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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문집보유 제1권 / 비지류(碑誌類)
최 문정공(崔文靖公) 비명(碑銘) 병서
별과 산악의 기운이 사람에게 모여 영웅과 호걸이 되니, 대개 장경성(長庚星)의 정기와 아미산(峨眉山)의 신령스러움이 내려와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를 낸다. 그 문장은 운한(雲漢)을 밝게 돌아 초목에까지 입혀지기에 충분하고, 그 공업은 왕의 계책을 보좌하여 다스림과 교화를 도와 세우기에 충분하다.
이로움과 은택이 한 시대에 베풀어져 명성이 후세에 밝게 빛나니,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이 세상에 드물게 출현하는 것과 같다. 영성(寧城) 최 문정공이 바로 이러한 인재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
공의 휘는 항(恒)이고, 자는 정보(貞父)이며, 관향은 삭녕(朔寧)이다. 황증조 휘 충(忠)이 윤문(潤文)을 낳고, 윤문이 사유(士柔)를 낳으니, 공에게 황고가 된다. 너그럽고 후덕한 어른이다. 나이 18세에 기묘년(1399, 정종1)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달아 급제하였고, 임오년(1402, 태종 2)의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대간(臺諫), 전조(銓曹)를 거쳤다.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날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보며 스스로 즐기니, 나이 80이 넘도록 건강하여 아무 탈이 없었다. 자손을 시(詩)와 예(禮)로 가르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최 어른은 큰 뜻을 품고 있으니, 크게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마땅히 후손에 이르러 흥기할 것이다.”하였다.
배필은 오씨(吳氏)이니, 종부시사(宗簿寺事) 오섭충(吳爕忠)의 딸이다. 영락(榮樂) 기축년(1409) 12월 임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총명이 남달랐다. 책을 읽을 줄 알아 능히 스스로 각고면려하더니 어느덧 경서와 사서를 꿰뚫어 크게 터득한 바가 있었으며, 글을 잘 지어 문장이 호한(浩汗)하고 발월(發越)하니 작자(作者)의 기풍이 있었다.
선부군(先府君)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마침내 작게 이룰 자가 아니다.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키려는 것인가?”하였다. 선덕(宣德) 갑인년(1434, 세종 16)에 영릉(英陵)이 태학(太學)에 친림하여 선비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공을 제1등으로 뽑아 선교랑(宣敎郞) 집현전부수찬 지제교 경연사경(集賢殿副修撰知製敎經筵司經)을 제수하고, 《자치강목(資治綱目)》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수하는 작업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지재(止齋) 권 문경공(權文景公)이 마음 깊이 큰 그릇으로 여겨 누이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해 주었으며, 저술한 것을 볼 때마다 찬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문체가 쇠락하여 날로 급이 낮아지고 있으니, 고문(古文)을 꽃피워 진작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하고, ‘의발을 마땅히 전할 것[衣鉢當傳]’이라는 구절을 써서 노공(魯公) 범질(范質)의 고사를 인용하였으니, 지재 역시 갑오년(1414, 태종 14)의 대과(大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영릉이 사국(史局)을 열고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공도 편수에 참여하였다. 현릉(顯陵)이 세자로 있을 때에 영릉이 명유(名儒)를 뽑아 궁관(宮官)을 돕도록 하였는데, 공이 맨 먼저 선발되어 좌사경(左司經)이 되었다. 부수찬에서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직전(直殿)에 이르러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였다.
영릉이 처음으로 언문(諺文)을 창제하니, 신이(神異)한 생각과 밝은 지혜는 그 어느 왕보다도 뛰어났다. 그러나 집현전의 여러 유자들이 합사(合辭)로 불가함을 아뢰고, 심지어 항소하여 극단적인 논쟁을 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영릉이 공 및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그 일을 담당하게 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책을 지으니, 우리 동방의 어음(語音)이 비로소 정해졌다. 비록 규모와 조치는 모두 세종의 뜻을 여쭈어 정하였으나 공이 협찬한 것도 많았다.
정묘년(1447, 세종29)에 복시(覆試)에 제5명으로 입격하여 직제학 세자우보덕(直提學世子右輔德)에 제수되고 품계는 봉정대부(奉正大夫)이다. 이때에 영릉이 정무를 괴롭게 여겨 현릉이 감무(監撫)하였으므로 서연관(書筵官)이 명령의 출납을 담당하였는데, 공이 충성으로 아뢰고 의견을 올려 보익한 것이 매우 많았다.
영릉이 김문(金汶)과 김구(金鉤) 및 공에게 명하여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도록 하였다. 나도 그 아래에 참여하여 매번 제군(諸君)이 이견에 대해 강론하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논의가 참신하고 뛰어나 제군이 모두 추양(推讓)하였다. 현릉이 즉위하여 사간원 좌사간대부를 제수하였다.
신미년(1451, 문종1)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세종실록》을 편수하였다. 임신년(1452)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고, 자리를 옮겨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현릉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보위에 있으니, 나라의 형세가 의심스럽고 위태로웠다. 공이 가까이 모시는 자리에 처하여 그 사이에서 주선하며 왕명의 출납을 오직 신중하게 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1)에 광릉(光陵)이 화란의 기미를 밝혀 난을 안정시킬 때 공이 마침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협찬한 공이 역시 많았다. 이에 지위가 올라 도승지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수충위사협찬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갑술년(1454)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지니, 품계는 가선대부이다. 이듬해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릉이 정사를 보필하는데, 역당(逆黨)이 지난 감정을 품고 몰래 내수(內竪)와 결탁하여 백방으로 틈을 엿보았으니, 비록 일이 탄로 나 처형되었으나 잔당이 자리 잡고 있어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이 옛 의리를 근거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철저히 논변하여 수십 조목의 사안을 아뢰었는데, 모두 윤허를 받았다. 6월에 광릉이 즉위하였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축년(1457, 세조3)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이조로 옮겼다.
무인년(1458)에 형조 판서로 지위가 올랐고, 다시 공조로 옮겼다. 품계는 자헌대부이다. 창릉(昌陵)이 동궁 시절에 서연(書筵)을 열었는데, 광릉이 말하기를, “세자의 덕을 보좌하고 교도(敎導)하는 것은 노성(老成)한 이가 아니면 안 된다.”하고, 공을 명하여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듬해에 기복(起復)하라는 명을 받았다. 공이 세 번 글을 올려 상기를 마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중추원사 세자좌빈객(中樞院使世子左賓客)에 제수되어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니, 품계는 정헌대부이다.
광릉이 직접 훈사(訓辭)를 지어 창릉에게 주고, 공에게 명하여 주해(註解)하도록 하였다. 공이 조목조목 나누어 주를 다니 절목이 극도로 자세하였고, 또 여러 유자의 설을 인용하여 논단하니 내용과 뜻이 명확해졌다.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경진년(1460)에 이조 판서로 지위가 오르니, 품계는 숭정대부이다. 계미년(1463)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지위가 올라 좌참찬이 되어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광릉은 일찍부터 동방의 배우는 자들이 어음(語音)도 바르지 않고 구두(句讀)도 분명하지 않으며, 비록 권근(權近)과 정몽주(鄭夢周)의 구결이 있긴 해도 잘못된 곳이 오히려 많아 부유(腐儒)와 속사(俗士)가 잘못된 것을 그대로 전하고 이어받는 것을 탄식해 왔다.
마침내 정인지, 신숙주, 구종직(丘從直), 김예몽(金禮蒙), 한계희(韓繼禧) 및 공과 나에게 오경과 사서를 나누어 주면서 고금을 참고하여 구결을 정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광릉은 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 같고 다른 점을 강론한 다음 친히 결정을 내리곤 하였는데, 공이 좌우에 있으면서 매번 고문(顧問)을 받들 때마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응대하는 것이 메아리 같아 모두 여러 사람들의 뜻에 맞으니, 광릉이 좌우를 보며 말하기를, “참으로 하늘이 낸 재주이다.”하였다.
병술년(1466, 세조12)에 품계가 숭록대부로 올랐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였다. 공이 군사 기무는 자신처럼 사정에 어둡고 꽉 막힌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좌찬성으로 오르고 보국대부(輔國大夫)에 가자되었다.
정해년(1467)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춘추관감사로 발탁되었고, 5월에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월에 영의정 겸 영예문관홍문관춘추관관상감사로 승진하였다. 영화가 극에 달함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다시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무자년(1468, 예종 즉위년)에 창릉이 즉위하여 영경연사를 더하였다. 처음에 광릉이 공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라고 명하여 〈형전(刑典)〉과 〈호전(戶典)〉은 이미 편찬하여 올렸고, 사전(四典)은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 편찬하여 올렸다.
창릉이 훌륭하게 여기고, 간행하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금상(今上 성종(成宗))이 즉위하여 노성한 사람에게 국정을 맡길 양으로 영경연사를 잉임하고 날마다 접견하여 국정을 물으니, 높이고 예우함이 더욱 중하였다. 경인년(1470, 성종 1)에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지어 올렸다.
신묘년(1471)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이해 겨울에 재차 재상으로 들어가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를 겸하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해 올렸다. 상이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여 공을 포상하였다. 계사년(1473, 성종 4) 여름에 홍수가 났다.
공이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은 삼공에게 있다.’ 하여 사직을 청하기를 매우 절실하게 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갑오년(1474) 여름 4월에 공은 건강이 조금 좋지 않았는데, 28일 임오일에 관복을 갖추어 입고 관아에 나가려다가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쓰러졌다.
상이 내의를 파견하여 약물을 가지고 가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이다. 상이 매우 슬퍼하여 부의를 규정보다 더 많이 내렸다. 태상시에서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다. 이해 윤6월 임인일(19일)에 광주(廣州) 관내 동쪽 기현(丌峴)의 손좌건향(巽坐乾向) 언덕에 장례 지냈다.
공이 서거하자 조정의 사대부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어 말하기를, “올바른 사람이 없어졌다.”하였다. 공은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대범하고 조용한 데다 바르고 깨끗하여 가식으로 꾸미는 것이 없었고, 출세하여 자신의 도를 행할 때에는 항상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비록 한겨울 추위와 한여름 더위에도 종일토록 관을 바르게 쓰고 꼿꼿이 앉아 태도를 태만하게 하지 않았고, 비록 잠깐 사이라 해도 일찍이 말을 급하게 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바꾼 적이 없었다. 나랏일을 받들 때는 정도를 지켜 나라를 근심하기를 집안을 근심하듯이 하였다.
두 번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었으나 정무를 너그럽고 대범하게 처리하였으며, 고치고 확장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말을 나눌 때에는 항상 먼저 겸손함을 보이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았으며 또한 고고함을 세워 스스로를 특별하게 하지도 않았으나 조정에 가서 논의할 때나 큰일을 당하여 결정할 때에 이르러서는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의 생활이 청렴결백하여 뇌물이나 청탁이 이르지 않았으며, 유흥이나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재산 불리는 일을 일삼지 않아 담박하였다. 일을 만나면 항상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였으므로 조정에 오른 40년 동안 한 번도 공적인 탄핵을 입지 않았으며, 과거에 오른 때부터 태보(台輔)에 이르는 동안 항상 관각(館閣)의 직책을 겸하여 하루도 외지(外地)에 기거한 적이 없었다.
개연히 사도(斯道)를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고인의 격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문장 구조를 창작하여 거침없이 쏟아내니, 웅장하고 호방하며 풍성하고 넉넉함이 마치 장강(長江)과 대하(大河)가 힘차게 흘러내려 가며 백번을 꺾이고 구불구불 휘돌아 형세를 그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변려문(駢儷文)을 특히 잘 지었다. 여러 번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인재를 얻음이 매우 성대하였다.
조정의 사대 외교에 관한 모든 표문(表文)과 전문(箋文) 및 국가의 중대한 문서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중국인이 매번 우리나라의 표사(表詞)가 정밀하고 절실하다고 칭송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상이 한창 의지하고 맡겨서 치세(治世)를 도모하는 중이었는데 하늘이 공을 남겨 두지 않아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이루 다 통탄할 수 있겠는가.
공이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 서미성(徐彌性)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인이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니, 바로 나의 누이이다. 2남 4녀를 낳으니, 장남 영린(永潾)은 임오년(1462, 세조 8)의 사마과와 병술년(1466)의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형조 참의이다. 차남 영호(永灝)는 정유년(1477, 성종 8)의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사도시 정(司䆃寺正)이다.
장녀는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정함(鄭涵)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문간(文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 이균(李鈞)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 신수(申銖)에게 시집갔다.
영린이 대호군(大護軍) 이효림(李孝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수영(秀英)이고, 후에 관찰사 박건순(朴健順)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수웅(秀雄)과 수걸(秀傑)이다. 영호가 계림군(雞林君) 정효상(鄭孝常)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고, 정함이 2남 2녀를 낳고, 문간이 2남 3녀를 낳고, 이균이 1녀를 낳고, 신수가 1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비석에 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공이 우리 집안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는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것을 가엾이 여겨 자상하게 일러 주고 타일러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는데, 내가 처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집현전에서 10년을 외람되이 동료로 지냈고, 또 관각에서 수십여 년을 상관으로 모셨다.
내가 모자란 재주로 공을 이어 사문의 맹주(盟主)가 되어 의발(衣鉢)을 한집안에서 전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는데, 나는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공은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아,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비석에 명을 쓰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합하고 / 天地絪縕
규벽이 밝게 빛나더니 / 奎璧昭回
한 덩어리로 크고 넓어 / 渾淪旁礴
뛰어난 인재 태어났네 / 寔生奇才
당당한 영성이여 / 堂堂寧城
불세출의 영웅으로 / 間世之䧺
다섯 조정 두루 섬기고 / 歷事五朝
성군 만나 현달하니 / 遭遇顯隆
대각에서 경력 쌓고 / 踐揚臺閣
높은 벼슬에 올랐네 / 登金步玉
학문이 깊고 / 學問深邃
문장이 탁월하여 / 文章卓犖
위로는 굴원과 송옥을 뒤따르고 / 上追屈宋
아래로는 사마천과 반고를 벗하니 / 下友馬班
소식과 구양수와는 / 曰蘇曰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이지 / 伯仲之間
논사가 드넓어 / 論思廣廈
하루 세 번씩 접견하였으니 / 晉接日三
요와 순 같은 군주에 / 堯舜其君
직과 설 같은 신하의 마음이었네 / 稷卨其心
두 번 정부에 들어가고 / 再入巖廊
세 번 공신에 들어 / 三圖麟閣
크게 펼친 그 재주 / 大展厥才
시행하고 설치하였네 / 迺施迺設
경륜하고 화육하며 / 經綸化育
완성하고 익히니 / 以亭以毒
덕의 성대함이요 / 惟德之盛
공의 무성함이라 / 惟功之懋
어찌하여 철인은 시들며 / 何哲之萎
어찌하여 인자는 오래 살지 못하는가 / 何仁不壽
하늘이 갑작스럽게 빼앗아 가 / 天奪其遽
거울 하나 없어지고 말았구나 / 一鑑云亡
비록 없어졌다고 하나 / 雖則云亡
길이 보존될 것 있으리 / 所存者長
하늘이 문은 없애지 못하여 / 天未喪文
전형이 모두 남아 있으니 / 典刑具存
이 비석에 새겨 / 刻此貞珉
후손에게 밝게 보여 주리라 / 昭示後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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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운한(雲漢)을 …… 충분하고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서쪽으로 함지에 노닐고 부상에 다다르니,
초목에까지 은하수 밝은 빛을 입히었도다.[西游咸池略扶桑 草木衣被昭回光]”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2] 임진일 : 1409년(태종9) 12월에 임진일이 없다. 아마도 간지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
[주03] 영릉(英陵) : 세종의 능호(陵號)이다.
[주04] 지재(止齋) 권 문경공(權文景公) : 권제(權踶, 1387~1445)로, 지재는 호이고 문경은 시호이다.
[주05] 누이의 딸 : 누이는 사가의 어머니 권씨(權氏)이니, 곧 사가와 최항(崔恒)은 처남 매부 사이이다.
[주06] 의발을 …… 장원급제하였다 : 의발(衣鉢)을 전한다는 것은 본래 불교 선종(禪宗)에서 법통(法統) 계승의 신증(信證)으로 가사(袈
裟)와 바리때를 전해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도통을 계승할 때에도 쓰인다.
노공(魯公) 범질(范質)의 고사란, 북송(北宋) 초기에 범질이 진사과에 응시했는데 과거를 주관한 화응(和凝)이 범질을 제13인으
로 등제(登第)시키고 이르기를, “그대의 글이 당연히 다사(多士)의 으뜸이지만, 그대를 제13인으로 낮춘 것은 내가 일찍이 그 숫자
로 급제를 했기 때문에 그대 또한 그 숫자로 급제시켜 이 늙은이의 의발을 전하려는 뜻에서이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邵氏聞見
錄》 《舊五代史 周書 卷127 和凝列傳》
[주07] 현릉(顯陵) : 문종(文宗)의 능호이다.
[주08] 직전(直殿) : 집현전(集賢殿)에 소속된 정4품 벼슬이다.
[주09] 광릉(光陵) : 세조의 능호이다.
[주10] 창릉(昌陵) : 예종(睿宗)의 능호이다.
[주11] 사전(四典) : 〈이전(吏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공전(工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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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崔文靖公碑銘 幷序
星嶽之氣鍾於人。而爲英雄豪傑。盖長庚之精。峨眉之神。降而作命世之才。其文章。足以昭回雲漢。衣被草木。其功業。足以黼黻王猷。扶植治化。利澤施于一時。聲名昭于後世。如祥麟瑞鳳。間世而出。寧城崔文靖公。其殆庶幾乎。公諱恒。字貞父。朔寧人。皇曾祖諱忠。生潤文。潤文生士柔。於公爲皇考。寬厚長者。年十八。連中己卯生員,進士兩科。中壬午文科。歷藝文, 春秋,臺諫,郞曹。至成均司藝。以疾 辭。日以經史自娛。年踰八袠。康強無恙。敎兒孫以詩禮。人皆曰。崔君長者。有大蘊。不大厥施。其興也當在後嗣乎。配曰吳氏。宗簿寺事燮忠之女。以永樂己丑十二月壬辰。生公。公自髫○。聦明絶類。知讀書。能自刻勵。淹貫經史。大有所得。善屬文。浩汗發越。有作者氣。先府君曰。吾兒骨法異常。終非小成者。天其或者大興吾門乎 。宣德甲寅。英陵臨雍策士。擢公第一。授宣敎郞,集賢殿副修撰,知製敎,經筵司經。與修資治綱目,通鑑訓義。止齋權文景公。深器之。以姊子妻之。每見著述。嘆曰。吾東方文體萎薾。日就卑下。能以古文發揚振起者。必此人也。有衣鉢當傳之句。乃用范魯公質古事。止 齋亦甲午大魁也。英陵開史局。命臣鄭麟趾等。撰高麗史。公亦與修。顯陵在東邸。英陵選名儒補宮官。公首被簡拔。爲左司經。自副修撰。累轉至直殿。兼藝文應敎。英陵初。制諺文。神思睿智。高出百王。集賢諸儒。合辭陳其不可。至有抗䟽極論者。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作訓民正音,東國正韻等書。吾東方語音始定。雖䂓模措置。皆稟睿旨。而公之協贊亦多。丁卯。中覆試第五名。授直提學, 世子右輔德。階奉正。時英陵倦勤。顯陵監撫。書筵官掌出納。公啓沃獻替。補益弘多。英陵命臣金汶,金鉤及公等。定小學, 四書, 五經口訣。居正亦與其後。每見諸君講論 同異。公議論發越。諸君咸推讓之。顯陵卽位。授司諫院左司諫大夫。辛未。進集賢殿副提學。撰修 世宗實錄。壬申。擢承政院同副承旨。轉至左副。 顯陵陟遐。幼冲在位。國勢疑危。公居左右宥密之地。周旋其間。出納惟謹。癸酉。光陵炳幾靖難。公適直禁內。協贊之功亦多 。陞爲都承旨。尋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之號。甲戌。拜吏曹參判,寧城君。階嘉善。明年。遷大司憲。光陵輔政。逆黨挾前憾。潛結內竪。窺覦百端。雖事露伏辜。餘孽盤據。尙未剪除。公援据古義。劘切利病。陳數十事。皆蒙 允可。六月。光陵卽位 。賜佐翼功臣之號。秋。丁內憂。丁丑服闋。除戶曹參判。尋移吏曹。戊寅。陞刑 曹判書。又移工曹。階資憲。昌陵在東宮。開書筵。 光陵曰。輔養儲德。非老成不可。命公爲賓客。冬。丁外憂。明年。命起復。公三上書。請終制。辭甚懇至。不允。除中樞院使,世子左賓客兼成均大司成。階正憲。光陵親製訓辭。授昌陵。命公注解。公逐條分注。節目詳盡。又引諸儒之說論斷。辭旨通暢。上甚嘉悅。庚辰。陞吏曹判書。階崇政。癸未。遷議政府右參贊。明年。陞爲左。兼世子貳師。光陵嘗歎東方學者。語音不正。句讀不明。雖有權近,鄭夢周口訣。紕繆尙多。腐儒俗士。傳訛承誤。遂命臣鄭麟趾,申叔舟,丘從直,金禮蒙, 韓繼禧及公與臣居正等。分授五經四書。考古證今。定 口訣以進。光陵又召會諸臣。講論同異。親加 睿裁。公在左右。每承顧問。毫分縷析。應對如響。皆愜衆意。光陵目左右曰。眞天才也。丙戌。進階崇祿。兼判兵曹事。公辭以兵戎機務。非臣迂腐所堪。言甚切至。不允。陞左贊成。加輔國。丁亥。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春秋館監事。五月。轉左議政。九月。陞領議政。兼領藝文館, 弘文館, 春秋館, 觀象監事。屢以盛滿辭。還封寧城府院君。戊子。昌陵卽位。加領經筵事。初。光陵命公撰經國大典。刑戶二典。已撰進。四典。未及告成。至是畢撰以進。昌陵嘉之。命刊以頒。今上卽位。圖任老成。仍領經筵事。日接顧問。尊禮尤重。 庚寅。撰歷代帝王后妃明鑑以進。辛卯。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之號。是年冬。再入相。爲左議政 。兼經筵春秋。撰世祖,睿宗實錄以進。 上賜鞍馬褒美之。癸巳夏。大水。公以陰陽愆伏。責在三公。乞辭甚切。不允。甲午夏四月。公稍違和。二十八日壬午。具冠帶。將赴衙。暴疾。上遣內醫。賫藥餌治療。不效。遂卒。享年六十六。上震悼。贈賻有加 。太常諡曰文靖。是年閏六月壬寅。窆于廣州治東丌峴巽坐乾向之原。自公之逝。朝廷士大夫。以至牛童馬卒。莫不嘆惜曰。正人亡矣。公性謙恭簡靜。端介無華。立身行己。常持正不撓。平居。雖隆冬盛夏。終日正冠危坐。不設惰容。雖造次。未嘗 疾言遽色。奉公守正。憂國如家。再入相。政務寬大。不喜更張。與人言。常先示退損。不自表襮。又不立崖岸自異。至如朝廷議論 。臨决大事。確不可犯。居家淸白。關節不到。不邇聲色。不事產業。淡如也。遇事。常加三思。立朝四十年。一不被公劾。自登第。至台輔。常兼館閣。未嘗一日寄外。慨然以斯道爲己任。爲文章。不蹈古人畦畛。自出機杼。大放以肆。雄豪富贍。如長江大河。滔滔汨汨。百折逶迤。勢不能止。尤工於騈儷。屢掌文闈。得人甚盛。凡朝廷事大表箋。高文大冊。皆出其手。華人每稱我國表詞精切。皆公所著也。上方倚任圖治。天不愸遺。遽至於斯。可勝痛哉。公娶純忠補祚功臣輔國崇祿大夫達川府院君徐彌性之女。封貞敬夫人。卽居正之姊也。生二男四女。男長曰永潾。中壬午司馬科。丙戌。文科。刑曹參議。次曰永灝。中丁酉文科。司導寺正。女長適掌樂院僉正鄭涵。次適通禮院引儀文簡。次適司僕寺判官李鈞。次適社稷署參奉申銖。永潾娶大護軍李孝林之女。生一男。曰秀英。後娶觀察使朴健順之女。生二男。曰秀雄。秀傑。永灝娶雞林君鄭孝常之女。生二男。鄭涵生二男二女。文簡生二男三女。李鈞生一女。申銖生一男。皆幼。嗚呼。居正尙忍銘公之碑乎。初公之歸我家也。居正年尙幼。憐我早孤。耳提面誘。以擊我蒙。及居正釋褐登第。忝僚集賢者十年。又陪侍館閣數十餘 年。居正以不才。繼公主盟斯文。以衣鉢傳一家。時人稱之。我不敢當。公則無愧。嗚呼。居正尙忍銘公之碑乎。銘曰。
天地絪縕。奎璧昭回。渾淪旁礴。寔生奇才。堂堂寧城。間世之䧺。歷事五朝。遭遇顯隆。踐揚臺閣。登金步玉。學問深邃。
文章卓犖。上追屈宋。下友馬班。曰蘇曰歐。伯仲之間。論思廣廈。晉接日三。堯舜其君。稷卨其心。再入嵓廊。三圖麟閣。
大展厥才。迺施迺設。經綸化育。以亭以毒。惟德之盛。惟功之懋。何哲之萎。何仁不壽。天奪其遽。一鑑云亡。雖則云亡。
所存者長。天未喪文。典刑具存。刻此貞珉。昭示後昆。<끝>
四佳文集補遺一 / 碑誌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