산군 4년(1498년)에 승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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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 공릉(恭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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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恭陵의 특징 :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 1445-1461)의 공릉(恭陵)은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封墳)의 난간석(欄干石)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생략되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에 성종(成宗) 1년(1470년)에 공릉(恭陵)으로 명명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과 영조(英祖)의 장자(長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립니다.
장순왕후 약사(略史) : 압구정(狎鷗亭)으로 유명한 청주한씨(淸州韓氏)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장녀로 태어난 예종의 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韓氏)는 세조를 도와 권력을 쥐었던 아버지에 의해 세자빈으로 책봉(세조 6년, 1460년)되었으나 다음해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살의 어린나이에 승하해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특히 동생 공혜왕후(恭惠王后 : 성종의 비(妃)) 역시 19살의 나이에 승하해 비운(非運)의 자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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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 선릉(宣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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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宣陵의 특징 : 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년)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成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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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71 |
2년 |
12월, 춘추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 |
1484 |
15년 |
9월, 창경궁(昌慶宮) 완성 |
1472 |
3년 |
5월, 춘추관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 |
1488 |
19년 |
5월, 유향소(留鄕所)를 다시 둠 |
1476 |
7년 |
8월, 숙의(淑儀) 윤씨(尹氏) 왕비 책봉 |
12월, 월산대군{성종 형} 죽음{1454- } |
1478 |
9년 |
11월, 서거정 <동문선(東文選)> 편찬 |
1492 |
23년 |
3월, 왜인(倭人)의 사무역(私貿易) 허가 |
1479 |
10년 |
6월, 왕비 윤씨 폐위함 |
* 콜럼부스 아메리카 항로 발견 |
1480 |
11년 |
2월, 원자 융{연산군}을 왕세자로 봉함 |
1494 |
25년 |
12월, 성종 승하{1457- }, 연산군 즉위 |
뒷 이야기 : 성종은 아버지{추존 덕종(德宗)}가 생후 2달만에 승하하고, 예종 또한 1년만에 승하해 세조의 비(妃)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명으로 13살의 나이[1469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7년간의 섭정을 지나 친정(親政)한 성종은 재위 25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시킨<成> 국왕이 되었습니다. 성종대의 치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납니다. 홍문관(弘文館), 존경각(尊經閣), 독서당(讀書堂)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대부터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서인 <동문선(東文選)>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女眞族)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日本)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룹니다.
정현왕후 윤씨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태어나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성종 5년, 1474년)하고 원자(元子-연산군(燕山君))를 낳은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슬하에 중종(中宗)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중종 25년에 승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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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 - 순릉(順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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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順陵의 특징 :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순릉(順陵)은 왕비 책봉 5년만에 슬하에 자식 없이 19살의 나이로 승하[성종 6년]해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순릉(順陵)이라 명명되어 자리잡게 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모든 부속물들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공혜왕후 약사(略史) :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아버지 한명회의 야심에 의해 두 딸이 모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됬지만 두 왕비 모두 단명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일생을 보냈습니다. 공혜왕후는 12살 때[세조 13년, 1467년] 자산군(者山君-成宗)에게 출가하여 1469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5년 뒤에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비(妃)}, 소혜왕후 한씨{추존 덕종의 비(妃)},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繼妃)}가 모두 생존해 있어서 공혜왕후는 효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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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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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연산군묘(燕山君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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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5 사 적 : 제 362 호
燕山君墓의 특징 :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신씨(愼氏;?-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을 보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燕山君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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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95 |
1년 |
4월, {성종실록(成宗實錄)} 수찬을 명함 |
1502 |
8년 |
9월, 원자(元子) '노'를 세자로 봉함 |
1496 |
2년 |
6월, 폐비 윤씨(尹氏) 추숭(追崇)함 |
1504 |
10년 |
윤4월, 경연(經筵)을 폐함 |
1498 |
4년 |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 김종직(金宗直) 부관참시함 |
7월, 언문(彦文)의 교수.학습 금함 10월, 갑자사화(甲子士禍)-김굉필 효수 |
1499 |
5년 |
2월, 춘추관 {성종실록}을 찬진함 |
1506 |
12년 |
4월, 사간원(司諫院)을 폐함 |
1500 |
6년 |
6월, 음난남녀처사(淫亂男女處死)의 법을 제정함 |
9월,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함{중종반정} |
11월, 과부(寡婦) 재가(再嫁) 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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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성종 14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까지 오르지만 재위 12년만에 성희안, 박원종 등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맙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실록<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등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포악한 성격에 거듭된 실정(失政)과 폭정 등이 나열되지만 당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암투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성종비에서 폐위된 윤씨(尹氏}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연산군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부인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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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靖陵의 특징 :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中宗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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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06 |
1년 |
11월, 연산군 병으로 죽음{1476- } |
1521 |
16년 |
6월, 노산군(魯山君) 부인 송씨(宋氏) {단종 비-정순왕후} 죽음{1440-} |
1507 |
2년 |
6월, <연산군일기> 수찬 시작 |
1524 |
19년 |
11월, 김안로(金安老) 파직,유배됨 |
1509 |
4년 |
9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완성 |
1527 |
22년 |
3월, 동궁(東宮) 작서(灼鼠)의 변(變) |
1510 |
5년 |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일어남 |
4월, 최세진 [훈몽자회(訓蒙字會)] 찬진 |
1513 |
9년 |
12월, 성균관 존경각(尊慶閣)서적 소실 |
1529 |
24년 |
5월, 김안로를 방면(放免)함 |
1515 |
10년 |
2월, 원자(元子-仁宗) 출생 |
1531 |
26년 |
6월, 김안로 대호군(大護軍)이 됨 |
8월, 박상(朴祥)등 단경왕후 복위 상소 |
1537 |
32년 |
1월, 모화관에 영조문(迎詔門) 세움 |
1517 |
12년 |
8월, 정몽주(鄭夢周)문묘(文廟)배향 |
8월,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함 |
1518 |
13년 |
9월, 소격서(昭格署)를 폐함 |
10월, 김안로 사사(賜死)하고 형제 유배 |
1519 |
14년 |
5월,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됨 |
1538 |
33년 |
11월, 성주사고(星州史庫) 전소(全燒) |
12월, 조광조 사사(賜死)-기묘사화 |
1543 |
38년 |
10월, 주세붕(周世鵬) 백운동서원 세움 |
1520 |
15년 |
11월, 골육상송(骨肉相訟)을 금함 |
1544 |
39년 |
11월, 왕 승하{1488- } |
뒷 이야기 : 권력의 암투에 의해 임금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종대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대라 할 것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슬하에서 태어나 자신의 이복(異服) 형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했고, 자신의 부인{단경왕후}까지 폐위시킨 장본인 이었기에 처음부터 당대의 국왕의 힘은 필연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적 정치의 실현이 좌초되었을 때{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불안한 정국은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리처럼 권력 내부의 혼미는 외부의 결속을 가속화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했고 훈구세력의 몰락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도 또한 이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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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 온릉(溫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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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 사 적 : 제 210 호
溫陵의 특징 :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습니다.
단경왕후 약사(略史) :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燕山君)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 13세 때에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과 혼인을 맺었으나, 몇 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政)은 온 집안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아버지의 반정(反政) 반대로 인한 죽음, 고모였던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 등의 폐위와 함께 1506년 왕비 책봉 7일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犧牲羊)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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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 희릉(禧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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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禧陵의 특징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능입니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년 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장경왕후 약사(略史) : 장경왕후는 1491년(성종 22년)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나 중종 원년(1506년)에 궁궐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가 폐위(1506년)되자 다음해에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효혜공주와 인종(仁宗)을 두었는데, 바로 인종 출산후에 산후병으로 승하한 것입니다.{중종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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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 태릉(泰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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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 <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泰陵의 특징 :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文定王后 약사(略史) :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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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 효릉(孝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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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孝陵의 특징 :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仁宗(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인종(仁宗)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재 조성할 때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비공개 능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仁宗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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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45 |
1년 |
6월, 조광조(趙光祖)직(職)을 추복(追復) |
1545 |
1년 |
7월, 왕 승하 - 왕대비{문정왕후} 섭정 |
6월, 왕 병 위독하여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에게 전위 |
8월, 윤임(尹任)을 사사(賜死)함 <을사사화(乙巳士禍)> |
뒷 이야기 : 효성이 지극해서 능호(陵號)까지 효릉(孝陵)으로 정해진 인종(仁宗)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재위 기간의 운명이 생모(生母) 장경왕후(章敬王后;중종의 제1계비)의 삶과 유사하게 꽃을 펴보지도 못하고 요절(夭折)해 버린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가 권력을 잡은 후 인종의 외척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을 일으켜 더욱이 사후(死後)까지 않타까운 결과를 낳습니다.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는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로 태어나 11세 때 세자빈에 책봉되지만 왕비 재위 8개월만에 인종(仁宗)을 떠나 보내고 외롭게 여생을 보내다가 후사(後嗣)도 없이 64세의 나이[선조 10년]로 생을 마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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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 강릉(康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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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사 적 : 제 201 호
康陵의 특징 :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明宗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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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46 |
1년 |
7월, 서경덕(徐敬德) 사망{1489- } |
1555 |
10년 |
5월, 이윤경 왜적 대파 {을묘왜변} |
1548 |
3년 |
10월, 이황(李滉) 풍기군수(豊基郡守)됨 |
1556 |
11년 |
2월, 왜구 대비로 무과(武科) 실시 |
1550 |
5년 |
10월, <중종실록><인종실록> 완성 |
1557 |
12년 |
8월,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 행함 |
12월, 선(禪)교(敎)양종(兩宗)을 다시 둠 |
12월, 폐비 신씨{단경왕후}죽음{1487- } |
1551 |
6년 |
6월, 보우(普雨) 봉은사 주지 됨 |
1559 |
14년 |
3월, 황해도 의적(義賊)임꺽정 횡행 |
1552 |
7년 |
4월, 선과를 둠 |
1563 |
18년 |
9월, 왕세자 죽음 |
1553 |
8년 |
7월, 대왕대비 정치(政治) 왕에게 넘김 |
1565 |
20년 |
4월, 대왕대비{문정왕후} 승하{1501- } |
1554 |
9년 |
9월, 경복궁 중건 및 동궁(東宮)조성 |
6월, 제주목사(牧使) 보우 장살(杖殺) |
1555 |
10년 |
5월 전라도 달량포에 왜변(倭變) |
1567 |
22년 |
6월, 왕 승하-하성군 전위-왕대비 섭정 |
뒷 이야기 :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복형제(異服兄弟)의 왕위 계승이 이어진 것도 권력 암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명종과의 슬하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두었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明宗) 승하 후 중종(中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선조(宣祖)}이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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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 목릉(穆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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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穆陵의 특징 :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의 목릉은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목보호를 위해 관람을 제한해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습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와 모시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宣祖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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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68 |
1년 |
12월, 이황 <성학십도(聖學十圖)> 올림 |
1592 |
25년 |
4월, 신립 충주 전사, 왕 서행(西行) |
1569 |
2년 |
8월, 이이<동호문답(東湖問答)>올림 |
5월, 한양 함락, 6월, 평양 함락 |
1570 |
3년 |
12월, 이황(李滉) 죽음{1501- } |
7월,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 |
1571 |
4년 |
4월, <명종실록(明宗實錄)> 인쇄 |
1593 |
26년 |
2월, 권율 행주대첩(幸州大捷) |
1573 |
6년 |
12월, 교서관(校書館)에서 <향약(鄕約)>을 간행 |
8월,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됨 |
1574 |
7년 |
7월, 김효원 이조전랑(吏曹銓郞) 됨 |
10월, 환도(還都)함 |
10월, 예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둠 |
1594 |
27년 |
2월, 훈련도감(訓鍊都鑑) 설치 |
1575 |
8년 |
1월, 명종비[인순왕후]승하{1532-} |
12월, 속오군(束五軍) 편성함 |
7월, 심의겸.김효원 파당으로 동서 당론이 분열됨 |
1597 |
30년 |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 일어남 |
1577 |
10년 |
12월, 이이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지음 |
1월, 원균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 됨 |
1584 |
17년 |
1월, 이이(李珥) 죽음{1536- } |
1598 |
31년 |
11월, 노량에서 이순신 적의 수군을 대파하고 전사 |
1588 |
21년 |
12월, 일본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 요구 |
11월, 왜군 총철퇴, 왜란 끝남 |
1589 |
22년 |
10월, 정여립 모반하여 자결함 |
1602 |
35년 |
7월,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이룩 |
1591 |
24년 |
2년, 이순신 전라좌도수사(水使) 됨 |
1605 |
38년 |
3월, 홀란온 야인 동관(潼關)에 침입 |
1592 |
25년 |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남 |
1608 |
41년 |
2월, 왕 승하{1552- }, 광해군 즉위 |
뒷 이야기 :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습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으나, 조선 최대의 전란(戰亂)인 7년간의 임진(壬辰). 정유(丁酉) 왜란(倭亂)을 겪고 국토가 유린(蹂躪)되고 문화재(文化財)가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어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선조대(宣祖代)는 조선 중기의 정치 개념을 대변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패배주의적 민족성(民族性)을 날조한 당파싸움으로 잘못 평가되어온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등으로 붕당이 나뉘지만, 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을 겪은 후에 재야(在野)에서 서원(書院) 건립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정치의 구심(求心)을 잡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이 혼합된 형태의 정치 구조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정치의 기반이 지방 중소지주층(中小地主層)까지 확대된 형태이기에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해 나간 오히려 일당(一黨)의 독재(獨裁)가 아닌 붕당(朋黨)의 민주적인(?) 정치형태로의 진보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왕후 약사(略史)> 1555년[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난 의인왕후는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 약사(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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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광해군(光海君)과 부인 유씨(柳氏) - 광해군묘(光海君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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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승리 산59 사 적 : 제 363 호
光海君墓의 특징 :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이혼 ; 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고 일반인은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두 봉분(封墳)에 각각 비석(碑石)이 있고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그리고 문인석(文人石)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光海君代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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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09 |
1년 |
4월, 임해군(臨海君) 살해됨 |
1617 |
9년 |
8월, {선조실록(宣祖實錄)} 간행 |
8월, 창덕궁(昌德宮) 중수(重修) |
1618 |
10년 |
1월, 대비 호 깍아 서궁(西宮)이라 칭함 |
1610 |
2년 |
4월, 중궁 유씨(中宮柳氏) 왕비로 책봉 |
8월, 허균 등을 참형(斬刑) |
8월,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찬진 |
1619 |
11년 |
3월, 도원수 강홍립 금나라 군대에 항복 |
1614 |
6년 |
2월, 강화부사 영창대군(永昌大君) 죽임 |
1620 |
12년 |
7월, 금나라 10여명을 제외한 포로 석방 |
1615 |
7년 |
11월, 능창군 교동 안치(安置)후 죽임 |
1622 |
14년 |
1월, 승군(僧軍)을 모집케 함 |
1616 |
8년 |
12월, 일본에서 담배{南靈草) 들여옴 |
1623 |
인조 |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일어남 |
뒷 이야기 : 선조(宣祖)는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후궁이었던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생산해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단초(端初)가 되었습니다. 결국 선조는 승하 직전 당시 적자(嫡子)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되어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뒤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싹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전념했던 광해군은 창덕궁(昌德宮) 등 궁궐을 중수(重修)하고 대동법(大同法)도 실시했으며, 특히 그의 북방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싹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서 살해할 때,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이미 정도를 넘어선 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洗劍)의 유래를 낳기도 했던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포함한 반정군(反正軍)은 광해군을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로부터 능양군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반정을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天壽)를 다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살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인 유씨(柳氏)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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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 장릉(章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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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산 141-1 사 적 : 제 202 호
章陵의 특징 제16대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추존(追尊)된 元宗(이부:{定遠君}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 ; 1578-1626)의 章陵은 사후에 추숭(追崇)된 능이기에 쌍분(雙墳)의 형식으로 다소 소략하면서도 위풍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생략했으나 봉분 밑 부분에 얕은 보호석(保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大院君)의 묘제(墓制)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원종은 광해군대(光海君代)에 승하했는데, 인조 즉위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숭되어 현재 위치에 흥경원(興慶園)으로 조성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릉(仁獻王后陵)과 함께 장릉(章陵)으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개수(改修)를 한 것입니다. 1637년(인조 5년)에는 능원에 불이 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주변의 금정사(金井寺)는 장릉의 원찰(願刹)로 자리잡아 오고 있습니다.
추존의 약사(略史) 선조(宣祖)의 후궁들 중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에는 4명의 군(君)이 있었는데, 셋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됩니다.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기도 했던 정원군은 자신의 세 아들 중 능창군(綾昌君)을 신경희 등이 왕위에 추대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1615년(광해군 7년)} 능창군이 유배되어 사사(賜死)되는 일을 겪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1619년 40세의 나이로 승하해 양주군에 안장되었습니다. 3년 뒤 인조가 즉위한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하여 장릉(章陵)으로 천장해 왕릉의 규모로 자리잡게 됩니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는 좌찬성(左贊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태어나 3남{인조, 능원(綾原),능창(綾昌)군}을 두었으나 남편의 생존시에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등 불우하게 지내다가 인조의 즉위를 말년에 보면서 기쁨을 찾아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고 인조 10년{1623년)에 원종(元宗) 추존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으나 역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정원군(定遠君)과 함께 추존되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시호를 받게 됩니다.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너무 늦게 탄생한 것이 권력의 혼란을 야기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대의 역사는 내적 모순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필요불가결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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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 장릉(長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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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사 적 : 제 203 호
長陵의 특징 仁祖(이종 ; 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長陵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후 곁에 인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영조(英祖)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은 합장릉으로 천장(遷葬)할 때 다시 만들어졌고,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의 화문(花紋)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仁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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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23 |
1년 |
6월, 광해군의 폐세자를 사사(賜死) |
1640 |
18년 |
3월, 세자 심양에서 돌아옴 |
1624 |
2년 |
1월, 부원수(副元帥)이괄(李适)반란 |
12월, 김상헌(金尙憲) 청으로 잡혀감 |
2월, 왕 공주(公州)로 피신 |
1641 |
19년 |
2월, 선조실록(宣祖實錄) 개수케 함 |
1625 |
3년 |
1월, 원자(소현세자)를 왕세자 책봉 |
7월, 광해군 제주에서 죽음{1575- } |
1627 |
5년 |
1월,정묘호란(丁卯胡亂), 왕 강화 피신 |
1645 |
23년 |
1월, 세자 심양에서 돌아옴 |
3월, 후금(後金)과 화약(和約) |
2월, 김상헌 돌아옴 |
1628 |
6년 |
12월, 강화 마니산 사고(史庫) 설치 |
4월, 소현세자 죽음{1612- } |
1632 |
10년 |
5월, 정원군 원종(元宗)으로 추존 |
5월, 봉림대군 돌아옴, 세자 책봉 |
6월, 대왕대비(인목왕후) 승하{1542- } |
1646 |
24년 |
3월, 소현세자빈 강씨(姜氏) 사사(賜死) |
1635 |
13년 |
12월, 왕비 한씨(韓氏)승하{1594- } |
1647 |
25년 |
5월, 소현세자 세아들 제주로 귀양 |
1636 |
14년 |
12월, 병자호란, 왕 남한산성 피신 |
1649 |
27년 |
5월, 왕 승하{1595- }, 세자 즉위 |
1637 |
15년 |
1월, 삼전도에서 청태종(太宗)에 항복 |
10월, 선조개수실록 이룩됨 |
1638 |
16년 |
12월, 조창원의 딸 왕비 책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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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선조대(宣祖代)의 국가적 치욕을 겪은 후에 또 다시 외적(外敵)으로 인해 몽진(蒙塵)과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의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에 반정 세력들의 힘을 거부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까지 피신을 했고,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으로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胡亂)의 치욕을 당하는 등 권력의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은 폐해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1627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3만여 군사들에게 한양(漢陽)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는 자신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며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어 화의했고, 또 다시 1636년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관계로까지 변화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굴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외교적 수단을 발휘한 광해군대(光海君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태어나, 1610년 인조가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혼례를 올렸다가 반정(反正) 후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平大君), 용성대군(龍成大君)의 4남을 두었는데, 용성대군 생산 후에 일종의 산후병으로 42세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역시 청(淸)나라의 볼모를 끝내고 돌아온 직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인조는 다음 세자로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정해 다음 대(代)의 효종(孝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합니다.
삼전도(三田渡)에서의 굴욕의 항복, 두 왕자{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와 척화파(斥和派) 삼학사(三學士 ; 오달제,윤집,홍익한) 등을 볼모와 포로로 내어주고, 심지어 청(淸)의 요구에 의해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우는 등 굴욕의 예를 계속한 인조(仁祖)였기에 임란(壬亂) 이후 변화되는 세계 정세를 적극 대처하지 못한 조선조의 안타까움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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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 휘릉(徽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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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徽陵의 특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莊烈王后 약사(略史)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 2년(1624년)에 태어난 장렬왕후(莊烈王后)는 열다섯 살의 나이{1638년, 인조 16년}로 인조의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용성대군(龍成大君)을 낳은 후 승하하자 계비(繼妃)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습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喪){1659년}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년)의 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喪){1674년, 현종15년}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과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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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 영릉(寧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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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사 적 : 제 195 호
寧陵의 특징 孝宗(이호 ; 1619-1659, 제위 10년)과 비(妃)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 ; 1618-1674)의 寧陵은 바로 근처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영릉(英陵)을 이웃하고 있어 위치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도 세종, 효종과의 200여년간의 시공(時空)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삼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석물(石物)들을 별도로 제작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는 영릉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는데, 두 릉의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인선왕후릉}뒤{효종릉}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 연유는 본래 영릉(寧陵)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소재의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는데,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風水說)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효종(孝宗)의 릉에만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石物)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봉분(封墳) 모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孝宗대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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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50 |
1년 |
3월, 청 사신 종실(宗室)의 여자를 선출 |
1654 |
5년 |
7월, 변급 등 청과 함께 러시아군 격파 |
1651 |
2년 |
12월, 인조 후궁 귀인 조씨 사사(賜死) |
1658 |
9년 |
6월, 이순신의 묘갈(墓碣)을 세우도록 함 |
1652 |
3년 |
9월, 홍만종 <시화총림(詩話叢林> 편찬 |
1659 |
10년 |
5월, 왕 승하{1519- } |
1653 |
4년 |
7월, 인조실록(仁祖實錄) 완성 |
10월,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기년제(朞年制)로 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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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제주에 만선(蠻船:하멜 일행) 표착 |
뒷 이야기 인조(仁祖)의 둘째{봉림대군}로 태어나 8년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보낸 효종은 귀국 후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죽음으로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굴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의 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고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끝내 북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승하해 버렸던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효종 재위 시절에는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성과를 올렸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역법(曆法)으로 새로운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숙원이었던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운 생을 보냈습니다. 청나라의 힐책(詰責)으로 북벌 의지를 잠시 접어두면서도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청(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한 것을 보면 북벌(北伐)의 의지는 효종의 지상목표이자 국가 숙원사업이었던 것입니다.
인선왕후 장씨(張氏)는 우의정(右議政)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광해군 10년(1618)에 태어나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있으면서 현종(顯宗)을 생산하고 내조를 하다가 효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효종 승하후 왕대비로 지내다가 57세의 나이로 현종(顯宗) 15년(1674)에 승하했습니다. 슬하에 현종과 다섯 공주를 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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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 숭릉(崇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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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崇陵의 특징 顯宗{이연; 1641-1674, 재위 15년}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ㅅ'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입니다.
합각지붕 정자각 맞배지붕 정자각
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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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60 |
1년 |
3월, 남인 서인간의 예론(禮論)이 벌어짐 |
1667 |
8년 |
1월, 왕세자{숙종} 책봉 |
5월, 왕 기년{만1년} 복제를 정함 |
1668 |
9년 |
8월, 동철(銅鐵)로 실록자(實錄字) 주조함 |
1661 |
2년 |
7월, 왕비 김씨 책봉. <효종실록> 편찬 |
1669 |
10년 |
1월, 송시열 건의로 동성결혼 금함 |
1663 |
4년 |
3월, 전국적으로 유행성 열병 만연 |
1670 |
11년 |
10월, 고려 태조릉 개수하고 수직군 둠 |
1665 |
6년 |
4월, 왕 온양온천(溫陽溫泉) 감 |
1674 |
15년 |
2월, 왕대비{효종 비} 장씨 승하{1618 - } |
1666 |
7년 |
3월, 경상도 유생 송시열 복제반대 상소 |
8월, 왕 승하{1641 - }. 왕세자 즉위 |
뒷 이야기 이역(異域) 땅 청(淸)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아들로 태어난 현종(顯宗)은 귀국{1645년} 후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고, 1659년에 효종을 이어 조선조 18대 왕위에 등극(登極)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유업(遺業)인 북벌(北伐) 계획을 성취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대명숭향(大明崇向)의 경향만 현저하게 되었고, 34세{1674년}의 젊은 나이에 15년의 왕위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국내 정세에서도 즉위 초부터 조대비(趙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인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2차에 걸친 당쟁(黨爭)의 결과 많은 유신(儒臣)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재위 기간의 내치(內治)로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고, 1668년에 동철(銅鐵)활자 10만여자를 주조했으며,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종의 뒤를 이었던 숙종대(肅宗代)에 편찬된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南人) 집권기의 1차 실록을 1683년 서인(西人) 집권기 때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다시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불안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태어나 1651년{효종 2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옵니다. 슬하에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公主; 명선(明善), 명혜(明惠), 명안(明安))을 두었는데, 42세{1683년 숙종 9년}의 나이에 창경궁에서 승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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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肅宗)과 계비(繼妃)인현왕후(仁顯王后),인원왕후(仁元王后)-명릉(明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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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明陵의 특징 肅宗{이순; 1661-1720, 재위46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金氏; 1687-1757)의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됩니다. 숙종 6년{1680년}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입니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과 그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인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을 조성하면서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고 자신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면서 석물(石物)들도 거의 실물의 크기와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습니다.
肅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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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76 |
2년 |
11월, 흰옷{白衣}의 착용을 금함 |
1698 |
24년 |
11월, 노산대군 단종(端宗)으로 복위 |
1677 |
3년 |
9월, <현종실록(顯宗實錄)> 이룩됨 |
1701 |
27년 |
8월, 인현왕후 죽음{1667- } |
1680 |
6년 |
10월, 왕비{인경왕후}김씨 죽음{1661-} |
10월, 빈어(嬪御)를 비(妃)에 못 오르게 함 |
1683 |
9년 |
3월, <개수현종실록(改修-)> 이룩됨 |
11월, 무고의 옥 일어남/장희빈 사사(賜死) |
1688 |
14년 |
8월, 대왕대비{장렬왕후}죽음{1624-} |
1704 |
30년 |
11월, 노산군일기 <단종실록>으로 고침 |
1689 |
15년 |
2월, 기사환국 일어남/ 장씨 희빈됨 |
12월, 명나라 신종의 대보단 이룩됨 |
7월, 인현왕후 폐함/송시열 사사(賜死) |
1705 |
31년 |
3월, 왕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신종 제사 |
1690 |
16년 |
6월, 원자를 왕세자{경종}로 함 |
1707 |
33년 |
4월, 홍역 전국 만연, 사망자 속출 |
10월, 희빈 장씨(張氏) 왕비로 책봉 |
1712 |
38년 |
5월,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세움 |
1691 |
17년 |
12월, 성삼문 등사육신(死六臣)복위 |
1714 |
40년 |
1월, 전국에 지진(地震) 일어남 |
1694 |
20년 |
3월, 갑술옥사(甲戌獄事) 일어남 |
1717 |
43년 |
11월, 전국 호수 547,709호 인구 6,829,771명 |
4월, 폐비 민씨 복위/장 희빈 강등 |
1718 |
44년 |
4월, 소현세자빈 강씨 복위 |
9월, 숙의 최씨 왕자{영조} 생산 |
1720 |
45년 |
6월, 왕 승하{1661- }, 왕세자 즉위 |
뒷 이야기 재위 46년간 내환(內患)과 사건이 많았던 숙종대는 경신년(庚申年)의 대출척(大黜陟),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옥사(甲戌獄事) 등의 당쟁(黨爭)의 격화가 많았지만, 한편으로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맞이하는 초석(礎石)을 다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곧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 실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 군제 개편 등의 치적(治績)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슬하의 왕자(王子)가 모두 후궁들에게서 생산되었으니, 경종(景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영조(英祖)는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생산합니다.
仁顯王后 민씨(閔氏) 약사(略史) 1667년{현종 8년} 여흥(驪興) 민씨 양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태어난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뒤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繼妃)가 됩니다. 궁중(宮中)의 염정애사(艶情哀史)로 알려진 내간체(內簡體) 소설(小說) <인현왕후전>으로 유명하듯이 희빈(禧嬪) 장씨(張氏)와의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옥사(甲戌獄事)의 와중에서 폐위(廢位)와 복위(復位)를 하는 등의 곡절을 겪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합니다.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淸楚)했지만 슬하에 소생은 없었습니다.
仁元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687년{숙종 13년} 경주(慶州)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태어난 인원왕후는 1701년 인현왕후 승하후 다음해{숙종 28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1713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를 받습니다. 영조대(英祖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다가 1757년{영조 33년}에 71세의 나이로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해 명릉에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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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의 비(妃) 인경왕후(仁敬王后) - 익릉(翼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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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翼陵의 특징 숙종의 비(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익릉은 숙종이 왕릉을 간소화하라는 명(命)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석물(石物)들의 크기도 명릉(明陵)에 비해 크고 장명등(長明燈) 역시 팔각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仁敬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661년{현종 2년} 광주(光州) 김씨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태어난 인경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進封)됩니다. 숙종과의 슬하에 두 공주(公主)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왕비 역시 20세의 나이에 천연두(天然痘) 증세로 요절(夭折)하고 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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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 의릉(懿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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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5 사 적 : 제 204 호
懿陵의 특징 景宗{이균; 1688-1724, 재위 4년}과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 1705-1730)의 의릉은 쌍릉(雙陵)의 형식이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좌우로 나란한 봉분 조성이 아니라 앞뒤로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여주(驪州)에 있는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경종의 의릉은 영릉보다 더 정확하게 앞뒤로 조성되어 정자각(丁字閣)에 보았을 때 앞의 능은 선의왕후릉이고 뒤의 능은 경종의 능입니다. 경종의 능에만 뒤에 곡장(曲墻)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숙종의 명릉(明陵)에 이어 역시 왜소한 석물(石物)들과 사각(四角)의 장명등이 특이합니다.
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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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721 |
1년 |
8월, 왕제(王第) 연잉군 세자 책봉 |
1723 |
3년 |
5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소화기) 만듬 |
12월, 김창집 등 4대신 귀양{신축옥사} |
10월, 남구만 <약천집(藥泉集)> 간행 |
1722 |
2년 |
3월,목호룡 상언으로 대옥사{임인옥사} |
1724 |
4년 |
8월, 왕 승하{1688- } 세자 즉위 |
뒷 이야기 장희빈(張禧嬪)의 아들로 유명한 경종은 33세의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르지만, 평소 병이 많아 불과 4년 밖에 재위에 있지 못한 비운(非運)의 국왕이었습니다. 신축옥사(辛丑獄事)과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노론(老論) 세력이 대거 축출되고 소론(小論) 세력이 집권했던 신임사화(辛壬士禍)가 격렬하게 진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병약(病弱)한 경종은 즉위 원년에 후사가 없을 것으로 예측되니 이복동생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소생(所生) 연잉군{영조}을 세자(世子)로 책봉해야 한다는 노론의 의견을 따라할 정도였습니다.
宣懿王后 어씨(魚氏) 약사(略史) 1705년{숙종 31년} 함종(咸從) 어씨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태어난 선의왕후는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1722년{경종 2년}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영조 즉위 후 대비(大妃)로 지내다가 26세의 나이{영조 6년}로 요절합니다.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역시 슬하(膝下)에 자식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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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의 비(妃) 단의왕후(端懿王后) - 혜릉(惠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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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惠陵의 특징 경종(景宗) 즉위 후 추존(追尊)된 정비(正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 1686-1718)의 혜릉은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紅--門)을 근래에 다시 고증(考證)을 통해 복원해서 주변의 다른 능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작은 석물(石物)들 등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특이하게 능의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봉분은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으며, 난간석에는 12지수(十二支獸)가 새겨져 있습니다.
端懿王后 심씨(沈氏) 약사(略史) 1686년{숙종 12년} 청송(靑松) 심씨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태어난 단의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33세의 나이{숙종 44년}로 슬하에 소생없이 생을 마감합니다. 경종 즉위 후 왕후에 추봉(追封)되고 1726년{영조 2년}에 휘호(徽號) 공효정목(恭孝定穆)을 추상(追上)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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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 원릉(元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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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元陵의 특징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英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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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725 |
1년 |
1월, 왕 붕당의 폐해를 하교(下敎) |
1750 |
26년 |
7월, 양역(良役) 반감, 균역청 설치 |
3월, 4대신 등의 관직 회복 |
1752 |
28년 |
9월, 왕손(王孫;정조) 탄생 |
1726 |
2년 |
12월, 전국 호수1,614,598호 인구6,994,400명 |
1755 |
31년 |
2월, 나주 괘서(掛書)사건, 범인 윤지 죽임 |
1728 |
4년 |
11월, 효장세자{진종} 죽음{1719- } |
1757 |
33년 |
2월, 왕비 서씨{정성왕후} 죽음{1692- } |
11월, <숙종실록(肅宗實錄)> 이룩됨 |
3월, 대왕대비{숙종 비}죽음{1687-} |
1730 |
6년 |
5월, 수어청(守禦廳)에서 총(銃)을 만듬 |
1758 |
34년 |
10월, 황해.강원도 지방 천주교 크게 보급 |
6월, 대비 어씨{경종 계비}죽음{1705- } |
1761 |
37년 |
4월, 세자 몰래 관서(關西)에 다녀옴 |
1732 |
8년 |
2월, 관상감 청(淸) 만세력(萬歲曆) 가져옴 |
1762 |
38년 |
윤5월, 세자 폐하고 궤에 가둬 아사 |
2월, <경종실록(景宗實錄)> 이룩됨 |
윤5월, 세자 호 회복, 사도(思悼)시호 내림 |
3월, 현종때 만든 혼천의(渾天儀) 수리 |
1763 |
39년 |
12월, 일본통신사 조엄 고구마 종자 보냄 |
1733 |
9년 |
1월, 전국에 금주령(禁酒令) 내림 |
1764 |
40년 |
2월, 왕세손{정조} 효장세자 후사로 입적 |
1735 |
11년 |
1월, 원자{장헌세자}출생{ -1762} |
1770 |
46년 |
8월, 신간<동국문헌비고>100권 이룩 |
1737 |
13년 |
11월, 안동(安東) 석빙고(石氷庫) 둠 |
1772 |
48년 |
8월, 서자(庶子)를 등용케 함 |
1738 |
14년 |
8월,백의를 금하고 청의(靑衣)를 입게함 |
8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 문에 걸게함 |
1741 |
17년 |
9월, 난전(亂廛)을 엄금하게 함 |
1775 |
51년 |
12월, 왕세손에게 정사(政事)를 듣게 함 |
1742 |
18년 |
3월, 탕평비 반수교(半水橋)에 세움 |
1776 |
52년 |
3월, 왕 승하{1694- }/ 왕세손{정조}즉위 |
1744 |
20년 |
8월,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 |
3월, 효장세자(孝章世子) 추숭(追崇)하여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함 |
1747 |
23년 |
3월, 사육신 묘비(墓碑) 노량에 세움 |
1749 |
25년 |
12월, 전염병 전국 만연, 사망 속출 |
3월, 사도세자를 장헌(莊獻)세자로 함 |
뒷 이야기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됩니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을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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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의 비(妃) 정성왕후(貞聖王后) - 홍릉(弘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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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弘陵의 특징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입니다.
貞聖王后 서씨(徐氏) 약사(略史) 1692년{숙종 18년} 달성(達城) 서씨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肅宗)의 네 번째 왕자였던 연잉군{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夫人)에 봉해졌고, 세자빈(世子嬪)에 이어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66세의 생을 살았지만 슬하(膝下)에 소생없이 1757년{영조 33년}에 승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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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追尊) 진종(眞宗)과 妃 효순왕후(孝純王后) - 영릉(永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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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1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永陵의 특징 : 영조(英祖)의 장자(長子)이자 정조(正祖)의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었던 추존왕 眞宗(이행; 1719 - 1728)과 비(妃)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 ; 1715 - 1751)를 모신 능이 영릉(永陵)입니다. 영릉은 본래 슬하에 소생없이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세자와 세자빈의 예(禮)로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음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마저 폐위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할 때, 영조는 왕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왕세손[정조(正祖)]이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묘 역시 왕릉으로 승격해서 영릉(永陵)으로 격상됩니다.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은 세자묘의 예에 따라 이루어졌다가 왕릉으로 추숭(追崇)되었기에 간촐하게 상설(常設)되었습니다. 능원의 구조는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모두 봉분(封墳)에서 생략되었고, 석물(石物)들도 석호(石虎), 석양(石羊) 한 쌍씩이며, 무인석(武人石) 없이 문인석(文人石)만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능침(陵寢) 아래의 정자각(丁字閣)이 파손되어 기공석(起工石)만 남아있는 것인데, 이러한 홰손된 문화재를 보면서 진정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의 보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章世子 - 眞宗} :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난[숙종 45년]진종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니 그때 나이가 7세였습니다. 하지만 영조(英祖)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3년 뒤[영조 4년]에 승하합니다. 불과 10세였습니다. 영조의 부정(父情)은 세자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왕세손{正祖}에게 유언처럼 남긴 것이 효장세자의 추존(追尊)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지만, 정조(正祖)에게는 진종보다 친부(親父)였던 장조(莊祖[사도세자])에 대한 정성이 지극할 수밖에 없었기에 다소 영릉(永陵)에 대한 호위(護衛 )가 소원(疎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孝純王后 趙氏} : 풍양조씨(豊壤趙氏)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태어난[숙종 41년] 효순왕후는 영조 3년에 13살의 나이로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가 승하(昇遐)하여 안타까운 생을 보내다가 역시 37세의 나이로[영조 27년]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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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追尊) 장조(莊祖)와 妃 헌경왕후(獻敬王后) - 융릉(隆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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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융건릉(隆健陵) 소재} 사 적 : 제 206 호
隆陵의 특징 : 조선조 최고 비극(悲劇)의 세자인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莊祖)] - 이선 ; 1735 - 1761)와 비(妃)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 헌경왕후(獻敬王后) ; 1735 - 1815)의 융릉은 처음에 비극의 죽음을 맞은 세자를 양주군(陽州郡)에 장사지내고 수은묘(垂恩墓)로 명명했었는데, 정조(正祖) 즉위 후 영우원(永佑園)으로 추상(推上)하고 1789년에 수원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改稱)합니다. 현재의 융릉(隆陵) 추숭(追崇)은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장조의 직계 4대 후손인 고종(高宗)에 의해 융릉으로 추존된 것이고, 시호(諡號), 묘호(廟號) 역시 영조(英祖)가 내린 사도세자(思悼世子)에서 정조가 추숭한 장헌세자(莊獻世子)로, 그리고 고종(高宗) 대에 추숭된 장종(莊宗), 또 장조(莊祖)로 추상됩니다. 능역(陵域)의 상설(常設)은 현 위치로 천장(遷葬)할 때, 세자묘(世子墓)로 조성됨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의 의지에 따라 웅장하고 장엄하고 조성되었습니다.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 꽃부리 모양의 봉분인석(封墳引石), 문인석 외에 무인석(武人石)의 추가 설치, 정자각(丁字閣) 앞의 넓은 박석(薄石)의 참도(參道)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思悼世子 - 莊祖} : 영조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슬하에서 태어난[영조 11년] 장조(莊祖)는 이복(異腹)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한 후인 영조(英祖) 춘추 44세에 태어났기에 왕세자 책봉(冊封)이 2세때 이루어집니다.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했던 세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칭송을 받았지만 영조 25년[1749년]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대리기무(代理機務)을 시작하면서부터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무고(誣告)와 난행(亂行), 광포한 행동으로 인해 참혹하게 뒤주안에서 죽음을 맞는 비극을 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파(黨派)의 내면에 잠복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알력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비극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많습니다. 생부(生父)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正祖)였기에 특히 세자의 사후에 장조(莊祖)로의 추존(追尊) 과정을 보면, 아들을 자신의 명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영조(英祖)도 후회의 회한(悔恨)으로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며 애절하기까지 했던 정조(正祖)의 선친에 대한 정성, 고종대(高宗代)에서의 장종(莊宗), 장조(莊祖) 추존까지 사도세자에 대한 약사(略史)가 그의 애절한 일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獻敬王后 - 惠慶宮洪氏} : 풍산홍씨(豊山洪氏)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영조 11년[1735년]에 탄생한 헌경왕후는 영조 20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사도세자 사후 혜빈(惠嬪)으로 있다가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 혜경궁(惠慶宮)의 궁호(宮號)를 받아 여생을 보내다가 순조 15년 81세의 춘추로 승하해 현륭원(顯隆園)에 합장(合葬)됩니다. 특히 헌경왕후는 궁중(宮中)의 비화(悲話)를 그린 자서전적(自敍傳的) 회고록(懷古錄), 곧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인한 한(恨) 많은 자신의 일생을 사소설체(私小說體)로 다룬 <한중록(恨中錄)>을 남겨,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함께 궁중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어 지금까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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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 - 건릉(健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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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隆健陵 소재} 사 적 : 제 206 호
健陵의 특징 : 正祖(이성 ; 1752 - 1800, 재위 24년, 본래 시호(諡號)가 정종(正宗)이었으나 고종대[광무3년, 1899년]에 정조(正祖)로 추존됨)와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 1753 - 1821)의 건릉은 본래 정조(正祖) 승하 후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릉원(顯陵園; 후에 장조(莊祖) 융릉(隆陵)으로 개칭) 동쪽에 안장(安葬)되고자 했던 유언에 따랐으나 풍수학(風水學)으로 나쁘다고 해서 천장(遷葬)의 논의가 있던 차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순조 21년]하자 현재의 위치인 융릉(隆陵) 서쪽으로 이장(移葬)하고 함께 합장(合葬)을 하게 됩니다. 능제(陵制)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돌리고 상석(床石) 하나에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인석(文武人石)과 수석(獸石: 석호(石虎),석양(石羊),석마(石馬))들은 왕릉(王陵)의 예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특히 정자각(丁字閣) 앞의 참도(參道)가 넓게 박석(薄石)으로 깔려있는 모습은 정조(正祖)의 업적을 느끼게 하는 웅장함이 있습니다.
正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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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777 |
1년 |
9월, 성중(城中)의 무격(巫覡)을 축출함 |
1787 |
11년 |
2월, 박준원의 딸 빈[수빈]으로 함 |
10월, <경종실록> 개수케 함 |
1790 |
14년 |
3월, 정약용 해미현으로 유배 |
1778 |
2년 |
6월, 홍국영의 누이를 빈(嬪)으로 함 |
6월, 원자[순조] 출생 |
12월, 박제가 북학의(北學議) 편찬 |
1792 |
16년 |
6월, 내각에 목활자[生生字] 만들게 함 |
1779 |
3년 |
5월, 원빈(元嬪) 홍씨(洪氏) 죽음 |
1794 |
18년 |
9월, 광해군의 사초를 수정시킴 |
1781 |
5년 |
4월, 홍국영 죽음 |
12월, 청나라 주문모 신부 밀입국 상경 |
7월, <영조실록>,<경종개수실록> 완성 |
1795 |
19년 |
7월, 이승훈 예산현에 유배 |
1782 |
6년 |
2월, 외규장각(外奎章閣) 이룩됨 |
1796 |
20년 |
8월, 착공 2년만에 수원부성[華城] 완성 |
1783 |
7년 |
1월, 중의 도성(都城) 출입을 금함 |
1797 |
21년 |
6월, 정약용 서학으로 승지 사직 상소 |
1784 |
8년 |
3월, 이승훈 연경에서 서교(西敎)책 반입 |
1799 |
23년 |
3월, 박지원 농업서인 <과농소초> 올림 |
7월, 원자 (元子) 왕세자로 책봉 |
1800 |
24년 |
1월, 원자 왕세자 책봉 |
1785 |
9년 |
2월, 제주도 삼성묘(三姓廟) 사액(賜額) |
6월, 왕 승하 {1752- } |
1786 |
10년 |
5월, 왕세자 죽음 |
7월, 왕세자 즉위[순조] |
10월, 전국인구 7,526,696명 |
7월, 대왕대비[정순왕후] 수렴청정함 |
뒷 이야기 : 조부(祖父)였던 영조(英祖)의 대를 이어 25세의 왕성한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른 정조(正祖)는 18세기를 마감하는 24년간의 재위(在位) 기간 동안 선왕(先王)인 영조가 마련한 중흥기(中興期)를 완성시키는 많은 업적을 이룹니다. 즉위 직후부터 선왕의 뜻을 이어 왕실(王室)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할 정도로 탕평정치(蕩平政治)를 계승해서 행하고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왕실(王室) 연구기관(硏究機關)으로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했으며,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서적을 간행(刊行)합니다. 특히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은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근대(近代)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루었으나,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의 수입을 막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이 어느 정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왕조(王朝)의 지배 질서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됨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반발을 야기(惹起)시키는데, 정조(正朝) 승하 후 순조(純祖)의 즉위와 함께 단행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커다란 반격을 가한 보수 세도(勢道) 정권이 이후 60여년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와 함께 조선조 후기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를 이룬 정조(正祖) 자신의 심정은 친부(親父)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참혹한 화난(禍難)에 대한 원한(怨恨)으로 인해 평생 우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으로 옮기고 매년 배알(拜謁) 행차를 하며, 왕조 초기의 도성(都城) 축성, 흥선대원군 시절의 경복궁(景福宮) 재건(再建)과 함께 조선 3대 토목공사(土木工事)로 일컬어지는 수원성[화성(華城)]을 축조하고 소경(小京:제2도읍지)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일들이 실제 생부(生父)에 대한 단순한 회한(悔恨)의 발로(發露)라기 보다는 개혁의지가 강했던 정조의 보수세력 견제와 실학적(實學的) 정치세력의 추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후사(後嗣)가 없이 요절(夭折)한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의 형)의 계통을 이어 양자(養子)로 올려지게 되어 즉위 후에 효장세자를 추존(追尊)해 진종(眞宗)으로 올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는 정조(正祖) 당대에는 추존이 되지 못하고 고종대(高宗代)에 가서야 장조(莊祖)로 추숭(追崇)됩니다.
孝懿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는 영조(英祖) 29년에 명문가(名文家)인 청풍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에 당시 왕세손(王世孫)이었던 정조(正祖)의 빈(嬪)이 되었다가 1776년 정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책봉됩니다.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겸손하여 조모(祖母)격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혜경궁(惠慶宮) 혜빈홍씨(惠嬪洪氏)를 극진히 섬겨 궁궐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슬하(膝下)에 소생(蘇生)이 없이 안타까운 생을 보내지만 기꺼이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을 원자(元子: 순조)로 삼게 됩니다.[정조 14년, 1790년] 그 후 순조(純祖) 21년까지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69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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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순조(純祖)와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 - 인릉(仁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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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仁陵의 특징 : 純祖(이공 : 1790 - 1834, 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 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재의 위치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合葬)되었습니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입니다.
純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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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801 |
1년 |
1월, 대왕대비[정순왕후] 천주교 금함 |
1818 |
18년 |
8월, 정약용 강진에서 유배 해제 |
2월, 신유사옥(辛酉邪獄) 일어남 |
1819 |
19년 |
윤4월, 김정희 문과에 급제 |
1802 |
2년 |
8월, 하늘에 일식 현상이 일어남 |
8월, 조만영의 딸 세자빈 책봉 |
10월,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왕비 책봉 |
1821 |
21년 |
3월, 왕대비 김씨 승하[1753 - ] |
1804 |
4년 |
1월, 대왕대비 수렴청정을 그침 |
1823 |
23년 |
7월, 유생들 만인소 올려 서얼 임용 요청 |
1805 |
5년 |
1월, 대왕대비 승하{1745 - } |
1826 |
26년 |
6월, 지진(地震)이 발생함 |
8월, <정조실록(正祖實錄)> 완성 |
1827 |
27년 |
2월, 왕세자 대리청정(代理聽政)함 |
1808 |
8년 |
1월, 북청,서천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남 |
1828 |
28년 |
12월, 전국 호구(戶口)조사 실시 |
1809 |
9년 |
8월, 원자[익종] 탄생 |
1830 |
30년 |
5월, 정약용 승지에 복귀, 왕세자 병사 |
1811 |
11년 |
12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5월, 왕세자{익종} 병사 |
1812 |
12년 |
4월, 관군 정주성 수복, 난 진압 |
1833 |
33년 |
3월, 한양 쌀값 폭등으로 곡물전 습격 |
1815 |
15년 |
6월, 경상도 천주교도 300여명 검거 |
1834 |
34년 |
11월, 왕 승하{1790 - } |
12월, 혜경궁 홍씨 승하{1735 - } |
11월, 왕세손{헌종} 즉위 |
1817 |
17년 |
6월,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발견 |
11월, 대왕대비[순원왕후] 수렴청정함 |
뒷 이야기 순조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박준원(朴準源)의 딸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인데,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하자 순조를 세자(世子)로 책봉합니다. 그런데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을 대신한 증조모(曾祖母) 대왕대비(大王大妃: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순조대(純祖代)입니다.
순조는 정조 14년인 1790년에 태어나 1800년에 왕위에 올랐고 34년을 재위(在位)하고 1834년에 승하합니다. 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킵니다. 천주교 금지를 명분(名分)으로 천주교도들은 물론이고 정약용(丁若鏞) 형제,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의 남인계 시파와 자수한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을 비롯한 300여명을 살해하고 유배시킵니다. 결국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순조 재위 시절에 몇 차례의 천주교 탄압은 세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되어 이 후 헌종(憲宗) 때의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 고종(高宗) 때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으로 이어져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수단이 됩니다. 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국가 권력 구조가 의정부(議政府)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넘어가고 그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이어 안동김씨 정권 말기 철종 대의 임술민란(壬戌民亂)이나 고종 대의 동학운동(東學運動)으로 일어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국가 위기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순원왕후 김씨 약사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태어난[정조 13년] 순원왕후는 왕비로 책봉[순조 2년]되고 난 후 철종(哲宗) 대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정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특히 철종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과 철종의 왕비 간택(揀擇)에도 자신의 집안 사람{김문근의 딸 철인왕후(哲仁王后)}을 성사시킴으로 해서 그녀는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슬하(膝下)에 2남{효명세자[익종], 차남 요절} 3녀{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철종 8년에 승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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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익종(翼宗)[문조(文祖)]와 비(妃) 신정왕후(神貞王后) - 수릉(綏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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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綏陵의 특징 :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추존왕(追尊王) 翼宗(이영 : 1809 - 1830)과 비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 : 1808 - 1890)의 수릉은 몇 차례 능지(陵地)가 옮겨지다가 현 동구릉(東九陵) 경내(境內)로 자리잡습니다. 세자(世子) 때 승하{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한 익종(翼宗)은 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를 모신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의릉(懿陵) 옆에 자리잡았는데, 헌종 12년[1846년]에 길지(吉地)로 옮기자는 논의에 따라 양주군(陽州郡) 용마산(龍馬山) 기슭으로 천장(遷葬)합니다. 그 후 철종(哲宗) 6년[1855년]에 현 위치인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옆으로 다시 천장을 하면서 동구릉의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이 되었고, 이로 인해 東九陵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됩니다. 문조(文祖)라는 시호로 많이 불리는 것은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에 황제(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라 칭한 것에 연유합니다. 22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익종(翼宗)과는 달리 83세의 장수(長壽)와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고종(高宗) 27년에 승하해 수릉(綏陵)에 합장(合葬)을 합니다.
추존(追尊)의 약사(略史) {孝明世子 - 翼宗[文祖]} :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익종(翼宗)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의 슬하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습니다. 4세 때[순조 12년]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효명(孝明)의 시호(諡號)를 받고 1827년[순조 27년]에 왕명(王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데, 민정(民政)에 힘써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고 형벌(刑罰)을 삼가는 등 적극적인 왕권(王權)의 강화에 힘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하고 맙니다. 결국 다시 세도정권(勢道政權)의 힘이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神貞王后 趙氏} : 풍양조씨(豊壤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郡)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난[순조 8년] 신정왕후(神貞王后趙氏)는 순조 19년[1819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슬하에 헌종(憲宗)을 생산합니다. 신정왕후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냈지만, 그 보다는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마친 일생이 더욱 화려하다 할 것입니다.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1857년, 철종 8년]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입니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의 후계자 결정에 권한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인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합니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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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헌종(憲宗)과 비(妃)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 경릉(景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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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景陵의 특징 : 憲宗(이환 : 1827 - 1849, 재위 15년)과 정비(正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28 - 1843),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 1831 - 1904)를 모신 경릉은 조선조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의 변형인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왕과 정비, 계비의 순으로 배치된 경릉은 각 봉분 앞에 상석(床石)만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여타(餘他)의 석물(石物)들은 단릉(單陵)의 상설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동구릉(東九陵) 소재 9개의 능으로 논할 때 조성 시기로는 추존(追尊)된 익종(翼宗:[문조])의 유릉(綏陵)이 마지막이지만 세가(世家) 계통(繼統)으로는 익종의 아들인 헌종의 경릉이 마지막이 됩니다.
憲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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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835 |
1년 |
8월, 전국에 호구(戶口)조사 실시 |
1840 |
6년 |
12월, 영국배 제주도에 들어와 소를 약탈 |
1836 |
2년 |
2월, 정약용(丁若鏞) 죽음{1762- } |
1841 |
7년 |
1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함 |
4월, 김정희 성균관대사성이 됨. |
1843 |
9년 |
8월, 왕비 김씨 승하{1828 - } |
1837 |
3년 |
2월, 김조근의 딸{효현왕후}왕비 책봉 |
1845 |
11년 |
6월, 영국 군함 제주,전라 해안 측량 |
1838 |
4년 |
윤4월, <순조실록(純祖實錄)> 이룩됨 |
1846 |
12년 |
윤5월, 유릉(綏陵)을 [동구릉]에 천장함 |
1839 |
5년 |
7월, 기해사옥(己亥邪獄) 일어남 |
7월, 김대건 새남터에서 순교{1822 - }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 |
1848 |
14년 |
12월, 이양선 전국 해안에 출몰 |
11월, {척사윤음} 전국에 반포 |
1849 |
15년 |
6월, 헌종 승하 {1827 - } |
1840 |
6년 |
9월, 김정희 제주목에 안치됨 |
은언군의 증손자 원범 즉위[철종] |
뒷 이야기 23대 순조(純祖)의 아들인 세명세자(世明世子:[추존 익종])의 아들로 태어난 憲宗은 세명세자가 요절(夭折)하자 조부(祖父)인 순조의 대를 이어 1834년에 조선조 24대 왕위에 올라 15년간의 재위(在位) 시절을 마치고 슬하(膝下)에 자식없이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헌종대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의 내적 모순(矛盾)이 가중되고 외세(外勢)의 힘이 뻗쳐오기 시작한 때입니다. 국내의 정치 권력은 순조대부터 확고한 권력을 점유한 세도정권(勢道政權)이 점차 가속화됩니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가 7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함으로 인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가 지속되는데, 한 때 헌종의 외척(外戚)이었던 풍양 조씨(豊陽趙氏)인 외조부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문중(門中)이 권력의 틈새로 들어와 두 문중의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헌종의 비(妃)로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책봉되면서 다시 안동 김시의 세도 권력이 독점을 하고 그들의 주도로 철종(哲宗)의 왕위 계승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의 정체(停滯)는 그 산물(産物)로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紊亂)을 가속화시키고, 그로 인해 전국적인 민란(民亂)의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또한 통치 체제에 위협을 느끼게 했던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탄압은 그 정도를 더해 '기해사옥(己亥邪獄)'과 '김대건(金大建) 신부 처형' 등으로 대처하는 등 국가의 내적 모순을 축적(蓄積)하게 된 것입니다. 헌종대의 외세(外勢)에 접근은 조선의 문호(門戶)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는데, 조선의 권력층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쇄국(鎖國)의 길을 걷게 되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 효현왕후 김씨 약사 >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태어나[순조 28년], 1837년[헌종 3년]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고, 1841년에 가례(嘉禮)를 올려 왕후(王后)가 되었으나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슬하에 후사(後嗣)없이 승하합니다.[헌종 9년]
< 효정왕후 홍씨 약사 >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는 본관(本貫)이 남양(南陽)인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태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 승하 후,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5년 뒤에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대(哲宗代)를 이어 고종대(高宗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면서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고종 41년[1904년]에 역시 슬하에 소생(所生)없이 승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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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 - 예릉(睿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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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睿陵의 특징 : 조선조 제25대 哲宗(이변, 속명 이원범 : 1831 - 1863, 재위 14년)과 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金氏 : 1837 - 1878)의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세 번째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다음 대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황제릉(皇帝凌)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예릉(睿陵)은 조선조 왕릉(王陵) 형식의 마지막 능(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릉의 상설(常設)제도를 보면 왕과 왕비릉의 봉분(封墳)은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병풍석(屛風石)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장명등(長明燈)의 위치가 상석(床石)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왕릉(王陵)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哲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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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850 |
1년 |
7월, 황해도 가작(加作)의 폐 금함 |
1858 |
9년 |
2월, 금,은,동의 채굴을 금지함 |
1851 |
2년 |
7월, 김정희 북청으로 유배 |
10월, 원자(元子) 탄생{익년 사망} |
10월, <헌종실록(憲宗實錄)> 간행 |
1860 |
11년 |
7월, 경희궁(慶熙宮)을 수리함 |
12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함 |
9월, 최재우 동학(東學) 창시 |
1852 |
3년 |
4월, 삼남(三南)의 방곡(防穀) 금함 |
1861 |
12년 |
11월,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 |
1853 |
4년 |
9월, 소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함 |
1862 |
13년 |
2월, 진주 민란(民亂) 일어남 |
1854 |
5년 |
4월, 러시아배 함경도에서 백성 살상 |
3-10월, 전국 각지에서 민란 발생 |
1856 |
7년 |
10월, 김정희(金正喜)죽음{1786 -} |
1863 |
14년 |
11월, 동학교주 최재우 체포 |
1857 |
8년 |
8월, 대왕대비 김씨{순원왕후}죽음 |
12월, 왕 승하, 흥선군 차남 즉위{고종} |
순종(純宗)의 묘호를 순조(純祖)로 변경 |
대왕대비 조씨 수렴청정 |
뒷 이야기 :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昇遐)한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즉위(卽位)하게된 철종(哲宗)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勢道政權)의 집권(執權) 연장책(延長策)으로 그들에 의해 선택된 국왕(國王)이었습니다. 곧, 철종은 영조(英祖)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은언군(恩彦君) 이인의 손자(孫子)이고, 아버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입니다. 그런데 조부(祖父)인 은언군은 영조대에 상인(商人)들과의 빚 문제가 발각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강화도에 안치(安置)되고, 1801년 순조(純祖) 원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天主敎徒)였던 그의 처와 며느리로 인하여 함께 처형(處刑)을 당합니다. 또한 헌종(憲宗) 10년[1844년]에 철종의 형이었던 회평군(懷平君)이 반역(叛逆)에 연루(連累)되어 처형당하고 이때 어렸던 철종 역시 강화도로 유배(流配)되어 농사일로 지내게 되어 흔히 철종을 '강화 도령'이라 불리게 됩니다. 1849년 19세의 나이로 당시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의해 왕위에 오른 철종은 권력에서 소외(疎外)되는 국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철옹성(鐵甕城)과도 같았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그 절정에서 서서히 말기적(末期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또한 철종 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도 정권이 지닌 모순(矛盾)들이 그대로 노출되기 시작한 증거로 철종로 말기의 전국적인 민란(民亂)을 들 수 있습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수탈(收奪)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은 결국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을 몰락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더욱 가속화되었던 서양(西洋)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列强)들의 통상(通商) 요구나 계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확산을 가져온 천주교(天主敎) 세력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세도 정권이 야기(惹起)시킨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미봉(彌縫)적 대처와 함께 민족 내부적으로 발생한 민족적(民族的) 종교(宗敎)인 동학(東學)의 창도(創道)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국내외(國內外)의 혼란한 정세는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의 종말(終末)을 고하고 마는데, 33세의 나이로 승하한 철종(哲宗) 역시 영혜옹주(永惠翁主) 외에 후사(後嗣)가 없어 다음 대의 국왕을 물색하던 중 풍양조씨(豊陽趙氏) 가문이었던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의 비인 왕대비(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이하응(李昰應)과 손잡고 그의 아들을 즉위시켜 고종(高宗)을 삼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哲仁王后 金氏 약사(略史) 철인왕후 김씨는 1837년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태어나 철종 2년[18 년]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왕비 책봉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권력(權力) 유지(維持)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철인왕후는 철종 승하(昇遐)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집권(執權) 아래에서 대비(大妃)로 여생을 보내다가 고종(高宗) 15년[1878년] 42세의 나이로 승하해 서삼릉(西三陵) 내 철종의 예릉(睿陵)에 안장(安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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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皇后) 명성왕후(明成王后) - 홍릉(洪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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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洪陵의 특징 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이재황(李載晃) : 1852-1919, 재위 44년)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합니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즉,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 문,무인석)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紅--門)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서로 세워놓았습니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과 같은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입니다.
고종대의 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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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864 |
1년 |
3월, 동학교도 최제우 사형 |
1894 |
31년 |
1월, 동학혁명 일어남 |
1865 |
2년 |
3월, 비변사(備邊司)의정부에 흡수 |
6월, 청일 양국 군함 수원부 풍도 앞바다에서 충돌 |
윤5월, <철종실록(哲宗實錄)> 완성 |
6월, 갑오경장(甲午更張) 시작 |
1866 |
3년 |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에서 군민에게 불탐 |
12월, 홍범(洪範) 14조 제정 |
1895 |
32년 |
3월, 동학당 전봉준(全琫準) 사형 |
8월, 불란서 함대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
8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
1867 |
4년 |
11월, 경복궁 근정전 완성 |
9월, 태양력(太陽曆) 실시 조명함 |
1868 |
5년 |
4월, 옵페르트 남연군묘 도굴미수 |
11월, 단발령(斷髮令) 내림 |
1870 |
7년 |
12월, 세자 묘호를 원(園)으로 함 |
1896 |
33년 건양 1년 |
1월, 건양(建陽) 연호를 사용함. |
1871 |
8년 |
3월, 사액 47곳 제외한 서원 철폐 |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
4월, 미군함 강화전투[신미양요] 척화비(斥和碑) 세움 |
4월, 서재필 <독립신문> 발간 |
1873 |
10년 |
11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 |
1897 |
34년 광무 1년 |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침 |
1876 |
13년 |
2월,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
10월, 황제즉위식, 국호 대한 정함 |
1881 |
18년 |
1월, 신사유람단 일본에 파견 |
11월, 명성황후 국장(國葬) 거행 |
4월, 별기군(別技軍) 설립 |
1898 |
35(2) |
2월, 흥선대원군 죽음 |
1882 |
19년 |
4-5월, 영국,미국,독일 수호조약 |
1899 |
36(3) |
5월, 서울 전차(電車) 운행 |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 일어남 |
9월, 인천-노량진 경인철도 개통 |
1883 |
20년 |
1월, 태극기(太極旗) 국기로 정함 |
11월, 사도세자 장조(莊祖)로 추존 |
1884 |
21년 |
윤5월, 김옥균 등 개화파 민씨일족 죽이고 신정부 수립[갑신정변] |
1904 |
41(8) |
2월, 일본 인천 앞 바다에서 러시아 함대 격파 |
1885 |
22년 |
12월, 배재학당(培材學堂) 설립 |
8월, 1차 한일협약 성립 |
1886 |
23년 |
4월, 프랑스 수호조약 조인 |
1905 |
42(9) |
11월, 제2차한일협약[을사륵약] |
1889 |
26년 |
10월, 함경감사 조병식 방곡령선포 |
11월,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 정간당함 |
12월, 영종(英宗)의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함 |
1906 |
43 (10) |
2월, 통감부(統監部) 설치 |
1892 |
29년 |
12월, 동학교도 교조(敎祖) 신원(伸寃) 호소 |
12월, 최익현 대마도에서 죽음 |
뒷 이야기 고종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철종(哲宗)이 후사(後嗣) 없이 승하[1863년]하자 추존된 익종(翼宗)의 비(妃)였던 당시 존장자(尊長者)인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의 전교(傳敎)로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지명해 12세의 나이에 즉위합니다. 처음에는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국정(國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이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흥선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립니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세도정치와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타파,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 양반에게 신포징수(身布徵收) 등의 치적도 있었지만, 경복궁 중수(重修)나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천주교도 탄압,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근세조선의 고난한 정치적 역정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873년[고종 10년]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 고종이 친정(親政)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씨 척족(戚族)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어 고종은 왕비 민씨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와중에 놓이게 됩니다. 곧 고종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무너뜨리고, 근대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됩니다. 이어 고종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는 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돌은 가속화됩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유발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하고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모든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민씨 일파는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했으나,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景福宮)으로 들어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행합니다. 이후 고종은 1897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하고, 10월에는 국호(國號)를 대한(大韓), 왕을 황제(皇帝)라 하여 황제즉위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다음 해[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합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 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하고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근세의 격동기에 국운(國運)과 함께 했던 고종은 양위 3년 뒤에 경복궁에 일장기(日章旗)가 걸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운을 맞이하고, 1919년 1월 21일에 일본인에게 독살(毒殺) 당했다는 의혹이 있는 가운데 생을 마감합니다.
明成皇后 약사(略史) 명성황후 민씨는 본관 여흥(驪興)인 증(贈) 영의정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으나 9세 때 고아(孤兒)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됩니다. 명성황후는 역대 어느 왕비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여인인데, 특히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유일하게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타살(他殺)된 왕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으로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져 나가다가 결국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外戚) 정권을 수립합니다. 또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일본세력에 의해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994년에 흥선대원군이 재 등장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과 맞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조선의 존엄을 무참하게 깨뜨리고 맙니다. 1895년 8월 20일에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屍身)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립니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에 홍릉(洪陵)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高宗)과 함께 현 위치에 자리잡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당시 조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그녀를 호칭할 때 민비(閔妃)가 아닌 정식 호칭인 명성황후(明成皇后)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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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 유릉(裕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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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裕陵의 특징 조선 제27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이며 황제인 純宗(이척 : 1874-1926, 재위 4년)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 : 1872-1904)와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 : 1894-1966)를 모두 함께 합장(合葬)한 유릉(裕陵)은 역시 고종의 홍릉과 함께 황제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릉의 조성 시기는 처음 순명황후가 순종 즉위 전인 1904년에 황태자빈으로 승하해 서울 뚝섬 근처에 유릉으로 장사를 지냈는데, 순종이 승하한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합장을 했고 그 뒤 계후인 순정황후가 1966년에 승하하고 유릉에 함께 합장을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능의 제도는 홍릉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그 앞에 양쪽으로 문무석(文武石)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워놓았습니다. 역시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는데, 석물들이 보다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봉분에도 홍릉과 같이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있습니다.
순종대의 사료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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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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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융희 1년 |
1월, 국채보상운동 시작 |
1909 |
융희 3년 |
7월, 사법권 일본에 넘어감[기유각서(己酉覺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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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헤이그 밀사사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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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황태자 황제양위식 거행 |
10월,안중근 하얼빈에서 이또{이등박문} 죽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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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군대 해산됨, 연호를 융희로 고침, 영친왕 은 황태자 책봉 |
1910 |
융희 4년 |
6월, 경찰권 일본에 이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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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융희 2년 |
12월,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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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한일합방조약 조인[경술국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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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슬하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순종(純宗)은 1875년[고종 12년]에 세자(世子)가 되었으며 1897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됩니다. 1907년에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讓位)하자 황제(皇帝)로 즉위해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로 삼습니다. 하지만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립국의 실권을 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던 대한제국은 순종 즉위년에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내정감독권마저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그해 8월에는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순종의 동생이었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후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은 더욱 심해져 1909년에 군부(軍部)와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시키고, 통감(統監)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서 소네 아라스케[曾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게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은 통탄과 비난을 넘어 암살을 기도하기까지 합니다. 동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12월에는 이완용(李完用)을 습격하기 했지만 일제의 야욕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에 합방의 조인서에 옥새가 찍혀 국권을 강제로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있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는데, 순종은 망국의 한을 삼키고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53세로 승하합니다.
純明孝皇后 민씨 약사 순명효황후는 여흥(驪興) 민씨(閔氏)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72년[고종 9년]에 태어나 11세 때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순종(純宗)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년]에 33세로 승하해 지금의 뚝섬 앞 용마산 기슭에 유릉(裕陵)으로 조성했다가 순종 승하 후에 지금의 위치로 천장(遷葬)해 합장(合葬)합니다.
純貞孝皇后 윤씨 약사 1894년[고종 31년]에 해평 윤씨(海平尹氏)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로 태어난 순정효황후는 13세 때인 1906년에 황태자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어 다음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皇后)가 됩니다. 일설에 순정효황후는 이완용이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조인서에 옥새(玉璽)의 날인을 시도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버티다가 숙부이기도 했던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고 일화가 전합니다. 슬하에 후사 없이 창덕궁내 낙선재(樂善齋)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불교(佛敎)에 귀의하기도 했는데, 1966년에 72세로 승하해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 운명을 다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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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하여 좋은 자룐디. 눈탱이 빠지것다. 첨서부터 끝까정 다있고만, 요것만 알면 무식은 면하것는디.
느즈막에 성균관에 나가냐? 다 못읽어서 미안하다. 축구땜에 시력이 말이 아니다.
한번에 다 읽을 생각하지 말고 틈틈이 보면서 답사할 기회가 있을때 참고해라. 지리도 알 수 있고...
아이고 힘들어 죽겠당
뭐 했다고 힘들다고 그러냐? 무리하지 마라. 이눔아
회창아제 조선왕족 실록을 한권의 책을 읽는것 같은데 한꾸네 읽기는 여간 힘드네요 쪼간씩 쫀간씩 읽어야 되겠습니다 다음에는 역사에 대해서 올릴때는 좀 나누어서 올려주세요...
조선시대 왕릉은 현재 44릉이 있는데 2릉은 북한에 소재하고 42릉은 수도권에 있으며,단종릉은 영월에 누워있다네요. 그리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릉이 아니고 묘로 불리고 있구요. 틈틈이 조금씩 나눠서 보세요.
태백산 정상 천재단에서 잠시 내려오면 단종을 모셔놓은 비각이 있습니다 해발 1500m ......친숙부에게 어린나이로 죽임을 당한 단종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합니다.지난 5월 28일에 태백산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