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시는 하나님
스가랴1:7-17
고레스 칙령은 바벨론 포로지에서 고통과 치욕의 삶을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귀환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5만 여명의 유대인들은 힘을 모아 성전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훼방으로 말미암아 성전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다리오 왕 2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무사안일에 빠져 있던 유다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자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욕을 갖고 다시 시작된 성전 공사가 5개월이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공사가 난관에 부딪쳐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여덟 가지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은 스가랴가 본 첫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가 보니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의 정체가 궁금하여 그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낸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홍마와 자마와 백마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기를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온하여 정온하더라>고 했습니다. 온 땅은 파사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가리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하는 제국은 파사였고, 제국의 신민들은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했고,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내 집이 예루살렘 가운데 건축될 것이다.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하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Ⅰ. 홍마를 탄 여호와의 사자
홍마를 타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사람은 누굽니까?
<홍마>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홍마를 탄 사람>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심판하실 심판자와, 자기백성들을 구원하실 구원자를 상징합니다.
<화석류나무>는 이스라엘 선민을 상징합니다.
<골짜기 속>이라고 함은 어두운 그늘, 혹은 깊이 빠져 들어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고난을 상징합니다.
홍마를 탄 채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켜 1장 8절에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장 9절에는 <주>라고 했습니다. 1장 11절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1장 12절에도 <여호와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실 때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홍마를 타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던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할 때에 다급한 목소리로 아브라함을 만류하던 그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불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 그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마노아 부부를 찾아오셔서 나실인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시며, 자기 이름을 기묘자라고 알려 주시던 그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고, 야곱을 만나주시고, 마노아 부부를 만나주시고, 스가랴를 만나주신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 하나님 중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 이전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홍마를 타시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Ⅱ. 메시야의 중보기도
예수께서 홍마를 타시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계셨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전 건축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실의와 좌절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은 홍마를 타시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계십니다. 이유는 삶의 세파 속에 지친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소망과 용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파사제국의 온 땅이 평온하여 정온하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아니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 십 년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신 칠십 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바벨론 포로 기간을 가리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끝났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종교적, 경제적 어려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중심, 교회중심, 성경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려도 가뭄과 병충해로 제대로 수확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으로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움에 허덕거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탄원하셨던 것입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복은 하늘의 해나 달이나 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암괴석이 주는 것도 아니요, 죽은 조상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노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할지라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됩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역은 택자들을 향한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낮이나 밤이나 택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같이 택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와 택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이 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만군의 여호와여 언제까지 새 영광교회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렵니까?
2)만군의 여호와여 언제까지 새 영광교회를 섬기는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렵니까?
3)김 집사를 긍휼히 여겨주시지 아니하시며, 박 집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렵니까?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멈추지 아니하는 한 우리에게 찬란한 내일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Ⅲ. 기쁨의 좋은 소식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기도는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응답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가 들은 기쁨의 좋은 소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장 14절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크게, 깊게, 무겁게, 뜨겁게, 열정적으로,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사랑 고백의 각별한 표현입니다.
사랑 고백을 받아보셨습니까? 누군가로부터 듣는 사랑의 고백은 확실히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는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사랑 고백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힘이 솟고, 살맛이 납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 고백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만 사랑 고백도 누구로부터 듣느냐에 따라서 그 기분과 강도가 달라집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 것도 기쁠 것입니다. 자녀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 것도 행복할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고, 아내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 것도 행복이 충만할 것입니다. 이성 친구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 것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 다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최고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사랑 고백을 듣는 것입니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박 집사, 너를 사랑한다. ->들리십니까?
김 집사, 너는 내 관심의 대상이요, 내 사랑의 대상이다. ->아멘입니까?
정 집사, 내 안에 네가 있다. ->믿습니까?
최 집사, 너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믿습니까?
임 사모,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아멘입니까?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비록 고난의 떡을 먹고, 환난의 물을 마시며,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이요,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 다시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관심조차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장 15절에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고 고난을 더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질투하도록 사랑하지만 안일한 열국에 대해서는 심히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일한 열국에 대해서 심히 진노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방탕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조금이었습니다. 자식이 방탕하면 아버지는 회초리를 듭니다. 회초리를 드는 목적은 자식을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때려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의 징치를 위해 바벨론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은 강력한 군대로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피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은 사나운 이리처럼 포학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한 것처럼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흘린 피와 고통 위에 집을 짓고 형통을 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그래서 심히 진노하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대적이 있습니까? 수고하고 애써 노력하여 만든 사업장을 통째로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대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대적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파수꾼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낮의 해가 상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의 대적이 누구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물리쳐주실 것입니다. 대적의 위협과 해침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Ⅳ. 이스라엘이 받은 특권과 복
하나님의 응답은 사랑고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낙심과 낙담과 실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선민이 누릴 특권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특권과 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관계의 회복입니다.
스가랴 1장 16절에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라고 했습니다.
혹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는 표현을 두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있고, 떠나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 한 번도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없었고, 이스라엘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을 떠난 분이 있습니까? 억지로 예배에 참석한 분이 있습니까? 축복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은 사랑의 회복과 신뢰의 회복입니다. 사랑을 회복하고, 믿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전 건축의 완공입니다.
스가랴 1장 16절에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라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 공사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16년 동안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고, 다시 시작된 공사도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완공되었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종교적 복구를 의미합니다.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 저는 이 말씀에 무한한 은혜를 느낍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당신이 거하실 집을 건축하십니다. 어디에 건축하시는가? 성도의 몸입니다. 성도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우리 몸을 세상의 것들로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예루살렘 성의 재건입니다.
스가랴 1장 16절에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진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 번 다시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잃는 아픔을 겪지 아니할 것이라는 정치적 복구를 의미합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여 고통 중에 있습니까? 건강을 잃어 낙심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업의 문을 열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다시는 수치와 아픔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넷째, 예루살렘의 번영입니다.
스가랴 1장 17절에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다>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안에 많은 사람들이 거하며, 옛날처럼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물질 축복의 복구, 경제적 복구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직장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건강입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섯째, 예루살렘의 안위입니다.
스가랴 1장 17절에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겠다>는 말씀은 환난과 근심과 고통이 없도록 지켜, 보호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업의 문이 열리고, 건강을 되찾고, 명예를 얻어도 환난과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아니한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심, 걱정을 물리쳐주시고, 평강에서 평강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홍마를 타고 그 가운데 서 계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골짜기 속에 있는 화석류나무는 세계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세상 속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고난의 떡을 먹고, 환난의 물을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홍마를 타고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는 중보자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것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시고, 흥왕케하려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결코 망할 수 없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찬란한 시온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계속되는 한 이스라엘은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고, 축복자가 될 수밖에 없고, 캄캄한 어둠 중에 있어도 빛나는 시온의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