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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수 시집 해설>
슬픔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인간의 감정을 ‘오욕칠정’이나 ‘희로애락’ 등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모든 감정의 근본적인 원천은 슬픔이라는 감정이다. 근원적인 결핍을 가진 인간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인간은 욕망을 채울 수 없어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더 큰 결핍만 느낄 뿐이다. 바로 이에 상응하는 정서가 슬픔이다. 이렇듯 슬픔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감정이다. 슬픔이 넘쳐 외부로 발산할 때 그것은 분노가 되고, 견디기 힘든 슬픔을 애써 잠시나마 잠재우려는 정서의 반작용이 기쁨이다. 오래가는 기쁨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고희수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은 이 슬픔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우리 삶에 배어 있는 수많은 슬픔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슬픔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침윤되어 있고, 또한 편재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2. 타인의 슬픔
슬픔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슬픔의 주체인 한 사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먼 산비탈
할아버지의 유택
평생 즐겨 신던 흰고무신처럼 국화 놓여 있다.
몸 약한 손녀 앞장세우고
밭으로 밤 주우러 갈 때
벼 얼마나 고개 숙였는지 보러 갈 때
다리 아프다며 징징대는 어린 발자국에 발맞추던 흰고무신
한걸음은 가슴에
또 한걸음은 마음에
기다림을 겹겹으로 쌓았다.
근심으로 얼굴 확 펴지 못한 낮달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병으로 잃은 당신의 어린 자식
저 고운 신 신고
그곳에서
손녀 운동시키듯 발자국에 발맞추는지.
서쪽 하늘이 자꾸 붉어지고 있다.
- 「향기를 신다」 전문
시인은 산비탈에 있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놓인 하얀 국화꽃을 보고 할아버지가 “평생 즐겨 신던 흰고무신”을 연상한다. 그 흰고무신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그 흰고무신은 할아버지가 겪은 고통과 근심과 슬픔의 순간을 줄곧 함께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일인 농사지을 때나 병약한 손녀를 돌볼 때나 모두 이 흰고무신을 신었기에 그가 이 신을 신고 발을 딛던 모든 걸음에는 슬픔이 아로새겨 있다. 시인은 이것을 “한걸음은 가슴에/또 한걸음은 마음에/기다림을 겹겹으로 쌓았다.”고 아주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할아버지의 삶과 슬픔에 공감하여 그 슬픔을 함께한다. 그런 시인의 눈에 “서쪽 하늘이 자꾸 붉어지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시의 제목을 “향기를 신다”라고 했을까? 할아버지의 삶과 그 안에 점철된 슬픔이 향기처럼 아직 남아 시인의 마음속으로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얀 국화꽃에는 바로 할아버지의 슬픔이 향기처럼 배어 시인의 마음을 애잔하게 물들이고 있다.
다음 시에서는 가족도 아닌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 본다.
도장 파려고 문 연 컨테이너박스
뿌연 담배연기가 확 달려온다.
전 부인과 내 이름이 같다는 남자
잘하시지 그러셨어요, 무심코 내뱉은 말
몇 년 전 자식 두고 집 나갔다는 여자
어색한 침묵에 벽의 중국집 메뉴판만 꼼꼼히 읽는 시간
가지 무성해
수많은 흔들림을 내면의 단단함으로 채운 대추나무가
옹이 같은 그 이름을 내놓는다.
창밖 정류장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노을이 버스를 기다린다.
- 「옹이」 전문
시인은 도장을 새기려 갔다가 도장 파는 아저씨의 슬픈 가족사를 얼핏 듣는다. 타인의 슬픔에 함께한다는 것이 어색하여 정작 시선을 돌려 딴짓을 하지만 가슴 속에서 번져오는 슬픔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슬픔을 견디며 단단한 대추나무를 새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슬픔이 굳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되었다고 시인은 상상한다. 타인의 슬픔이 자신의 가슴속에 파고든 순간을 시인은 이리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 아련한 슬픔의 전이를 시인은 “노을이 버스를 기다린다”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어려움을 다음 시가 말해주고 있다.
한 무리의 촉촉한 눈길이 다녀가고
추모공원은 쪽수를 늘린다.
눈으로만 넘기는 책은
며칠 전 하늘공원의 한 페이지가 된 남자
밧줄 하나에 의지해
책장 넘기듯 닦던 유리창
급하게 허공 읽던 바람에 몸은 흔들렸다.
너무 이른 퇴고에 빈약한 서술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문법
붉은 눈시울이 밑줄을 긋는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쪽만 보는 사람들
가끔씩 속독을 배우지 못해
중얼중얼 외우지 못한 페이지를 되뇌는 발자국들
수없이 넘기는 낱장들
한때는 누군가의 베스트셀러였을 것이다.
누가 떨어뜨렸는지.
텅 빈 적막만 읽고 있는 여자
자꾸 그리움이 흘려도 젖지 않는 책은 단편적이다.
주렁주렁 주석을 달고
읽고 읽어도 난해한 문장은
가슴으로 읽지 않고 머리로 읽는다.
오늘도 하늘공원은 쪽수를 늘린다.
- 「하늘공원을 읽다」 전문
시인은 고인들의 유해가 봉안된 추모공원을 보며 생각하고 있다. 그곳을 많은 고인들의 삶이 기록된 책으로 비유해 본다. 하지만 그 책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책이 너무 단편적이거나 난해한 문장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빨리 읽을 “속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지 정작 타인의 삶에 정확히 가 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이 유택에 든,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닦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고도 그의 그 억울한 사정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이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시인의 “붉은 눈시울이 밑줄을 긋는다.”
다음 시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좀 더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긴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에코백 길게 늘어뜨리고
걷고 있다.
문 닫은 가게 같은 표정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이 햇살처럼 쏟아져도
여자는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푸름이 무거워
잎 축 처진 7월의 라일락처럼 버거운 것일까?
땅바닥에 끌리는 젊음
가방에선 한번 봐달라는 듯
이력서가 슬쩍 고개를 내민다.
낮달이 앞서가고
제 그림자마저 앞세우고 느릿느릿 가는 여자
버리지 못한
꿈 하나가
따라서 간다.
-「7월의 라일락」 전문
요즘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된 ‘청년실업’ 문제를 떠올리는 시다. 7월은 신록의 계절이고 청년의 시절이다. 그 시절에 피는 라익락 꽃은 젊음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대변해 주는 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젊은 여자는 “잎 축 처진 7월의 라일락처럼 버거운” 모습이다. 젊음이 싱싱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의 무게가 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써 보지만 아직도 그녀는 꿈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슬픔 모습을 시인은 “제 그림자마저 앞세우고 느릿느릿 가”고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아주 잘 형상화하고 있다. 타인의 슬픔을 이렇게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는 시인의 따뜻하면서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다음 시의 슬픔의 정조는 문명비판적 사유로 확장된다.
언덕에 떡 서서
허공을 팽팽하게 당긴다.
밤의 가지에 소쩍새 울음이 걸리면
별들이 개울에서 첨벙거리던 마을
주민들은 면사무소로 달려갔고
한 무리 고라니들도 군청 쪽으로 몰려갔지만
사람들이 도시로, 도시로 갔으니까
전기도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라는 듯
날개 쭉 펼친 채
밤낮없이 웅웅거리는
저 고압적인 소리
구름은 방향을 바꾸고
새들도 멀리 돌아서간다.
집보다 많아
동네의 주인이 된 저 철탑 밑으로
질리어
파래진 봄이 지나간다.
- 「도시로, 도시로」 전문
시인은 시골 마을에 세워진 고압선 철탑을 보고 있다. 그런데 철탑은 시골 마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도시를 위해 존재한다. 주민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이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소리에 결국 묵살되고 “웅웅 거리는/저 고압적인 소리”를 내며 서 있다. “도시로, 도시로” 떠난 사람들처럼 전기도 “도시로, 도시로” 보내지고 농촌은 파랗게 질린 절망 속에서 봄을 맞는다.
사람들이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만들어 모여드는 것은 다 욕망 때문이다. 좀 더 풍족한 물질을 생산하고 소비하여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욕망의 뒤편에는 그것 때문에 희생되어야 할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 시인은 그들의 슬픔을 돌아보고 있다. 또한, 그들의 슬픔에는 과도한 문명의 발전이 몰고 올 어떤 파멸의 예감이 묻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구름은 방향을 바꾸고/새들도 멀리 돌아서간다.”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3. 슬픔이 슬픔에게
욕망의 좌절이 슬픔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슬픔은 좀 더 이차적인 성격을 띤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 투사한다. 결국,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 타인들의 삶은 나와는 분리되어 존재하고 나는 끝 모를 고립감을 갖게 된다. 누군가 그것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미디어나 정보통신의 발달로 타인의 삶과 타인의 욕망은 더 깊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의 삶을 간섭하지만 그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진다. 이것이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다. 그만큼 결핍은 더 커지고 슬픔은 더 깊어진다. 고희수 시인은 이 깊은 슬픔을 바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무언가를 흔들어야만 보인다.
바람은 나무와 제 몸을 엮는다.
나무는 이때 바람의 마음을 안다.
쌩쌩 거리다가 살랑거리며
바람은 수시로 표정을 바뀐다.
어제의 차가움을 잊은 듯
가는 곳마다 마음을 흘린다.
붉은 장미에 추파를 던지다가
날카로운 가시에 찔렸는지.
재빠르게 달아난다.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
사람들은 앞길이 보이지 않아
싼 집을 찾아서
도시 외곽으로, 외곽으로 떠난다.
능선을 넘기 위해 달려가는 바람
가로수는 어지럽다.
저 몸에서 히힝 말 울음소리가 난다.
소리와 함께 가는 바람
혼자 가기가 두려웠나 보다.
나도 카톡, 카톡 소리와 함께 간다.
- 「바람의 표정」 전문
정처 잃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시인은 바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싼 집을 찾아서 / 도시 외곽으로, 외곽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부초처럼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가볍고 일회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것을 “수시로 표정을 바”꾸고 “재빠르게 달아난다.”고 표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정처 없는 가벼움을 노마드적 삶의 자유라고 칭송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이런 삶에서 “말 울음소리” 같은 슬픔을 본다. 이 슬픔을 감내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서로 소통하고자 헛된 노력을 한다. 시인 역시 “카톡, 카톡 소리”를 들으며 이 고립감을 견디고 있다.
슬픔을 견디는 길은 슬픈 존재끼리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겨울이 유리창에 접힌 베란다
별꽃, 작은 잎망울이 초롱초롱하다.
작년 어느 별에서 내려왔는지.
아파트 20층, 부추 화분에 둥지를 튼 별꽃
집주인 눈치 보느라. 그랬는지
부추가 제 잎 키울 때는 스르르 별이 되었다.
나도 그렇게 산 세월이 있었다.
무슨 불만이 있는지.
꽉 다문 입에 헛기침만 달고 있던 집주인 아저씨
내 아들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마당에서 놀다가도
대문 밖 그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오던 아이들
한동안 방에서 숨죽이던 노을은
뒷산 그림자가 내려오자.
그때서야 돌아갔다.
납작 엎드렸던 저 몸이
장만한 작은 집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좋아하던 아들들처럼
사방으로 날개 쭉 펼친 채
일광욕을 하는지.
밋밋한 햇살을 꽉 붙잡고 있다.
바람이 팽팽하게 허공을 당기는 창밖
저 한 무더기 초록이 향긋하다.
- 「별꽃」 전문
시인은 부추 화분에 숨어 피어있는 별꽃을 보고 연대감을 느낀다. 자신도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라는 권력자가 무서워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슬픈 시간이 있었다. 부추 화분에 피어있는 별꽃도 그런 시간을 견디고, 작지만 이쁜 별이 되어 피어났을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한 무더기 초록이 향긋”한 그런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시인은 슬픔의 공감을 통해 희망을 보고 있다.
슬픈 것들이 모일 때 희망의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을 다음 시가 말해주고 있다.
집의 기둥이 허공에 의지해 있다.
그 옛날 머슴을 둘이나 두고도
일꾼들이 하루해를 팔던 집
해가 서산마루를 넘자.
새들이 와 하면 대나무로 모여든다.
곧 돌아올 거라고 주인은
적막을 걸어두고
오래 전 요양병원으로 떠났었다.
새 주인에 맞춰
집은 내려앉은 대들보엔 바람을 올리고
밤이면 서까래처럼 별들이 총총 걸린다.
식솔이 늘어날 때마다
구멍 난 허공을 새소리로 메우느라. 대나무는
그 옛날 머슴처럼 관절 마디마디가 툭 툭 굵어진다.
해종일 물고 온 들판
직박구리들은 활짝 펼쳐놓는다.
가지마다 열리는 수다
농부는 황금 들판을 뛰어다닌다.
대나무는 파란 잠을 떨어뜨린다.
집은 예전처럼 왁자하다.
- 「새 주인」 전문
최근 시골에 가면 흔히 보게 되는 빈집을 떠올려 주는 시이다. 자식들도 동네 주민들도 다 떠나고 낡은 집에 홀로 살던 집주인 노인마저도 노환이 깊어져 요양병원으로 떠나고 없다. 하지만 주인이 없다고 ‘빈집’이라 부를 수 없다. 거기에 새 주인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새 주인은 바로 직박구리라는 새이다. 새 주인은 “새”인 주인이다. 시인은 교묘하게 동음이의어를 사용하여 폐허에 다시 생명의 둥지를 튼 새 주인의 존재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없고, 또한 피폐되어 가는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견디고 살아온 집 주인의 슬픔을 자연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위로해 주고 있음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개구리밥, 부레옥잠, 자라풀, 갈대
좀처럼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방죽
토닥토닥 비 속삭임에 잎들만 무성했다.
...(중략)...
어둠보다 더 질펀한 펄을 한나절 헤치고
남동생이 잡아온 뱀장어 두 마리
방죽엔 용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제 몸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 「방죽」 부분
우리는 모두 “용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용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결코 완전하게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 되기만을 꿈꾸고 살 때 주변의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다.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켜 생태계를 파괴하는 지금의 사회가 바로 그것을 잘 말해준다. 사람들은 욕망만을 추구하기 위해 큰 빌딩을 세우고 거대한 백화점에 수많은 상품을 쌓아두고 있다. 하지만 이 땅의 다른 한 곳에서는 하찮은 것들이라고 여겨지는 “용이 될 수 없는 것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숨기고 사는 그들 때문에 아직은 이 땅에 희망이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4. 맺으며
고희수 시인은 슬픔을 아는 시인이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몸으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다. 그러면서도 감상적으로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그 슬픔 때문에 절망에 빠질 정도로 퇴폐적이지도 않다. 슬픔을 생명의 힘으로 견디고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언어의 마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마음과 그것을 구체적 삶의 계기로 포착해 낼 수 있는 예리한 눈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그의 언어는 슬픔에 젖은 우리 모두의 삶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준다.
노을에 기댄 저 날개가
일순간 팽팽하게 당겨지고
금방 날아오를 것만 같다.
지금 내 날개는 어디에서 파닥거릴까?
- 「나비」 부분
시인은 떨어진 꽃잎을 보고 나비를 상상한다. 꽃잎은 채우지 못한 욕망의 흔적이다. 시인은 시 쓰기라는 상상의 행위를 통해 좌절된 욕망을 희망의 날개로 만들었다. 고희수 시인의 시들이 슬픔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비통하거나 절망스럽지 않고 따뜻하게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시인의 바로 이런 능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