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축일’로 격상 (7월 22일)
【바티칸 CNS】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념일을 전례력 상 '축일'로 격상시켰다.
이번 축일 격상은 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진실하고도 진정한 복음전도사'로 평가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역할을 높이 인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은 7월 22일이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6월 10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교령을 발표했다.
교황은 6월 3일 이 교령에 서명했다.
♡ 루이사 피카레타는 ‘도미니코 제3회’ 회원으로 입회할 때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택했습니다.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을 견딘것처럼, 루이사 피카레타가 견딘 박해의 시기의 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루이사 피카레타의 생애와 사명』〔제10장-박해⑥〕
(p.163)
여러 나라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과 같이,
루이사도 일련의 점증적인 재제 조치에 속박된 몸이 되었다.
1938년 10월 7일, ‘하느님 뜻의 집’ 에서 ‘거룩한 열성의 딸들’ 과 함께 지낸 지 꼭 10년 만에
이 집을 떠나라는 강요를 받고 막델레나가 20번지의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파트에 와서 몇 달 동안은 그래도 매일 미사가 봉헌되었으나
더 이상은 그런 특전을 누리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1938년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에는 글을 쓰라는 명령 또한 철회되었고,
이 때부터 루이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 동안 다시는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내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을 끊임없이 실행하고 있었으나 더는 그분을 뵙지 못했던 것이다.
‘도미니코 제3회’ 회원으로 입회할 때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택했던 그녀는
바로 그 막달레나 성녀처럼 십자가의 발치에 달라붙은 채
사랑하는 그분에 대한 믿음만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날마다 그분은 내게 거룩한 성체를 모셔 옵니다.
한 주일에 한 번만 미사 참례를 할 수 있어요.
수도원을 떠난 뒤에도 얼마 동안은 매일 미사 참례를 할 수 있었는데,
금서 처분이 내린 지 여섯 달 후 우리 주교님이 돌아가시자,
금서 처분을 끌어냈던 사제들이 검사성성에서 또 미사 금지령도 얻어 낸 것이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하느님의 뜻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어요.
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어요.
거룩한 미사까지도.’’
매일 미사 특전을 상실한 것 외에도 루이사는 약 일 년 동안
고해 사제 베네데토 칼비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닐리 대주교가 칼비 신부에게
루이사의 고해 사제 임무를 다시 시작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로마의 검사성성에서 트라니 교구청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다시 루이사의 방에서 매일 미사를 드려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코라토에서 루이사는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상태로 박해의 폭풍을 견뎌 내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그대가 로마에서 말한 것과 관련된 새로운 일이 여기에서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책들과 나를 거슬러 큰 폭풍이 일고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코라토 출신의 일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일으킨 폭풍 같습니다.
모쪼록 주님께서 그들 모두를 용서하시며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악마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만 들어도 성이 나서 길길이 뛰고 있었던 것입니다.”
(p.165)
7월 10일 루이사로 하여금 유명한 예언을 하게 한,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시칠리아 섬에 대한 반격은 메시나의 ‘기도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 고아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코라토의 ’거룩한 열성의 딸 수도회’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는 그 큰 위험을 알아차리고
메시나의 수녀들에게 그들의 고아들을 안전한 코라토에 보내라고 하였다.
때맞춰 그 어린이들을 옮긴 덕분에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지만,
루이사는 아이들 대신 한 “희생자” 가 자기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수녀가, 오직 한 수녀가 메시나에서 나치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연합군은 9월에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
한때 이탈리아 남부 지방이 전후좌우로 공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몇 차례 약속하신 대로
루이사를 보시어 코라토가 여러 징벌의 예봉을 면하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남부 이탈리아가 맹렬한 포격을 받는 동안에도 코라토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코라토와 한가지로 산죠반니로톤도의 공동체도 한 거룩한 영혼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으니
그는 앞에서 언급한 ‘카푸친회’ 의 오상의 비오 신부였다.
하느님의 종인 이 두 사람은 직접 만난 적이 없었으나
서로 안부 인사와 기도를 교환했고, 방문자들을 서로에게 보내곤 하였다.
이를테면 비오 신부의 가장 가까운 제자인 페데리코 아브레스크는 가장 충실한 루이사 숭배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아들 비오가 첫영성체를 할 때가 되자 산죠반니로톤도에 데리고 가서 성체를 영하게 한 뒤 코라토를 경유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코라토에서 아들을 루이사의 영적 보살핌에 맡기기 위함이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사제가 된 그 아들이 바로 비오 아브레스크 신부였는데, 그는 루이사를 방문한 일과 그녀의 모범적 성덕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아버지 페데리코 아브레스크는 비오 신부의 격려를 받고 루이사의 저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산죠반니 로톤도에 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 회원 중 몇은 루이사의 영성을 통해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를 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비오 신부로부터 루이사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행하라는 직접적인 권고를 받았던 것이다.*
* 비오 신부의 열성적인 제자인 아드리안나 팔로티도
페데리코 아브레스크의 하느님의 뜻 기도회에 참여했는데,
나중에 비오 신부의 열렬한 성원으로 자신의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 기도회는 산죠반니로톤도의 비오 신부 수도원 가까이에 있는 한 건물에서 모임을 계속하였다.
팔로티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 뜻 기도회 회원들이 비오 신부에게
루이사의 저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고 한다.
한 젊은이가 비오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으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팔로티에게 말했다.
“신부님, 루이사가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복되신 성모님께서 위대하신 것은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동정, 원죄 없는 잉태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적인 뜻을 결코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셨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자 비오 신부는 “그렇다, 아들아, 정말이다! 정말 그렇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젊은이는 이어서 말하였다.
“신부님, 한 가지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세상 끝 날까지 십자가에 달려 계실 것이라는 것이 정말입니까?... 그리고 그분 십자가의 세로대는 모든 세기 만큼 길고
그 가로대는 온 인류만큼의 너비라는 것도 정말입니까?"
비오 신부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렇다, 아들아, 정말이다!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