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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홉 가지 재앙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완강했습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하고 있던 자유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 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출12:3b),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열 나흗날 해 질 무렵까지 두었다가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잡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다가 잡은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야 한다.”(출12:6-7)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각 가정마다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맞춰 양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이 정해 주신 날에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양의 피는 따로 받아서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함께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들이 자유를 얻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받고 순종한 사람들은, 난공불락처럼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바로의 권세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홍해가 나타났습니다. 뒤에서는 다시 욕심이 발동한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좌우는 까까 지른 절벽이었습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출14:11b-12)라고 외쳤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불신앙이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백성들은 당장이라도 돌을 들어 모세를 칠 기세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그들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출14:13-14)라고 외쳤습니다. 현재 상황이 아무리 절박하다 할지라도 다급해 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라고 외쳤습니다. 조용히 주어진 상황을 맞이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시는지 기대하라고 외쳤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명령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왜 부르짖느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출14:15b-16)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는 “너는 어찌하여 소리 질러 내게 기도만 하고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책망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는 “장막 말뚝을 뽑아 챙긴 후 곧장 전진해 가다.”라는 뜻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장막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비록 위험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홍해 쪽으로 발길을 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라는 명령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지팡이로 무수히 많은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각종 세력들이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 앞에서 굴복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상징했습니다. 거기다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 등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 그 때, 모세는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출4:20)라는 말씀에 따르면,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평범한 지팡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특히 사도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롬11:36a)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절대 주권과 섭리로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십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변화를 주기도 하십니다. 실제로 아모리 다섯 왕과 가나안 연합군을 쫓고 있던 여호수아는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수10:12b)라고 외쳤습니다. 천지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도와주심을 구했습니다.
성경은 “백성이 그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어 섰다. ‘야살의 책’에 해가 중천에 머물러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이 날처럼 이렇게 들어주신 일은 전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을 편들어 싸우셨다.”(수10:13-14)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해와 달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때까지 함께 떠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친히 이스라엘의 편이 되셔서 싸워주셨습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애원하여 부르짖는 기도만 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놀라운 이적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다. (모세가 순종하자)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출14:21-2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순종과 함께 강하고, 맹렬하고, 건조한 동풍이 불어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도도히 흐르고 있던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닷물이 밀려난 자리를 적시고 있던 물기를 말렸습니다. 사막같이 마른 땅을 드러냈습니다. 200만에서 300만에 이르는 남녀노소는 물론 수많은 짐승들과 각종 수레들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단단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바로의 병거가 진입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흐르던 물은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는 담 또는 벽이 되었습니다. “바다를 갈라서 물을 강둑처럼 서게 하시고, 그들을 그리로 걸어가게 하셨다.”(시78:13),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라고 물었다. 그들은 왕에게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단3:24)라는 말씀에 따르면, 아무리 사나운 물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동행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백성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불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10:29-31)라고 곧 친히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택한 자의 머리털 하나 범할 수 없다고 선포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탁월한 복입니다. 가장 기막힌 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친구들은 욥을 설득하기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욥의 입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욥의 독백이라고 할 수 있는 29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욥29:1)라고 시작됩니다. 이는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욥27:1)라는 구절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29장부터 31장까지는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벌이는 최후의 변론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내놓은 공식적인 선언과 진술을 독백의 형식을 빌려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27장보다는 훨씬 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그때는”(3a, 5a, 7a)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때같은 자식들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소유 전체를 다 잃었습니다. 육신마저도 도무지 치료할 수 없는 악창으로 인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누리고 있던 안정되고, 형통하고, 행복했던 삶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절대 절망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역시 절대 주권과 섭리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외에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믿음의 손만큼은 절대로 놓을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최후 변론을 시작하면서 영화로웠던 지난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비참한 상황 속에 던져진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 같이 되었으면”(욥29:2)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이전 달”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난날들”입니다. “흘러간 세월이나 때”라는 의미에서의 과거라기보다는 비참한 현재의 상황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안정되고 풍요롭고 행복하기까지 했던 과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욥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보호하시던”은 “울타리를 치다, 지키다, 책임지다, 안위하다” 등의 뜻입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 지켜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 주변에 울타리를 치십니다. 특별히 보살펴 주십니다. 모든 상황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극한 고난의 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절대주권을 행하시는 하나님만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자신의 인생 역시 바로 그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욥29:3)라고 고백했습니다. “등불”과 “광명”은 동의어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등잔에 불을 붙여 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둘러싼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셨습니다.”(시18:28),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생명입니다. 번영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들입니다.
“그 성에는 해와 달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이 되고 어린양이 그 성의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계21:23)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2절의 “보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축복과 돌보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인생행로를 늘 조명해 주십니다. 인도해 주십니다.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끊임없이 섭리해 주십니다. 견디기 힘든 혹독한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에는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안전을 책임져 주십니다. 바른 길을 걷도록 하십니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는 크고 놀라운 은혜들을 베풀어주십니다. 욥은 이 고백을 통해서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혹독한 고난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인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절부터 10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회상은, 단순한 추억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강력한 주장입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려버린 재앙의 부당함에 대해서 부르짖는 호소입니다. 행복했던 과거를 회복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열망입니다.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욥29:4a)라고 고백했습니다. “강장하던”의 문자적인 의미는 “수확기를 보내다.”입니다. 명사형으로 쓰일 때는 “수확물” 또는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뜻합니다. 다른 성경들은 “전성기Prime”(NIV), “청년시절Early years”(LB)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신체적으로 나이를 먹거나 성숙함의 정도라기보다는 일생에 있어서 가장 왕성했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욥의 간절한 소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부당한 재앙과 불행을 안겨주신 하나님에 대한 강한 저항이 깔려 있습니다.
원망과 불신앙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욥29:4b)라고 고백했습니다. “우정”은 “세우다, 기초를 놓다, 설립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친근함”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호하심과 비밀”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 한 분만 알고 있는 은밀한 일 곧 비밀을 가르쳐주기도 하십니다. 친밀한 우정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호”라는 단어(2)와 의미(3, 4)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지켜 주십니다.”(시145:20a)라고 노래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네가 걸을 때 그것이(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인도하겠고, 네가 잘 때도 그것이 너를 지켜 주며, 네가 깰 때도 그것이 네게 말할 것이다.”(잠6:22)라고 외쳤습니다. 전도자 역시 “지혜도 사람을 보호하고 돈도 사람을 보호해 주지만, 지혜가 돈보다 나은 것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전7:12)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과 가까운 친구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으십니다. 모든 악한 상황들로부터 책임지고 보호해 주십니다. 책임지고 지켜주십니다. 책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욥은 다른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를 책임지고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당장이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욥29:5)라고 고백했습니다.
“전능자”는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총48회 등장합니다. 욥기에만 무려 31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식탁에 둘러앉은 그의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의 새싹들과 같을 것입니다.”(시128:3b)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자녀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부모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뛰놀며, 풍성한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서 먹고 마시며, 즐겁게 떠드는 자식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과거 곧 욥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동행하셨습니다. 축복해 주셨습니다.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그를 대적할 수 없도록 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그가 누리고 있던 풍요와 행복을 파괴하거나 빼앗아 갈 수 없도록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버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 내었으며”(욥29:6)라고 고백했습니다. 버터와 기름은 하나같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으로부터 떠나 당신을 경외하는 그에게 막대한 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누리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혹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버터로 발을 씻을 수 있을 만큼 풍족하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세의 명령을 받은 반석이 이백만 명에서 삼백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한 물을 냈을 때처럼, 무진장의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각별한 은혜였습니다. 각별한 축복이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수평적인 관계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행복한 사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적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욥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은혜와 축복은커녕 절망의 정점을 치닫고 있습니다. 삶 어디에서도 과거에 누렸던 그 많은 행복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계셨으며”라는 고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셨다. 그 결과 나는 누리고 있던 모든 은혜와 축복들을 단 한 가지도 남김없이 다 잃어버리게 되었다.”라는 절규이기도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을 회복하고 싶다.”라는 소원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이 성공하게 되었습니다...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창39:2-3)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형통의 궁극적 원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버려지게 된다 할지라도 무조건 형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형통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영적입니다.
물질적 형통은 영적 형통의 결과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마6:33)라는 주님의 약속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야 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이유였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간절히 사모했던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던 날, 바지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즐거워하며 기쁘게 춤을 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욥이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회복하고 싶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욥이 풍요로웠던 과거를 돌아보며 회상하고 있는 모든 복들을 누릴 수 있었던 궁극적 원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꽃을 피울 것이다. “사막이 풍성한 꽃들과 함께 기뻐 외치며 즐거워할 것이다. 레바논의 숲처럼, 갈멜의 산과 샤론의 평야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광채를 볼 것이다.”(사35:1-2)라고 외쳤습니다. 사35장은 메시아 왕국 곧 하나님 나라와 관련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사모하는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인생 곧 죄 많은 세상입니다. “꽃”은 백합화입니다. 풍부한 강우 뒤에 즉시 만개합니다. 온 땅을 융단처럼 수놓습니다. 레바논은 향기로운 백향목으로 유명합니다. 갈멜은 웅장한 상수리나무로 유명합니다. 사론은 꽃들과 비옥한 목초지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하나같이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상징합니다. 광야 같이 메마른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폭우처럼 쏟아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함께하시게 되면 백합화 같은 아름다운 꽃들이 봉우리를 터뜨립니다.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환경, 상황, 조건이 나빠도 좋고, 좋으면 훨씬 더 좋습니다. 삶은 아름답고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마음에 근심하는 사람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하나님이 너희의 원수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오셔서 너희를 구해 주실 것이다.’라고 일러주어라.”(사35:3-4)라고 외칩니다.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를 원문대로 해석하면, “강하게 하라. 축 처진 손들을! 그리고 흔들리는 무릎들을 굳게 하라!”입니다. 밑으로 처진 손은 연약함을, 흔들리며 요동하는 무릎은 버티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삶의 목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힘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리 가까이 하고 싶어도 도무지 닿을 수 없다고 탄식하며 도와주심을 구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빠짐없이 들으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친히 임마누엘하십니다. 그들과 친히 함께 해 주십니다. 그들을 억압했던 원수들을 공의로 다스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철저히 복수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참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의미와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일방적인 은혜를 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들을 것이다.”(사35:5)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시는 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됩니다.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사람이 기쁨으로 노래할 것이다.”(사35:6a)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면 다리를 절던 사람들은 사슴처럼 뛸 수 있습니다. 벙어리는 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육체적입니다. 전인격적입니다. 총체적입니다. 영적입니다. “광야에 샘물이 흐르고 메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사35:6b)라고 외칩니다. 광야처럼 메말랐던 영혼에는 은혜의 샘물이 터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강물처럼 흘러넘칩니다.
“불타는 사막이 연못으로 변하고 마른 땅이 물을 뿜어내는 샘으로 변하며 이리가 살던 곳에 풀과 갈대와 왕골이 자랄 것이다. 사막이었던 땅에 큰 길이 날 것이며 그 길은 ‘거룩한 길’이라 불릴 것이다. 악한 백성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하고 오직 의로운 백성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도 그 길을 밟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 길에서 그런 짐승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 길로는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만 다닐 것이다.”(사35:7-9)라고 외칩니다. “불타는 사막”은 신기루입니다.
물 없는 가짜 오아시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갈증과 절망을 안겨주었던 가짜 오아시스는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진짜 못으로 변합니다. 마른 땅은 물이 풍성하게 솟아나는 샘으로 변합니다. 시랑의 굴은 갈대와 부들이 자라는 윤택한 초장으로 변합니다. 길을 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시온의 대로가 열립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거룩한 길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만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아무리 용을 쓴다 할지라도 결코 걸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과 신학과 경험으로 무장했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는 영혼은 걸을 수 없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별되었다 할지라도 구속 받지 못한 백성들 역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유를 주신 백성이 시온에 돌아와 영원한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멀리 사라지고 즐거움과 행복이 넘칠 것이다.”(사35:10)라고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자유를 주신 백성”은 앞서 살펴본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과 동의어입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이라는 소망 넘치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출6: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고엘”로 소개하셨습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 죄로부터의 구원, 시온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이라는 주제로 발전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속하셨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던 본토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함께 타락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모진 고난과 핍박 속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 내 몰았던 허물과 죄를 회개하고 당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 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온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다른 보혜사로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한편, “슬픔과 고통은 멀리 사라지고 즐거움과 행복이 넘칠 것이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을 따라잡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생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시온을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 곧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다하지 않는 기쁨과 즐거움이 따라다닙니다. 슬픔과 탄식은 아주 떠나버립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실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혼은 죽음과 함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육체는 부활의 순간 흙무덤으로부터 돌아와 마침내 하나님 앞에 마주서게 됩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우리 가운데 친히 임마누엘 하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놀라운 복입니다. 가장 기막힌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구해야할 복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제외한 나머지 복들은 하나같이 주어져도 되고 주어지 않아도 됩니다. 덤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십니까? 현대인들이 가장 큰 복으로 꼽고 있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과 건강 등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덤 정도로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고 있습니까?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과 평안과 만족으로 충만한 시온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까? 가장 크고 놀랍고 기막힌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2천 년 전, 예수께서는 로마 사형수가 되어 갈보리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심지어 주님과 3년 반 동안이나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했던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끔찍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가장 큰 복, 가장 기막힌 복,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복,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임재 하셔서 동행하실 수 있는 복된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친히 임마누엘 하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과 시험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만족과 안식이 넘치는 시온의 복 곧 하나님 나라까지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현장에 친히 임재 하셔서 함께 동행 해 주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만족과 안식이 넘치는 시온 곧 하나님 나라라는 가장 기막힌 신령한 복은 물론 땅의 복까지도 덤으로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