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 11월 경북대학교 대강당에서였다. 전국학술단체연합과 전국지역사회연구회연합이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에서였다. 리영희 선생님은 그 대회의 기조연설을 맡으셨다. 그날 기조 발제하신 내용은 한국 지성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경제적 급변을 정리하고 그 위에 이념・사상적인 폭발을 길게 늘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 80년대 한국 사회의 역정을 다 추적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선생님의 기조 발제가 “사건”이었던 이유와 관련된 범위에서, 그것도 나 자신의 시각에서 가능한 한 간략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나는 80년 3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된 31명과 함께 복학했다. 복학생들은 학내운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어용교수 문제에만 나서기로 했다. 나는 어용교수 백서 작성을 위해 자료 수집만 하기로 양해를 얻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일간지, 잡지, 학보 등을 뒤져 유신쿠데타에 동조하거나 박정희 업적을 찬양하는 글이나 논문을 작성한 교수를 검색했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학내의 어용학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총학생회가 구성되자 복학생 몇 명과 운동권에 있거나 강제징집되었다가 제대한 친구들이 총학생회를 물밑에서 지도하기로 했다. 나는 그 조직에 들어가라는 선배들의 권유를 완곡히 사양했다.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후배 중 한 사람과만 연락하며 대학원 진학 공부에 열중했다. 독일어, 영어, 철학사를 주로 공부했다. 한때 꿈이었던 스포츠 전문기자는 이제 완전히 접었다. 5월 17일 밤 9시 30분경 그 후배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계엄령이 확대되고 사전 검속이 시작되었소. 방금 조선대 이소영 집에 권총 찬 형사 넷이 들이닥쳤다요. 무조건 얼른 피하시오.” “너는 지금 어디냐?” “형은 먼저 부산으로 가쇼. 지금 바로 역에 가면 야간열차 탈 수 있을 거요. 모레 부산역에서 봅시다. 난 여기서 연락 계속해야 하요.”
나는 그 통화로 어찌어찌해서 그해 8월 말까지 서울 용산역 부근에서 달방을 얻어 비겁자로 살았다. 광주에 내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비겁함은 이후 5년 가까이 나를 힘들게 했다. 5월이 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했다. 9월이 다 되었을 때 여기저기 연락해 봤더니 수배자라면 모를까 사전 검속 대상은 풀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슬며시 내려왔다. 그리고 80년 2학기를 허송세월했다. 무력감과 낭패감과 자괴감에 찌들어 살았다.
그렁저렁 연말이 되었다. 졸업생 환송 파티가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나가서 뭐 하나 싶었으나 호기심에 나가 봤다. 못 보던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내년부터 정식으로 임용되실 최재근 교수셨다. 우선 이번 학기 시간강사로 서양 근세철학사와 역사철학을 담당하셨단다. 훌쩍 큰 키에 미남형이셨다.
환송식이 끝나고 남학생 몇 친구가 교수님과 함께 2차를 가자길래 따라갔다. 모임 장소인 중국집 ‘여명’에서 나와 학생회관 옆 골목에 룸이 딸린 술집으로 갔다. 최 교수님이 안내하셨던 것 같다. 나는 우연히 최 교수님 옆자리에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대화가 뜸해졌을 때 나는 좀 건방진 마음이 생겼나 보다. 교수라는 분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나는 한껏 도도하게 질문했다. “교수님,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요?” 순간 좌중은 얼어붙었다. “술자리에서 저따위 질문을 하다니!”라기보다는 철학과 4년 다닌 깜냥으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다름 아니라 내가 황 선생님과의 첫 수업에서 들었던 것이었다. 교수님은 약간 놀라기는 했어도 가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내게만 들리게 나지막하게 답하셨다.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이지.” 나는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양반의 정체는 뭐지?” 내가 미쳐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교수님은 화제를 돌려 대화를 주도하다가 술자리를 끝내셨다.
술집 앞에서 모임을 파할 때 교수님이 내 팔을 끌어당기셨다. 그리고 앞장서서 골목 어귀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가셨다. 포장마차에서 교수님과 나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일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주교도소 특사에서 겪은 일들과 만나 뵌 선생님들 이야기, 4.19 공간의 교원노조 이야기, 5.16 후 동명동에 있었던 광주형무소 살이 이야기, 마르크스주의 철학 이야기. 결론은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수님 지도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독일어로 읽자는 것이었다.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나는 틈나는 대로 예전에 알았던 선후배들과 교류를 계속했다. 주로 함께 책을 읽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이다. 후배 하나가 어떻게 구했는지 일어본의 재복사본을 구해 와서 4~5명 단위로 몇 개 모임을 만들어 윤독했다. 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사상에 탄복했다. 그러던 중 후배가 물었다. “형, 실천론을 번역해 볼 생각은 없소?” 실천론은 비교적 짧은 단편이었기에 한 번 해보자 싶었다. 사전을 뒤져 가며 번역을 마쳐 건네주었다. 당시 사회과학출판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불온서적 판정을 받으면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실천론도 어느 출판사에선가 “편집부 역”으로 출판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전남대학교 도서관에는 특별 장서가 여럿 있다. 그중에 서동익 박사 서고도 있다. 나는 이 특별 장서가 도서관에 들어오는 과정에 일부 관여했다.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에서 발행한 철학교정 전권을 대출을 통하지 않고 외부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것을 후배에게 부탁하여 복사했다. 전국 각지에 이 복사본의 복사본들이 유행했다는 말을 들었다. 철학교정은 스탈린 시대에 편찬된 공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교과서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엥겔스 원전 연구를 자극했을 것이다.
84년 말이었던가 85년 초였던가 내가 조교를 마치고 강의를 맡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다시 그 후배가 찾아와 상의했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학습 모임을 몇 개 조직했는데, 형이 철학을 맡아주시오.” 그렇게 해서 나는 5~6년 동안 여러 층위의 노동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87년 6월 항쟁 때이다. 대개 밤늦게나 휴일에 열리는 수업에 최루탄 냄새를 풍기면서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질문을 하면 최선을 다해 답변하려고 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그해 7월 한 달 내내 노동조합 건설 투쟁을 목도하면서 바야흐로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도 한몫한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거의 같은 무렵이었다. 젊은 연구자들이 분야별, 지역별로 모여 학술연구자 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학술 운동이었다. 학술연구단체 설립 취지문은 예외 없이 전두환의 폭정을 비판하고 대항하는 어떤 이론이나 실천도 보여주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학문적 태도를 공격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들은 진보적인 학술 이론을 소개 연구하고 전두환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연구 분야는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등 학문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전공 관련 연구 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지역의 전남지역사회연구회에서 사회학, 정치학 전공자들과 어울려 정치경제학 분야 공부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교육 활동도 빼놓지 않았으며, 선진적인 노동자들 혹은 운동권 선후배들과의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석사를 마친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주변에서 박사과정 입학을 권유했지만 나는 굳이 교수가 공부를 시작한 목표가 아니어서였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