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건만
제 기억은 군산에서 날아온 편지 한통에 무작정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길을 달리던
10여년 전 5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종진형이 군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띄운 첫 편지에
마냥 가슴이 설래어 그 먼길도 지척인냥 달려가
고속버스 터미날에 내려 택시를 타고 군산교도소로 가자니까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흘끔 흘끔 쳐다보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던 기억도 새롭기만 합니다.
죄인들이 갇혀있는 교도소로 가자니까
이 젊은 여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기사 아저씨를 보고도 못 본척
다음에 누군가의 차로 함께 올 때
길을 헤매지 않게 차창밖을 유심히 쳐다보며 마음속에 지도를 그려넣었지요.
터미날에서 20여분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군산교도소는 숲으로 둘러싸여
5월의 햇살속에 얼마나 싱그럽게 보이던지
마치 내 집에 온냥 마음이 편안해지던 기억도 나네요..
서울구치소,안양교도소를 거쳐 이제 마지막 수형생활을 하게될 군산교도소를
1주일에 한번씩 드나들며 봄,여름,가을을 보내고 몹시도 추운 겨울 날
사랑하는 남편 품에 안기던 그 순간까지
저는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면회를 다녔습니다.
미결수일때는 매일 면회가 되니까 서울구치소를 1주일에 서너번 오가고
기결수가 되면 원래 한달에 한번밖에 면회가 안되는데
군산교도소에서 1주일에 한번 면회할 수 있도록 특별배려를 해 준건
최선생님(종진형)이 그 곳으로 이감온뒤 운동권학생들뿐 아니라 조폭들까지도 감화받아
교도소내 질서가 잡히고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도소에서 저희에게 베푼 선물이었답니다.
유리창 너머로 단 5분의 면회를 위해 왕복 7~8시간을 달리면서도 행복하고 가슴 설램은
그곳에 가면 그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반기는 사랑하는 님이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1주일의 삶이 지루하지 않고 슬프지 않았던 이유도
다음에 면회가면 무슨일로 종진형을 기쁘게 하고 기운나게 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기에
하루하루 무심히 보내는게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을 기억하며 엑기스만 뽑아 가슴에 담아
면회가서 그 짧은 시간안에 생생하게 전하는 순간
종진형이 대견한 듯 나를 보며 빙그래 웃는 모습만으로도
내 안의 슬픔,아픔이 눈 녹듯이 녹아지며
피곤은 저만치 물러나고 생기가 넘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지요.
늘 재잘거리는 아내의 얘기에 귀기울이다
종진형이 갇힌 공간에서 깊게 사색하며 퍼올린 소중한 단상들을 얘기해주면
그 말들이 내 가슴 깊이 뿌리내려 생명의 양식이 되곤 했기에
나는 언제나 기쁘게 면회다닐 수 밖에 없었지요.
만기출소해선 3년여 제 곁에 머물다
폐암 선고를 받고 자연요법으로 치료차 충북 미원에 내려가면서 다시 시작된 면회는
1주일에 서너번 미원을 오가고
농민들이 마련해준 제주도로 요양처를 옮기면서
제주도까지 오가게 되었지요.
늘 전화로 서로를 안부하다
보고싶다는 한마디에,
때론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가방 하나 들러메고 김포공항으로 달려 제주도로 향하면서도
무조건 감사하고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해본건
이렇게 먼길을 가서라도 만날 수 있음이 너무나 큰 행복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렇게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에 길들여졌는지
종진형이 내 곁을 떠난지 어느 덧 10년이 다 되오는데도 제 면회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종진형이 묻혀있는 마석으로 때없이 면회를 다닙니다.
예쁜 꽃다발을 가져가 못 다한 내 사랑을 전하면
말없는 미소가 나를 반기는것을 느낍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면회를 허락한다면 언제라도 달려가련만
아직은 그리움따라 마석으로 면회다니는 여자로 남아야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