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KBS 방송국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7월 13일 오전 10시 50분 KBS-1TV "TV동화 행복한 세상" 에 졸고 <백 원의 가치>가 방영됩니다. 2007년 <샘터 2월호>에 발표한 글입이기도 합니다. 지난 2월에도 <우리반 쿨쿨존>이 "TV동화 행복한 세상"에 전파를 타게 되어 많은 분들이 격려와 응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울러 금번에도 많은 시청을 부탁드리면서 공감해 주시길 앙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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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의 가치 / 최 봉 희
퇴근 길, 교정을 나서는 데, 운동장 한 쪽에 덩그러니 떨어진 100원 짜리 동전 한 개를 보았다. 먼저 본 사람보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인 법. 멋쩍게 돈을 주웠다. 동전을 줍는 일은 어느 여류시인이 말한 것처럼 다보탑을 줍는 일이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는 순간이다. 100원이면 방글라데시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가 가능한 돈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듯하다. 풍요로운 세상을 반증하는 예일까? 10원짜리 동전은 이미 사람들의 안중에 없는 듯하다.
며칠 전부터 학생들과 함께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동전 모으기 행사를 열었다. 일주일간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문에서 모금을 했다. 총 63,830원을 모을 수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에서부터 500원짜리 동전에 이르기까지 각 사람의 정성의 모양은 참 다양했다. 간혹 1,000원지폐도 있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100원, 어린시절 나에겐 100원은 정말 대단했다. 무서운 불주사를 맞는 날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엉엉 우는 나를 보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물 뚜~욱! 주사 맞고 나면, 엄마가 백 원 줄게."
그땐 어떠한 고난도 100원 하나면 이겨낼 수 있었다. 두 눈을 찔끔 감고서는 간호사 누나를 향해 어깨를 불쑥 내밀었다
"예쁜 간호사 누나, 아프지 않게 놔주세요."
군것질이 필요할 때면 어머니께 달려가곤 했다. "엄마 100원만, 엄마 100원만~"하고 떼를 쓰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주시곤 했다. 그 당시 100원은 어린 나에겐 유일한 희망이자 즐거움이었다. 용돈이 필요할 때면, 장롱에 올려놓은 돈을 슬쩍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께 걸렸다가는 혼쭐나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기억도 있다. 어머니는 용돈을 주기 전에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넌 엄마가 돈으로 보이니? 담부터 아버지한테 좀 달라고 하렴"
"오늘 숙제는 다 한 거니? 밀린 거는 없는 거지요?"
힘들게 받아낸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내 작은 손바닥에 달랑 놓이면, 그 순간 난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만화가게, 알사탕, 뽑기, 달고나, 쫄쫄이 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하지? 뭘 사먹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행복했다.
어른이 되어 백 원의 만 배가 훨씬 넘는 봉급을 손에 쥔 지금, 그 시절처럼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엄마가 주는 용돈이 아닌 때문일까? 아니면 물가가 너무 많이 오른 탓일까?
출근길에 버스를 탔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요금은 1100원, 그런데 요금카드를 단말기에 찍었는데 이상하게도 1,000원으로 표시되어 나왔다. 이상하다 싶어 기사님께 여쭤보았다. 버스 기사 님은 살짝 미소를 내게 보내신다. 나를 위한 운전기사님의 배려인 것이다. 아침에 교문에서 교통지도를 할 때마다 거수경례로 만나는 기사님이시다. 여러 학생들이 있기에 교통 요금을 안 받을 순 없다면서 기본요금만 받는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100원이란 작은 돈이겠지만 나를 생각해서 챙겨주는 운전기사 님의 따뜻한 마음이다. 그저 감동이 훈훈하게 밀려왔다.
한 십여 년 전의 수학여행 때의 일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에 함께 갈 수 없다는 한 아이가 있었다. 학생 전원이 참여한 수학여행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수학여행이라면서 모든 학생이 반드시 참석할 것을 독려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난 수학여행을 그냥 떠날 수 없다면서 그 아이의 집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 아이는 수학여행을 갈 수 없다면서 외면했다. 하지만 난 그 아이를 다짜고짜로 버스에 태우고는 설악산으로 향했다.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 수학여행, 나름대로 모두가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수학여행의 들뜬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들은 해방구를 갈망하듯 천방지축이었다.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느라 며칠간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기지개를 펴고 숙소를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가 내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이거~ 드세요! 박카스를 사 드려야 하는데…, 죄송해요"라며 요구르트 한 병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의 주머니에는 300원만 달랑 있었다. 미처 수학여행 준비할 틈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차에 태웠기 때문이다. 설악산 흔들바위를 오를 때 더위를 이겨내려고 100원으로 쭈쭈바 하나를 사 먹고, 동생 주려고 100원짜리 돌하루방 인형을 하나 샀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원은 나를 위해 요구르트를 산 것이다.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백 원의 그 소중함, 난 그동안 그 순수함을 모두 잃고 살았다. 어린시절의 그 행복감, 또 운전기사 아저씨의 따뜻함, 감동이 넘친 한 학생의 사랑, 아니 다 잃어버렸다고 해야 옳은 말일게다. 어쩌면 커져 버린 손바닥만큼 내 욕심도 그만큼 커져 버렸나 싶다. 그 때문에 소중함을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1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달리던 그때의 부자만큼이나 난 지금 만족한 것일까? 잊고 산 100원의 소중함, 다시금 그 시절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요즘 100원짜리 정성을 계속 모으고 있다. 황금 돼지해라고 난리법석이다. 100원짜리 동전이 모여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행복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시절의 그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그 행복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