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정원경.... 봉화읍 소재지에서 91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10여 km 올라가면 물야면 소재지에 이른다. 소재지에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로 뽑힌 물야초등학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소나무·느티나무 거목들이 우거진 학교 앞을 막 벗어나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쪽으로 둔덕에 전에 없던 풍산김씨 오록리 터전을 연 입향조 노봉 김정의 추모비가 떡 버티고 서 있다. 풍산김씨 오록문중에서 이 터전을 연 지 300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그 이후에 마을이 계속 번창하였다. 지금 마을 앞 물야중학교 입구에서부터 마을 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 100여 m 가량 울울하게 우거져 있는 곳이 바로 솔씨를 심은 곳이라고 한다. 다만 추모비가 너무 거창하여 풍수지리를 몰라도 마을 터로서는 기막힌 명당이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갈봉산 너른 자락에 넓게 펼쳐진 오록리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심하게 가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비는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정면난간.. 오른쪽난간.. 오른쪽측면.. 오른쪽측면마루.. 만축정.. 만축정중수기.. 만축정상량문.. 장암.. 누정이야기... 장암 김창조는 유연당 김대현의 3남이다. 김대현은 어려서 우계 성혼에게 배웠다. 그는 보지 않은 글이 없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특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애독했다고 한다. 김대현은 장성해서는 영남으로 돌아와 23세에 안동 풍산의 오릉동 종택을 중수 이건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36세에는 영주에 유연당(悠然堂)을 짓고 이거했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뛰어나 중망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영주 이산서원장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대현은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執使) 김륵(金?)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1602년 50세를 일기로 산음현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대현이 세상을 떠날 때 남은 옷이 없어 고을의 선비 오장, 권집, 박문영 등이 자신의 옷을 벗어서 소렴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청렴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이다. 그는 유교 도덕이 중심이 된 가훈을 정하여 자녀를 가르쳤고 자식들의 학문 성취에 대해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가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예법에 알맞게 하고 모든 일 처리는 빈틈없고 상세하게 하고 어질고 착한 행실을 힘써 실천하라. 질투하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라. 남의 은혜를 잊지 말고, 원수나 원한을 맺지 말라.” 그의 아들 9형제 가운데 한 사람만 16세의 어린나이에 요절하고 8형제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가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 오무동(五畝洞)을 오미동(五美洞)이라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鳳凰閭)라 편액한 문을 세우게 했다. 학호파· 망와파· 장암파· 심곡파· 광록파· 학사파· 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번성한 일문을 이루었다. 8형제는 안으로 선조의 가학전통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서애, 학봉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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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풍대08블로그임다 원문보기 글쓴이: 어풍대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