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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단어만으로 듣는 이들을 충분히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으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배경에는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적 절망과 좌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공동 저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세대는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너무 과해서 문제다. 좌절과 절망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고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만나기 어려운 희망에 대한 외침이 88만원 세대에게는 고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소위 희망고문입니다.
여기서 “88만원”은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평균 임금에 해당하는 119만원에 20대들이 받고 있는 급여의 평균 비율 74%를 곱한 수치입니다. “88만원 세대”는 20대 가운데 불과 5%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95%가 88만 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일하는 비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일해 봤자 겨우 88만원을 손에 쥐게 되는 20대 비정규직들에게 있어서, 내일에 대한 장밋빛 희망을 외치는 말들은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깊은 절망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시인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4)라고 노래했습니다. 존 길(John Gill)은 이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에서 아들이 받을 영광과 백성들이 얻을 구원에 대해 무엇을 약속하셨든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존 트랩(John Trapp)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모하는 것도 이루어 주신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방법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말이다. 곧 ‘네 뜻하는 바대로 되기를 원하노라.’라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오해하기 딱 좋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둔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 교회는 이를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일들이 빠짐없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기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초대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받을 세례”는 예수께서 당하실 모진 고난과 혹독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또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2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창세전에 이미 작정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실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외치셨습니다.
오직 당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 인류 구원을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졌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작정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소원이 이루어지기 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맞추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과 놀라운 섭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영원한 저주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당시, 그(Charles Stanley)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견디기 힘든 외로움은 차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 때, 그는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와 함께 벽난로 앞에 앉은 친구는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던 고통과 근심을 다 쏟아놓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한 친구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여전히 혹독한 고난과 힘겨운 역경이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을 행하시고,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기쁨입니다. 만족입니다. 무엇보다 내일에 대한 희망입니다. 영원히 희망입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톡데일(James Stockdale)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수용소에서 지낸 미 해군 장교입니다. 그는 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많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전쟁 영웅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값싼 희망을 외치던 낙관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낙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풀려 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들의 희망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아무 일 없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부활절까지는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나면 다시 추수감사절, 또 다음 크리스마스에는 꼭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당장 닥쳐 있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했습니다. 스스로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현실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도 풀려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톡데일은 그들을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풀려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라고 독려했습니다. 그의 독려에 참여한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멍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함께 힘든 포로생활을 견딜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독방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신뢰하고 격려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도 개발했습니다.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체력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냉혹한 현실을 무시하는 무조건적인 낙관론이라는 함정과 덫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강단에 무조건적인 낙관론이 넘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분별한 긍정의 힘, 번영신학, 고지론(高地論), 청부론(淸富論)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는 분명히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라는 주님의 말씀은 외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사도가 기도 응답과 관련해서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라고 외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아도 무조건 믿고 구하기만 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고 외칩니다. 무분별한 희망을 남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낙관적인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성도들의 삶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낙관적이겠습니까? 희망으로 넘치겠습니까?
과연 정말로 그렇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정말로 많은 성도들이 꿈과는 전혀 다른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고 한다면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적인 희망이 아니라 참된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얼마든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진짜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더 이상 아침 안개와 사상누각에 불과한 헛되고, 일시적이고, 지극히 육신적인 희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짜 희망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위협해 온다 할지라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 희망, 유일한 희망, 영원한 희망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롬4:18a)라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바랄 수”(ἐλπίδα)는 “기대, 확신, 희망, 여명” 등의 뜻을 가진 추상 명사입니다. “믿음”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없는 중에”(παρ)는 “너머에(beyond), 반대편의(against)”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입니다. 그래서 “바랄 수 없는 중에”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믿음과는 완전히 반대편(너머)에 있었다, 희망과는 완전히 반대편(너머)에 있었다.”가 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자신과 아내를 통해서는 단 한 명의 자녀도 낳을 수 없다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도대체) 저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 종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창15:2)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질 급한 이들에게는 믿음에서 떠난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희망”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8b)라고 이어집니다.
그가 자신과 사라를 통해서는 불가능을 보면서도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창15:5b)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했다고 말씀합니다. 과학자들은 스스로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릅니다. 전혀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습니다. 바랍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을 믿습니다.
곧 약속에 관한한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은 이미 99세였습니다.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습니다. 89세인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볼 때, 생산 조건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믿음을 갖는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져보겠다고 외친다고 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포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라 역시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a)라고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을 때,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과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농담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기대와 희망도 없다고 외쳤습니다. 포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3-14)라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반드시 사라를 통해 언약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상황을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9)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본 절의 주어는 믿음입니다.
성경 전체는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풀어야합니다. 그래서 본 절은 “믿음이(곧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백세(정확하게 말하면 99세)나 된 아브라함의 몸과 (89세나 된)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전혀) 약해지지 아니하고”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에도 얼마든지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86세가 되었을 때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아봤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음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자아의 죽음이었습니다.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렘33:2a)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한 하나님의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을 인도한 하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아브라함의 현실과 별도로 활동했습니다. 아브라함 안에서 활동했습니다. 모든 상황과 조건이 절대 절망을 외치고 있는 순간에도 전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습니다.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위한 당신의 뜻인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 복의 근원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줄 믿음이 “있으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난 자리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능력, 자랑,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당신의 뜻 하나만을 추구할 수 있는 견고한 믿음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세상 무엇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희망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불가능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당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단 하나밖에 없는 희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막아주는 여분의 방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분의 수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단 하나의 어젠다(Agenda)이십니다. 그런데 하덕규는 “가시나무”라는 자신의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여기서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 내 속에 헛된 바람” 등으로 표현된 것들의 실상은 거짓 신들입니다. 짝퉁 하나님들입니다. 원래 그 자체로 선하고 유용하고 소중하고 심지어 고상한 것들이었는데 알게 모르게 거짓 신들로 둔갑하고 격상돼버린 돈, 섹스, 권력, 명예, 인기, 승리, 성공, 행복, 가족, 안정, 영향력, 이념, 철학, 종교 등입니다. 이 우상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회의 씨줄날줄에 배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자살이 많습니다. 마음의 자살이라고 부르는 우울증도 많습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우상들을 따라 삽니다.
그러다 그들이 주는 희망이 사라져버리면 절벽에 몰렸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살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자살, 절망, 좌절, 소외, 파괴, 독선, 불통의 배경에는 언제나 이 짝퉁 하나님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거짓 신들을 분별할 수 있는 복음의 촉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교회 안에 마치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우상 숭배의 문제를 풀어갈 복음의 촉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표층적(表層的)으로만 이해하면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위선, 자기기만, 불만족, 독선 등입니다. 잎과 가지가 아니라 뿌리를 볼 수 있어야합니다. 심층적(深層的)이어야합니다. 잎과 가지를 아무리 가지치기해도 열매는 바뀌지 않습니다. 뿌리에서 이미 결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접붙이기를 한다든지, 수종 자체를 바꾸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단지 표층적으로 열심을 더 내는 문제가 아니라, 심층적으로 본질이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지금 당장 마음의 갈망과 불만과 충동과 좌절과 꿈과 소망을 유발하는 거짓 신들은 무엇인지,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짝퉁 하나님들은 무엇인지 분별해 내야합니다.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어야합니다. 아니 병들고 왜곡된 우리의 자아가 바로 그 우상들의 공장이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합니다. 거짓 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원래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참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우상인 자본은 끝없이 욕망을 확대재생산합니다. 사람들을 자신의 확실한 신민으로 잡아두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자본에 저당 잡힙니다. “조금만 더”라는 자본의 주술에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자본에 중독됩니다. 벗어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 만나는 모든 길들은 단순히 이곳저곳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그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학문과 지식과 기억들이 쌓여 있는 온축(蘊蓄)입니다. 지향입니다. 잊어버린 기억들을 환기시켜줍니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래서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당연히 행복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그 길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마음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자신입니까? 혹시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바른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는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했습니다. 건축 설계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해졌습니다. 복잡한 도면을 그리고,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하는 건축 설계 일을 하다 보니 그러려니 생각했습니다. 안경을 써봤지만 차도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병원을 찾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본 의사는 치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곧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장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지난 32년 동안 배우고 알아온 모든 내용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제가 배운 영어, 건축 설계 등 모든 것들도 무용지물입니다. 점자도 새로 배워야 합니다. 차라리 교통사고로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다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의식불명이 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겠습니다.”라고 처절하게 절규했습니다.
통곡하며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눈먼 자도 보게 했다고 하는데, 하실 수 있으면 저를 좀 고쳐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목사는 “현실을 끌어안지 않으면 현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피하는 것은 극복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끌어안아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형제의 삶에 빛이 될 것입니다....맹인으로 살지만 영안이 열린 인생도 있습니다. 두 눈 뜨고 살지만 영안은 닫힌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형제도 영안은 닫혔던 사람입니다. 그 영안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는 목사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했습니다. 목사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다 예배 중 큰 은혜를 받은 형제는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맹인이 될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시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마음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파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력도 잃고 영안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찬양하며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이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는 마지막으로 형제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사 영리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첫 번째 내용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멀쩡하던 눈을 잃고 맹인이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요동쳤습니다. 형제에게 그 내용을 따라 고백하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목이 매여서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형제가 목사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목사는 더 이상 사 영리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뜬 형제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을 잃었다 할지라도 영혼의 눈을 뜨고 있다면 얼마든지 절망적인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51:1-2)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시온인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간절히 사모하며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 같았던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신 당신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덴마크 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 Kierkegaard)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죽기 전까지 절망이라는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심지어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심적으로 깊은 심연이 있다. 절망의 반대말은 (인간적인) 희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곧 참된 희망의 원인인 믿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되고 진정한 희망은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죽은 자를 살려 주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안에 당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창조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마음에 풍성하고 참된 평안, 기쁨, 만족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희망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죽음 같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 곧 열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육신적 희망을 뛰어넘는 신적 희망으로 무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서도 풍성한 평안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