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누이는 화가이자 시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를 썼습니다. 고(故) 이어령박사는 신학과 시학은 받침 ‘ㄴ’ 하나 차이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신성과 시성도 ‘ㄴ’ 하나 차이입니다. 내 누이는 늘 ‘신성’한 삶을 살았고 끝내 ‘시성(詩聖)’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3차 재발 암수술한 날(2022년 1월 14일)의 시입니다.
<어떤 오늘>-김신성
가슴의 언어를 유언처럼 하늘에 올리고 죽음을 각오했던 시간에서 깨어나니 하루의 무게가 지친 듯 병상 끝에 앉아있다
숨어있는 혈관을 찾아 바늘 끝으로 점점히 빨려들어가는 수액을 달고 오전인가 했던 시간이 어스름한 저녁
긴 낮잠을 잤나보다
늘어난 칼자국을 목에 장식처럼 두르고 진통을 견디고 나면 봄이 저만치서 마중 나오겠지- 3차 재발 암수술한 날(2022년 1월 14일)
그리고 끝내 시의 예언처럼 벚꽃이 흐드러진 봄날, 내 누이는 죽음으로 하늘에 입성했습니다. 봄이 내 누이를 마중해 주었습니다. 늘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살았던 누이, 그녀의 투병생활 13년이 말 그대로 메멘토 모리였습니다. 마지막 남긴 시가 이것입니다.
<반성문> 김신성 나는 피조물이기에 날마다 잃어버린 표정을 안고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어도 할 말은 없었다 다만 분노의 가슴으로 그 분의 뜻을 묻지만 순종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에 생각을 모았다
잃어버린 것만 슬퍼하느라 아픔 중에도 누려온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다
가슴에 담은 언어가 많다 감사하다 어차피 다 지나가는 삶, 머지않아 열려질 천국의 문으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입성할 것이기에 이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다 뼈아픈 눈물을 흘린다
저는 제 누이의 삶에서 메멘토모리를 읽습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젊어서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 이 말의 히브리어 이해는 ‘무덤을 기억하라’입니다. 내 누이는 죽음 앞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쫄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