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스님은 녹차를 제대로 잘, 만들었는가?
어쨌거나, 39살(1824) 때 자기만의 공간인 간소한 일지암(一枝庵, 1825낙성)을 가지게되어, 몸과 맘 안정되어가 스님은 제대로의 「선禪과 차茶」에 정진精進케 된다.
그 한참 뒤, 기록상으로는- 초의스님도 43살(1828. 여름)에야 비로소, 우리나라 누구도 보고, 알려주지使用 아니한, 이 내용을 보았고, 그것도 원본이 아닌 백과사전인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실린 것을, 그리하여 베끼면서 또, 정서해(45살, 1830. 봄) 책으로 메우고는 절에서 잊어버린 「찻일茶道」을 이로써 알리려叢林 或有 趙州風, 而盡 不知茶道, 故 抄示可畏.… 어쩌구까지 해가면서 거창히 『다신전茶神傳』이라까지 이름 붙인데서, 받은 그 충격을 우리는 충분히 떠올려지고 그려진다.
그리고서, 그 해 겨울(1830. 45살)에 기존의 떡차(「보림백모寶林白茅」)를 들고 서울 올라가 「전다박사煎茶博士」로 이름내면서, 찻일을 부지런히 익혀가, 52살(1837. 여름)에 지은 게 바로, 『동다송東茶行․東茶頌』인 것이다.
하지만, 녹차 제다법에 한해서는 변함없이 비록, 청나라의 『만보전서』를 통하여 원본은 아니지만 명나라 장원張源의 『다록茶錄』(1595쯤)에 적힌 것을 베껴 『다신전茶神傳』이라고 이름한 만큼에다 또, 10해가 지난 『동다송東茶頌』에서도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심하게 말하면, 초의스님이 『만보전서』속의 이 「풍선輕團비빔법 가마솥덖음 수제작설녹차」 또는 「수구繡球비빔법 가마솥덖음 수제작설녹차」중심의 녹차제다법을 알게 되었고 또, 이를 스스로 터득해 갔다함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해, 칠불암에 갔다가 베낀 43살(1828. 여름)부터는 새로운 녹차제다법을 따라하여 『동다송』을 지은(52살) 이전에 이미 뛰어난 그 솜씨를 부리고 내보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81살(1866)까지 살고 절질法臘 무려 65해나 하는 동안에도 더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 익어가는 솜씨만 내 보인 것뿐.
물론 이미, 초의스님이 대흥사로 갔던(1804, 19살) 앞서의 벌써부터, 다승茶僧으로 이름높고,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차선생이면서도 10살 적은 아암(兒菴 惠藏, 1772-1811)을 보고(1805. 4. 17에 43살 다산이 강진에서 백련사가서 만남) 돌아오자마자 다산은 (또) 차(를) 달라는-걸명시(乞茗詩-「기증 혜장상인 걸명寄贈 惠藏上人 乞茗」)에,
焙曬 須如法-쬐고(덖고?) 말려 만듦 올바로-제대로 해야(만)
浸漬 色方瀅-우린 차빛 해맑으리.
한데서, 초의스님 또한 대흥사에(서) 옛부터 이어져오는 우림녹차 제다법도 잘 알아 나중에 『다록』의 제다법과 융합은 있었다 하겠다.
대흥사풍은 아암혜장의 수法제자이자 차제자인 수룡색성(袖龍賾性, 1777-?)이, 차만들어 보내오자 다산은 아암에게 앞의 걸명시 운韻으로 또 걸명시를 보내면서, 색성에게도 고맙다 보낸 시「謝賾性寄茶」에도,
草魁 頗善焙-(뛰어난 솜씨로) 아주 잘 만든 (어린?) 차라 하여, 이어짐을 본다.
이리하여 어느 핸가, 초의 스님의 차받고 추사가 보낸 편지에-「스님, 보내신 차는 심폐를 개운하게 해준다요! 하지만, 덖을炒 때마다 (불조절) 쫌 지나쳐 정기가 사라졌으니, 또 만들 때는 부디 제발쫌 불조절火候에 신경 써야겠오- 어찌 생각하시오?」茶品荷 此另存甚覺醒肺, 每炒法稍過 精氣有銷沈之意, 若更再製 輒戒火候. 如何如何.(『阮堂全集』권5, 8. 與草衣)하는 차품평도, 만든 게 바로 녹차임을 말한다.
또, 『동다송』을 지은 다음해(53살, 1938) 봄에, 서울로 스승 완호스님의 사리탑기(記) 부탁과 금강산 유람 및 자하와 추사들을 보러 가지고 간 햇차도 스님이 만든 녹차이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보내온) 차는 잘도 만들었으니佳製, (스님은 이제) 차(의) 삼매를 훤히 꿰뚫은 것이오!?」茶包 果是佳製, 有能透到 茶三昧耶.(『완당전집』권5, 17. 與草衣)라며 추사가 크게 칭찬을 하고 있어, 바로, 초의스님의 뛰어난 익은 제다솜씨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 편지는 적어도 55살 곧, 추사가 제주도(大靜)에 귀양가기(1840. 9) 전 어느 해로 보인다. 한편, 이 나이 때는 「대각등계 보제존자 초의선사大覺登階 普濟尊者 艸衣禪師」라는 호(賜號)를 헌종임금에게 받은, 잘 나가는 무렵(1840. 2. 10. 헌종6)이기도 하다.
「초의차草衣茶」에, 「명선茗禪」이름을 얻다!
65살(1850)의 봄, 일지암에서 스님이 보낸 햇-우전차雨前茶를 받은 추사 아우 산천도인(山泉道人 金命喜, 1788-?)이 보낸 고맙다는 시에는「附原韻」,
초의스님 우전차 바로 보내왔는데艸衣忽寄 雨前來
매발톱같은 여린 차, 대껍질에 싸였네籜包鷹爪 自手開
노스님(65살)은 마치 부처 고르듯 차(잎) 가렸나니老僧選茶 如選佛
오직 1싹1잎짜리로만이로구나一槍一旗 嚴持律
잘도 덖고 말리는 그 묘를 얻었으니尤工炒焙 得圓通
향과 맛을 제대로 나네從香味入 波羅密
이 비법 500해 만이니此秘始技 五百年
어찌 옛人天의 보살핌이 아니랴無乃福過 古人天
그 맛, 젖 못지 않으이明知味勝 純乳遠
하고선, 함께 적은 서문序文에 또다시, 「중국차보다 나은, 초의스님만이 얻어낸 제다삼매작製茶三昧作인 이 매발톱․보리알鷹爪․麥顆 우전차는, 高麗이래 500해를 지켜낸 슬기로운 솜씨라」며, 「초의스님만 알고․따고․제다법」인 것이라 적고 있어, 스님의 뛰어난 「(풍선輕團비빔법) 가마솥덖음 수제작설녹차」만드는 솜씨를 가졌음! 충분히 알려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받침자료가 되는 것.
뿐 아니라 드디어는 이제, 추사(1786-1856)가 「명선茗禪」이란 최고의 차호茶號까지 짓고 써내려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명선茗禪」의 글 양옆에다,
초의스님이 만들어 부쳐온 햇-우전차는 중국 몽정蒙頂․노아차露芽茶에 못지 않(았)다艸衣寄來 自製茗, 不減 蒙頂露芽.
이에 글과 글씨로 보답하오書此 爲報.
백석신군비의 예서隸書 필의筆意로, 병든 거사 씀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
라고, 대명차大名茶 몽정차(중국 사천성 명산현 몽산蒙山 상청봉上淸峯의 천하제일 명차)․노아차(중국 강소성 강녕현 방산方山의, 명차 대명사)와 견주는 뛰어난 우리 (우전)차-녹차를 만들어내는 「전다박사煎茶博士」 초의스님을 최고로 드러내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병든 거사病居士라 했으니, 오랜 제주도 귀양(1840. 9)에서 풀려 나와(1848, 63살) 쇠약해진 몸 추스르던 때이며, 바로 앞서 살펴본-아우가 기린 차와 당연히 함께 형도 받은, 잘 덖은 우전차임이 분명하니 바로 「명선茗禪」은, 65살(1850-추사와 초의스님은 동갑나기다!) 봄 때에 짓고 쓴 추사의 글씨와 솜씨라는 연대가 나온다.
그리하여, 다산의 첫제자이자 다신계(茶信契, 1818. 8. 30) 일원인 황상(黃裳, 1788-1870, 강진 大口출신, 추사가 최고의 시인이라 칭함-今世無此作!)이 2살 많은 초의스님에게 보낸 또한, 차 달라는-걸명시乞茗詩에 보이듯,
「초의차艸衣茶」란 그 이름을, 차를 잘하는 유산酉山선생에게 들었네艸衣茶名 聽先生(酉山 茶之善者, 謂之 艸衣茶)라 하여,
아예, 「초의차艸衣茶」란 이름-고유명사로 올라버렸다. 유산(酉山 丁學淵, 1783-1859)은 바로 다산의 맏아들이자, 다신계 계원이고 또한, 초의스님과 황상과 둘도 없는 사이!
나아가서는, 초의스님이 돌아간(81살, 1866) 12해 뒤인 1878해에, 34살 아래 (법)제자 범해(梵海覺岸, 1820-1896)스님 또또한, 스승의 이름 나툰 「초의차艸衣茶」란 이름시로,
곡우께 맑은 날 딴 여린 차싹을穀雨 初晴日 黃芽 葉未開
솥에 잘 덖어내어, 닫힌 구들방에 잘 말려空鐺 精炒出 密室 好乾來
잣나무곽에 넣어 봉인해 대껍질로 잘 감쌌네栢斗 方圓印 竹皮 苞裏裁
라 59살 나이에 읊음에서, 초의다풍을 그대로 잘 이어받았고, 받고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닫힌) 구들방에 말린다는 건조법이 바로, 혜장→색성스님으로 이어져 오던 대흥사의 옛 제다법을 초의스님이 (융합해) 이어준 것임도 알 수 있다.
손빨래치대기법 아닌, 풍선輕團비빔법 가마솥덖음 수제작설녹차
초의스님은 살펴본데로, 15살에 출가한 나주 운흥사와 19살부터 머문 해남 대흥사(일지암)에 이미 차와 찻일이 있어 이에 깊이 빠져 「전다박사煎茶博士」라 불리면서 43살 때, 원본인 장원의 『다록』(1595쯤)은 아니지만 칠불암에서 『만보전서』속에 있는 것을 베끼면서 사실, 새로운 녹차 제다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비비기 곧, 유념법이 특징인 「풍선輕團비빔법」 또는 「수구繡球비빔법」이라 이름 붙여보는, 손으로 가마솥덖음 녹차를 만드는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오늘날의 「빨래판법」 곧, 「손빨래치대기법」비비기-유념이 아니라, 우림차법 제다를 내세운 명나라 『다록』에 나오며(「조다造茶」편) 아직도, 중국에서 하고 있는 한마디로, 「덖은 차(잎)을 채반에서徹入篩中 오른쪽으로 둥글게둥글게 모아 돌려가며 두 손안에서 경쾌하게 (부드럽고 강하게=약+강으로) 유념하여輕團那數遍 만드는」 작설녹차용 제다법인 것이다. 바로, 기계유념기를 떠올리면 곧바로! 이해되는 것.
더구나, 초의스님은 「다신전」에서 10해나 지난 52살에 지은, 그 이름도 빛나는 『동다송』에까지 그대로 이 제다법만을 말하고 있어 다르게 해가지 않았음이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인가했듯, 이 제다묘법을 터득하여 드디어는 추사로부터 그 이름도 거룩한 「명선茗禪」이라는 차호茶號를 받게 되었다. 이 대단한 글씨는, 그의 아우 산천山泉(道人) 김명희가 초의스님에게 그리 잘 덖은 우전차를 선물받고 시詩를 보낸, 형 추사가 65살 때인 1850해 봄에 쓴 것으로 봐야한다.
왜냐면, 형이 초의스님과 더 친한데다 더구나 동갑내기이며, 아우가 그 좋은 최고의 차를 받을 때 형인 추사도 받음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아우는 글을 쓰고 형은 글씨를 써 보낸 것.
(* 하지만, 같은 호에 발표된 정민교수의, 황상처사와 초의스님이 1949. 겨울에 서로 주고받은 시-초의행「艸衣行幷小序」․일속산방가「一粟山房歌幷序」의 초의행 서문에, 일지암에서 「竹爐(之室)」와 더불어 이 「茗禪」을 감상하고 있어 바로 앞의 겨울이니, 그 해 봄-늦어도 한 해 앞선 작품이 되고 있다.)
받은 게 「몽정․노아」만큼 좋은 차라며 써준 호가 「다선茶禪」이 아니고 「명선茗禪」임은, 「다선茶禪」이 호가 되기엔 쫌 그렇기도 하겠지만, 추사가 굳이 茗 자체가 늦차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茗을 쓴 것은 茗=名 곧, 초의스님 차가 최고(이름난․유명한)라는 것을 밝히고, 새겨두고자 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
나아가, 또한 차를 잘 아는 다산의 맏아들 유산은 아예 「초의차艸衣茶」라고 고유명사로 박아버렸으며, 이 「초의차艸衣茶」는 초의스님의 제자 범해스님으로 이어짐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제 한시라도, 고작해야 46해(1962. 4. 화개골)도 넘지 못하는 전통도 아닌 이른바의 「(손)빨래(판)법」을 버리고 이 「풍선輕團비빔법」으로 가마솥덖음 수제작설녹차을 만들고, 이어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당연히, 이 방법이 유념과 형태도 잘 되고, 만드는 모양이 부서지지도 않는 과학적에다, 우려내는 맛과 향내도 말할 것 없으며 나아가, 중국에서 이제껏 지켜오고 있음에서도 그렇다 할 것이다.
산천도인이 한 말- 高麗이래 잊혀진 이 법제-제다법, 500해만에 초의스님이 찾아냈다 했다. 그럼, 오늘의 우리는 또 언제까지련가?!
<의․번역은 글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