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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방사탑 1호 ) |
(무릉방사탑 2호 ) |
방사용 돌탑들은 마을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거욱대·까마귀·극대·거왁·탑·답·가마귀·거오기·가매기동산·거웍·가막동산·가마귓동산·액탑·매조자귀 등으로 불린다.
어떤 마을에서는 거욱대와 방사탑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거욱대 역시 탑과 같은 연유에 의하여 세운다. 영평하동의 경우 풍수지리적으로 남북이 허하다 하여 남대북탑(南臺北塔), 즉 남쪽에는 거욱대를 세우고 북쪽에는 방사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방사탑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돌탑들을 총괄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만들어 낸 학술적 용어일 뿐, 제주도민들이 직접 사용하는 명칭은 아니다.
방사탑의 형태는 원뿔형, 사다리꼴형, 그리고 불규칙형으로 나누는데, 도내 방사탑 중 5~6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탑은 원뿔형이다. 유형으로는 돌무더기 그 자체의 석적 단독형과 돌무더기 위에 돌하르방과 닮은 석인상, 자연석, 나무 새 등의 형체를 얹은 석적 복합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방사탑을 만드는 과정은 우선 큰 돌로 밑단을 둥글게 한 뒤 그 안에 잔돌을 채우고 다시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차츰 원통형이 되게 만든다. 탑을 쌓아 올리기 전,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은 후 그 위에 사람의 키 높이 이상으로 돌을 쌓는다.
밥주걱을 묻는 이유는 솥의 밥을 긁어 담듯이 외부의 재물을 마을 안으로 담아 들이라는 뜻이며, 솥을 묻는 이유는 무서운 불에도 끄떡없이 이겨내는 솥처럼 마을의 액운을 막아 달라는 뜻에서 나온 유감주술적인 사고이다.
맨 위에는 마을마다 돌하르방이나 동자석처럼 생긴 석상 또는 까마귀나 매를 닮은 돌 등을 올려놓는다. 까마귀와 매는 주로 돌로 만들지만 비자나무나 참나무처럼 비바람에 좀처럼 썩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흔히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를 만들어 세우는 까닭은 까마귀로 하여금 궂은 것을 모조리 쪼아 먹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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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방사탑 4호 상부 조형물) |
(무릉방사탑 4호) |
1995년 8월 26일 제주 지역에 있는 방사탑 17기가 시도민속자료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방사탑으로는 제주시 도두동의 몰래물마을 방사탑1-2호, 제주시 이호2동의 골왓마을 방사탑 1-5호,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의 용수마을 방사탑 1-2호,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의 신흥리 방사탑 1-2호,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1리의 무릉리 방사탑1-4호,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의 인성리방사탑 1-2호 등이 있다.
1997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강창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도내에 39기의 방사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사탑은 약 50년 전만 해도 제주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었으나 근래에는 원형을 갖추고 있는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방사탑은 방사의 의미는 희석된 채 탑동 야외음악당이나 목석원 또는 산굼부리 같은 관광지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처럼 제주를 상징하는 현대 조각품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방사탑은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마을 주민 공동의 작업으로 만들어진 축조물이라는 점에서 공동체 문화의 상징적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산재한 잡석으로 쌓아 투박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방사탑은 화산섬 제주의 자연환경이 만들어 낸 조형물임과 동시에 절해고도의 풍수지리가 만들어 낸 마을신앙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진성기, 『제주도민속』(제주민속연구소, 1969)
• 진성기, 『제주민속의 멋』(열화당, 1979)
• 강정효, 『화산섬, 돌이야기』(도서출판 각, 2000)
• 이윤형·고광민, 『제주의 돌문화』(제주돌문화공원, 2006)
• 강창언, 「제주도의 방사용(防邪用) 탑」(『제주도사연구』4, 제주도사연구회, 1996)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제주특별자치도청(www.jeju.go.kr)
무릉鄕舍
무릉리 2896번지에 있는 향사는 조선초 안성리에 있던 대정현 객사를 옮겨 마을의 공무를 보던 곳이다. 그 후 무릉지서, 무릉출장소, 모슬포우체국 무릉분국으로 사용되다 방치되어 노후한 것을 남제주군에서 1990년 복원하였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남제주군·제주대학교박물관, 1996.)에 의하면 지금 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에 있는 무릉향사(武陵鄕舍)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대정현 객사(客舍)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향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에 합작지붕이다. 기둥과 평방·창방 일부는 옛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모자란 부분은 새 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두지 못하고 옮겨야 했던 현실이 아쉽다.
여러 비석을 모아 세워놓은 곳
대정현은 충·효·열의 고장
유배 온 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 꼿꼿한 성품을 본받아서인지 대정읍 관내에는 유난히 의사비와 효자비, 열녀비가 많다. 의사비로는 앞서 소개한 삼의사비(三義士碑)를 빼고도 구제국묘비와 김만석비가 있다. 구제국(具濟國)은 1812년 홍경래난 때, 근왕병을 창의하여 출병하기로 하고 전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출병하려던 분이고, 김만석(金萬石)은 1907년 고종(高宗)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총살을 당한 분이다.
효자비로는 문달복비, 문달민비, 현재옥비, 강인홍비, 박창진비가 있는데, 문달복(文達福)과 문달민(文達敏)은 종형제로 편모 슬하의 문달복은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소생시킬 정도의 효자이면서 철종의 국상 때 자진하여 나아가 토역(土役)한 충신이고, 문달민 역시 부친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소생시킨 효자이다. 현재옥(玄才玉)은 부모의 공양을 남달리 잘해서, 강인홍(姜仁弘)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도 커서 할아버지를 잘 봉양해서, 박창진(朴彰振) 역시 병든 아버지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6년간 목숨을 연명하게 한 이름난 효자들이다.
열녀비로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다 살아남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신 신평리 박성림의 처 오씨(吳氏), 역시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다 병든 시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고 죽어 장사를 지낸 후에 남편을 따른 창천리 강응주의 처 김씨(金氏)의 비를 들 수 있다.
잎 떨궈 낸 팽나무들 세월 흐름도 멎은 듯
<제민일보> 2001년 12월 24일
▲ 무릉2리와 산양리 경계에 자리잡은 자록수.
옛날 한라산 암사슴이 내려와 물을 마셨던 못이라고 한다.
◈앞논물·손당못(대정읍 무릉1리)
◈곤물·구남물·자록수(대정읍 무릉2리) ②
하늘이 무척 낮다. 구남못에 금새라도 눈발을 뿌릴 듯 하다. 지난 가을 잎을 떨궈낸 팽나무를 본다. 나목(裸木)으로 변한 채 세월의 흐름도 멎은 듯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다. 황량하다. 스산하다. 구남못 주변에 있는 팽나무는 모두 네 그루다.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것으로, 못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다.
팽나무(폭낭)
지금은 침묵의 시간. 겨울은 그러나 결코 죽음의 계절이 아니다. 나목들은 긴긴 겨울동안 따뜻한 봄을 꿈꾼다. 추운 겨울 동안 나목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는 마치 모든 활동이 정지한 듯 보일런 지 모르겠다. 그러나 뿌리는 이듬해의 봄을 맞기 위해 차가운 땅속에서 필요한 자양분을 골고루 충분히 흡수하는 노력을 쉼 없이 하게 된다. 이름 모를 들풀 한 포기조차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구남못은 주로 음용수와 우마급수장으로 활용됐다. 현재 잉어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못은 음용수 통이다. 나머지 2개의 못은 우마급수장으로 사용됐다. 이 마을에 사는 김성익씨(65)는 “예전에는 이 일대에 원시림이 무성했고 물베엄(돗줄래)도 많았으나 농약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탓인지 근래에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구남못의 수심은 최고 2m 가까이 된다고 한다. 특히 “못 바닥의 퇴적층이 어른 허벅지가 빠질 만큼 깊어 아직도 드렁허리(선애)와 같은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김씨는 추정했다.
자록수(雌鹿水)는 한경면 산양리와 경계지경에 자리잡고 있다. 자록수라는 지명은 ‘맑은 물이 있어 옛날 암사슴들이 한라산에서 내려와 물을 먹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못은 2개로 나눠져 있으며, 전체 면적이 1500㎡ 가량 되는 비교적 큰 못이다.
수생식물로는 골풀과 여뀌·미꾸리낚시·택사·가래·송이고랭이·물달개비·사마귀풀 등이 서식한다. 수서곤충으로서는 소금쟁이·물매암이·거머리·장구애비·참개구리 등이 눈에 띈다.
습지의 수원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못 바닥이 보일 만큼 수질이 비교적 깨끗하다. 그러나 수면 위를 부유하는 조류는 관찰할 수 없었다.
곤물은 옛 무릉 동분교장 옆에 자리잡고 있다. 못 면적은 120㎡ 가량 되며 인공 못이다. 못 입구에 땅을 내놓은 김종영·이창석씨의 뜻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곤물은 고은 물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음용수로 활용됐던 못이나, 상수도가 보급됨에 따라 쓰임새를 잃은 채 방치되고 있다.
지난 94년 폐교된 무릉 동분교장은 현재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원장 강영식)로 변신한 뒤 전국의 초·중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체험골은 제주의 식물과 곤충, 야생조류, 해양 동물·식물의 생태를 탐사, 학습체험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생태계의 신비를 일깨우고 자연보전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때 무릉2리의 대표적인 못으로 자리매김됐던 ‘고바지’는 지난 79년 매립됐다. 당시 고바지가 있던 무릉2리 973의 1번지 일대는 상수리나무(속칭 초낭)가 우거진 숲 지대였으나, 주민들의 결의에 따라 매립돼 마을회관을 짓게 된다.
당시 못 면적은 1600㎡규모. 숲에 가린 탓에 숨어있는 못이라는 의미에서 ‘고바지’ 또는 ‘은지(隱池)’ 등의 이름으로 불러왔다. ‘고바’는 제주 말인 ‘곱은(숨은)’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며 ‘지’는 한자말로 못(池)을 의미한다.<취재 좌승훈·좌용철 기자 ·사진=김영학 기자>
첫댓글 우리 회원중 가장 善하고 富한 사람 중의 한사람인 황용비 사장은 언제 만나도 겸손하고 편합니다!!!
황 사장! 늘 건강하고 짬 나는대로 만날 수 있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