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철마다 바꿔 거는 족자
스님의 인품 보는 듯
정좌처 다반향초 (靜坐處 茶半香初)
묘용시 수류화개 (妙用時 水流花開)
고요한 좌선실에 차 맛은 반잔의 맛, 향기는 첫 향기
묘용을 쓰는 시간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나니.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다실 벽에 걸린 족자의 한 구절이다. 붓 대롱이 닿게 꾹꾹 눌러 쓴 추사(秋史) 선생의 글씨로, 어린애 솜씨 같은 치졸한 맛이 있다. 법정스님은 철따라 족자를 바꿔 거시는데 어느 것이나 다 스님의 인품에서 풍기는 그런 아취가 느껴진다.
내가 조계산 송광사 산내 암자 불일암을 처음 참배하였을 때의 모습은 지금의 불일암 주위 모습과는 다르다. 출입하는 문과 공양간 위치가 바뀌었고 곁에 딸린 서전(西殿)을 아직 짓기 이전이었다. 광원암(廣遠庵)도 복원되기 전이었다. 25년 전인 그때는 아담하고 조촐한 작은 암자였다. 지금도 외형은 그대로인 것 같다.
찰밥을 싸들고 도반 행자들과 함께 법정(法頂) 스님께 인사차 갔다. 큰 절에서는 보름마다 하는 삭발 목욕일 날에 항상 찰밥을 한다. 송광사 찰밥 하면 또 알아준다. 그때 보현심 보살이 채공 보살로 있을 때였는데 솜씨가 아깝다 할 정도로 뛰어났다.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미역국하고 찰밥은 음식궁합으로 잘 맞아 미역국도 함께 끓인다.
국을 끓이는 소임은 내 몫이었다. 먼저 솥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물에 불린 미역을 약간 볶았다가 끓이면 담박하면서도 구수하다. 다 상(上)행자님으로부터 전수받은 요리법이다.
불일암 외에도 고개 넘어 오도암(悟道庵) 과수원에 간다. 그때 효봉(曉峰) 노스님의 속가 아드님 거사가 말년에 머물고 계셨다. 사진첩을 보여 주며 옛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불일암 스님의 은사는 효봉 노스님이신데 말하자면 서산 대사의 법맥인 셈이다. 그 이전 송광사는 서산 대사와 쌍벽을 이룬 부휴 대사 선수(善修)의 후손 풍암 스님의 법손이었다. 약 400년 동안을 풍암 스님 법맥이 유지되었으니 송광사는 효봉 노스님이 주석하는 시점에서 판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은 효봉 문도 일색이지만 또 언제 법력 높은 분이 새 회상을 차리게 될지 예측 불허하다. 세상사 인연 따라 오고간다.
오도암 아드님 거사로부터 전해 들은 일화가 있다. 사실 그때는 오도암이 아니고 구산(九山) 스님이 거사를 위해 과수원을 인수해 토굴로 그냥 쓰도록 하였을 뿐이니 암자랄 것도 없이 오두막 같은 토굴집이었다.
“평양 집에서는 ‘효’ 자, ‘봉’ 자 노스님이 가출한 날을 제삿날로 삼았지요. 그 날을 잡아 제상을 차려서 절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노스님은 그 날 밤 꿈에, 자식들이 걸게 음식을 차려서 놓고는 절을 하더라는 거예요.”
거사님은 화순 경찰서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헌데도 지척에 아버지를 두고도 생전에는 뵐 기회가 다시 없었다. 신혼 여행 때에는 오대산 선원 앞을 지나쳤을 때에 효봉 노스님이 이를 알아보고 앉은자리에서 돌아앉았으니 부자간의 인연치고는 묘하다.
법정스님의 차가운 눈빛은 퍽 이지적이면서도 단호하다고나 할까.
한번은 불일암에서 공양주로 지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광주에 호미, 돌 망치, 돌 뜨는 대꼿, 등 연장을 사러 갔다와서 잔돈을 다 내놓지 않으니, 두 세 차례나,
“연장을 잘 샀어?”
하고 넌지시 잔돈을 다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다. 10만원을 가져가서 6만 몇 천 몇 백 몇 십 원을 썼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가 끝돈은 버리고 그냥 만 원 권만 3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잔돈을 깡그리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이야기지만, 담을 허술하게 해 두면 도둑질을 가르친다고, 하여 만장도교(慢墻盜敎)란 치문(緇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다. 스님은 매사에 투철하여 빈틈이 없으신 줄을 짐작하였지만 정작 모시고 보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직설적이고 단순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가 없다. 좋든지 궂든지 분명하지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스님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스님 밥그릇 안에 내가 고기 몇 점을 넣어 두었을 때였다. 스님은 몇 술을 들다말고 밥 속에 묻힌 고깃점을 보더니,
“옛날 노처녀가 있었지. 맘에 든 신랑이 없는 탓이야. 헌데 이번에는 정작 신랑감이 나타났는데 역시 결혼을 포기하고 말았다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지켜온 정조가 아까워서 그랬지.”
“………?”
고기를 보고는 느닷없이 노처녀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는 스님의 깊은 속뜻을 모르고 다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지켜온 정조 때문이야.
법정스님 (2)
충천의 기상 넘치는데
어찌 여래 가신길 따를까
“집을 떠나오기 전에 내가 망설였던 일은 책 때문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독자(獨子)인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길러주었을 것이다.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책더미 앞에서 나는 또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내 유일한 소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너 권쯤은 몸에 지니고 싶어 이 책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놓기를 꼬박 사흘 밤을 되풀이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책 몇 권을 가지고도 이러는데, 정든 처자권속을 두고 나오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능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결국 세 권을 뽑아 짐을 꾸렸지만 산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시시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출가기(出家記)>에 나오는 스님의 담담한 회고담이다.
스님은 임신생으로 음력 2월 15일생이니 금년 춘추는 69세이다. 한번은,“2월 15일이 부처님의 열반재일 날인데 스님 생신이십니다.” 하고 말씀 올렸을 때에,
“그건, 호적상으로만 그래.” 하셨는데 춘추도 호적상으로는 몇 살 적다. 스님은 전라남도 해남 땅에서 박씨 가문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목포에서 지내다가 23세 때에 충무 미륵산 미래사에 출가하셨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은사 효봉 노스님을 모시고 탁발을 해가며 공부를 한 바가 있으시다.
초대 역경원장을 지내신 운허(耘虛) 대강백을 모시고 해인 강원에서 수학했고 운수납자의 길에 올라 선원 대중생활을 한 때가 있으시다. 처음엔 무자(無字) 화두로 정진을 하다가 두 번 째에는 관법(觀法)을 통해 스님의 입지(立地)를 튼튼히 하신 것으로 헤아려진다. 일화(逸話)가 많다.
언제 들은 이야기이지 잘 모른다. 한번은 스님이,
“나도, 도적질을 한 적이 있었어.” 하고 말씀하셨다. 학교 앞 장소에서 상이 군인인지 다리가 부자유한 사내가 잉크지우개, 콘사이스, 문방구, 책 등을 길바닥에 늘어놓고 학생들에게 팔아서 그걸로 살아가는 가난한 노점상. 스님이 별 내용이 없는 책인데도 그냥 호기심으로 펴들고 넘겨보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스님이 그들에게 밀려서 주인 사내와 약간 멀어져 버렸다. 주인 사내는 다리가 부자유스러워 쉽게 일어서고 앉고 할 형편이 아닌지 그냥 앉아서 학생들과 흥정을 하며 팔고 있었다. 순간, 스님은 책을 슬쩍 가방 안에 넣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리나 성한 사람 것 같으면 덜 미안한데.....” 하신다. 이때 나는 스님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큰 기쁨을 맛보았다. 의외로 재미있으시다.
또 이런 일도 있다. 스님이 목욕 빨래를 하신 날이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많이 모아두고 빨래를 방바닥에 널어놓고는 그냥 쓰러져서 살풋 잠이 드셨나 보다. 밤중이었다. 잠이 깨었다. 문득 밤중에 세상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궁금해서 소형 라디오를 켰다. 이때 이런 말이 막 흘러나와 귀를 기울였다.
“안녕하십니까? 한밤의 음악 편지 시간입니다. 오늘 밤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낭송하면서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은 다락에 가서 옛 책을 꺼내와 오랜만에 무소유 책을 펼쳐서 라디오 진행에 따라 함께 읽어 보셨다고. 차를 마시면서 “참, 오랜만에 무소유 읽었네. 하하하” 하고 웃으신다.
산을 탈 때에는 젊은 우리보다 더 힘있게 앞장서신다. 비결은 발바닥 중간쯤에 위치한 용천혈(湧泉穴)을 자극하는 법을 터득하셨기 때문이다. 그냥 돌을 피해 걷는 게 아니라 용천혈을 자극하면서 발바닥 중간으로 밟고 가신다. 건강도 의외로 좋으시다. 그 연세에 자취 생활이라니! 혼자 지어 잡수시는 건 아무나 흉내낼 정도가 아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연유는 이렇다. 하루는 제목으로 ‘여름날 돌계단 쌓기’를 주면서 원고지에 10장 가량 써오라고 하셨다. 스님이 <불일회보> ‘불일탑(佛日塔)’ 고정난에 매월 연재를 하는데 그 자리에 대신 실으려고 하신 것이다. 두어 차례 말씀 끝에 쓴 글이 ‘법보의 소중함’이었다.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는,“아니, 이제 중이 된 아이 아니야?”
“지묵이가 벌써 불일탑에 글을 올려?” 하는가 하면 찬탄하는 쪽에서는,
“송광사는 물이 그래서 그런가? 글을 쓰는 이가 많아.”
“괜찮군. 앞으로 유망해 보여.”
하고 격려를 보낸 이도 있었다. 이 한차례 글이 불일탑에 실림으로 해서 말하면 일종의 추천이랄까 인정을 받는 자리가 된 셈이다. 그 이후 나는 10권의 책을 엮어내면서 생활 불교와 선 수련 이야기를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의도적으로는 스님의 책을 잘 펼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문체 스타일 등이 스님을 닮아갈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장부에게는 충천의 기상이 넘치는데, 어찌 여래(如來)가 가신 길을 따라 갈 것이냐?”스님의 교훈이시다.
법정스님 (3)
“스님 한 말씀 써주셔요”
‘한 말씀’이라고 쓰신다
스님의 필치는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능숙하시다. 나는 편지를 받아보고 글을 쓴 이의 체격과 성격을 판단함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듯한데, 글씨 모양에 따라 신장이 드러나는 것 같다. 키가 훌쩍 큰 이는 의외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쓰고 반대로 키가 작은 이는 큼직하게 글씨를 쓴다.
또한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대가(大家)의 글씨는 유연하다. 말하자면 법정 스님의 필치도 여기에 속한다. 스님은 대체로 작은 글씨를 유연하게 쓰신다.
이런 글씨를 받아보는 이는 평생 잊지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스님의 옥서(玉書)에 사인을 받으려고,
“스님, 한 말씀 써 주셔요.”
할 때에는, ‘한 말씀’ 하고 쓰신다. 붓을 들고 가서는 점 하나라도 좋으니 찍어달라고 조르면서 종이와 붓을 준비해 가면, 정말 ‘점 하나’ 만을 찍고 멈추신다.
또 어떤 육덕이 좋은 노 보살이 불명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올리니 즉석에서 이렇게 작명을 하신다.
“우량모(優良母) 보살!”
체격이 튼튼한 아이의 튼튼한 어머니로 적합하기에 ‘우량모’로 지으신 것이다.
한번은 엽서 한 장을 보냈는데 그 엽서를 받은 보살님이 돌아가실 때에 이런 유언을 하였다고.
“부탁이 있소. 내 위패 옆에는 큰스님이 친필로 써서 보내주신 엽서를 놓아다오.”
스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부터 다른 이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쓸 때에 더욱 조심스러워 졌다고 하신다.
외국여행을 하실 때에 합장주나 조그만 기념품을 챙겨서 간혹 나눠 드리는 일도 스님의 심경 변화가 있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인도 여행에서 불자들을 만날 때에 나눠준 조그마한 보시품이 받는 이에게 마음의 큰 선물로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모시고 떠났을 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휴게소가 가까워 졌을 때였다. 스님이 말씀을 꺼내신다.
“지묵 수좌, 쵸콜렛 먹고 싶지 않아?”
나는 영문을 모르고 대답한다.
“아니요, 먹고싶지 않아요.”
또 스님이 다른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지 않아?”
“아니요, 먹고싶지 않아요.”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님이 잡수시고 싶을 때에 물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흔연히 대답한다.
“네에, 먹구 싶어요.”
이러면 스님은 사오라고 해서 함께 잡수신다. 옛이야기에 자기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누가 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나서서 이런 말을 먼저 하였다고 한다.
“동서, 노래해.”
하고 옆의 동서 옆구리를 찔벅거렸다나.
마을에서는 할아버지가 떡을 자시고 싶을 때에,
“얘들아, 너희들 떡 먹고 싶지 않니?”
하고 괜히 손자들에게 물으신다. 이게 옛날 어르신네가 점잖하게 처신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어르신이 체신 머리 없이,
“무엇 무엇이 먹구 싶다.”
하지는 않았는데 은근하면서도 점잖은 표현법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이 있다.
불일암에서 공양주로 지낼 때였다. 객이 와 있을 때에 저녁밥을 지을지 말지 망설여진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길어지고 객은 떠나지 않고 해서 어떨까 싶어 스님의 눈과 마주 친다. 이때였다. 스님은 정말 전광석화처럼 눈치를 번쩍 채고 한 말씀을 하신다.
“여기, 오늘밤에 달이 뜨면 달맞이꽃이 보기 좋아.”
이 말씀은 객이 저녁을 드신다는 사인이다.
“가만있자, 불일암까지 오는데 몇 시간 걸렸어요?”
이 말씀은 객을 보고 묻고 있지만 실은 공양주에게,
“이 객은 곧 내려 갈거야.”
하는 말씀이시다. 아니나 다를까,
“한 30~40분 걸렸어요.”
하고 객이 차를 훌쩍 마시고 떠날 채비를 한다. 그래도 객이 눈치가 없을 때에는,
“큰 절로 내려가는 길에 이 책을 잊지 말구 가져가.”
한다거나 혹은,
“아, 주차장까지 30~40분 걸리지요?”
하며 떠나는 이야기로 계속 화제를 삼는다. 나는 이런 대화를 통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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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4)
이야기꾼으로 키워주신
엄하고도 냉정하신 스님
茶禪一味 (茶禪一味 頭印 落款 꽝 )
빛과 향기와 맛을 온전히 할지어다.
지묵 아사리를 위해
불일암 佛日 ( 佛日 落款 꽝)
어느 해 단오 무렵, 합죽선 부채에 스님이 먹물 글씨로 이런 말씀을 써서 주신 적이 있다.
스님의 낙관은 석정 스님, 무용 거사, 수안 스님, 여기에 내가 판 것까지 합해서 백여 과(顆)가 된다. 나는 초기에 20여과 정도를 파 드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찍힌 ‘불일’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일’ 낙관의 글씨 도안은 스님이 하시고 나는 칼질만을 하였다. 스님의 미적 감각이랄까 보시는 눈은 가히 전문가의 수준을 넘는다. 새 낙관을 보여드리면,
“이건 약간 힘이 빠졌어. 다시 해와.”
“좋군. 균형이 잡혔어. 약간 옆으로 삐쳐 나와서 멋이 있지 않아?”
“날일(日) 자는 그냥 해를 그려봐. 원 안에 점만 찍고…”
나는 스님의 칭찬에 신이 나서 일에 피곤을 모르고 하였다.
불일암에서 모시고 지낼 때에 스님은 목공 일을 맡으시고 나는 석공 일을 맡았다. 일이 생기면 자기 취미에 따라 일을 하였다. 스님은 세속에서 직업을 택하였다면, ‘목수’나 ‘청소부’를 택하였을 것이라고 술회하신 바가 있다.
“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일을 하게 됐을 것이다.”
목공 도구가 한 살림을 해도 좋을 만큼 많다. 이런 것 저런 것 여러 가지다. 웬만한 목수 연장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애
살어리 랏다
멀위랑
ㄷ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 랏다
지금도 이 청산별곡이 새겨진 목각 현판은 불일암 부엌 입구쯤에 걸려있다. 물론 스님의 초기 솜씨이다. 서울 봉은사 시절에는 ‘다래헌(茶來軒)’, 조계산 불일암 시절 이후에는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 ‘수류산방(水流山房)’으로 거처를 나타내시는데, 낙관도 여기 이름에 따라 바뀐다.
“지묵 수좌한테는 세 가지가 안 되겠어. 낙관도 못 따라가고 수제비도 못 따라가고 이야기에도 못 따라가.
이이 야야, 차암, 지묵 수좌가 오래 이야기를 하는 데는 손을 들었어. 장장 일곱시간이야.
학교 다닐 적에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인 이후로는 처음이야, 남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오래 듣기는.”
스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한나절 하고 저녁 먹고 하고 해서 일곱시간 가까이 흘렀다. 스님이 이야기가 끝나면,
“그래? 뒷 이야기가 궁금한데…”
“재밌어. 또 해 봐.”
이렇게 추겨 주시는데 그만둘 재간이 없었다. 이야기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큰 마을 작은 마을, 이 마을 저 마을에 들어가고 천하 덮기를 계속한다. 참 신바람 나서 며칠을 해도 끝이 없어 보였을 때에 “아, 재밌다. 낼 법회로 일찍 떠나지만 않는다면… 아깝네. 자야 하니까.”
이래서 이야기가 종막을 내렸다. 진지하면서 재미있어 하시는 얼굴 표정과 모습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나를 작은 이야기꾼으로 키워주신 이는 다른 분이 아닌 법정스님이시다. 나는 멀리 떠나 있는 시간에 아침으로는 예불 후에 절을 올린다. 여러 스승에게 차례차례 올린다. 물론 스님께도 큰 절을 올린다. 외국생활이 6년, 그동안 좌절하지 않고 매일 국내에서처럼 지낼 수 있는 힘은 곁에서 지켜봐 주신 스승이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 LA 고려사 시절. 1985년, 86년 그 무렵이었다. 운전 면허증을 필기시험 100점 만점으로 땄을 때에 스님이 “어떻게 땄어?” 하시기에 문제집을 보고 공부를 했다고 말씀을 드리고 또 몇 말씀 드렸을 때에 스님도 100점 만점 합격이셨다. 그 뒤로 차 뒷자리에 앉으시면,
“어, 속도 줄여. 좀 천천히.”
하고 말씀을 하시는데 가만히 계시질 않으신다. 엄한 운전 교사이시다. 정면 주차를 잘못해도 “차를 바로 세워. 비틀어졌지 않아?”하신다. 들을 때에는 별로 좋지 않지만 뒷날 회고해 볼 때에는 가슴 뭉클해지는 무엇이 있다. 갑자기 “회초리 매를 좀 때려주시지 않으시고…” 하는 간절한 정이 솟곤 한다. 스님의 손때가 묻은 <신채호 전집> 상 하 권을 건네주시면서,
“외국에 나가 있으면, 모국에 대한 생각을 잊지 말아요.”
하시는데 이럴 때에는 엄하고 냉정한 스님은 어디 가고 자애로우신 스승의 모습으로 붉게 각인(刻印)되어 남는다.
법정스님 (5)
낮엔 앞산 산색에 눈 씻고
밤엔 대밭 바람에 귀 씻고
낮에는 앞산 산색(山色)에 눈을 씻는다. 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 아, 시원해라.
밤에는 불일암 대밭을 뒤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씻는다. 때로는 우우우 처녀 귀신 울음소리, 흐흐흐 총각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은 파도가 되어 밤새 철썩철썩 소리를 내기도 한다.
고요한 달밤에는 내소사 해안(海眼) 스님의 시를 읽는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쥐고 오는 벗이 있다면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香)을 사르고
산창(山窓)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佛經)을 아니 배워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이 없이
굳이 오고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이 시는 절 객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스님이 윤문을 하시고 내가 이를 받아썼다. 원문을 쓴 분은 물론 금강경 해설의 삼대 법사의 한 분이신 해안 스님이시다. 금강경 해설의 삼대 법사가 어느 분이냐 하면 해안 스님, 백성욱 박사, 석해탈 스님.
처음 이 시의 원문을 접한 곳은 선운사 객실. 낯선 산사의 객실에 들면 시간이 퍽 한가해진다. 읽을거리도 없고 일거리도 없다. 그냥 밥 때 밥 먹고 잘 때면 자는 것이다. 세상 편하고 걸림이 없다.
법정스님이 이 시를 보고,
“너무 한문투야. 시를 좀 손질하는 게 어때?”
하시기에 내가 우선 소리내어 읽었다. 스님은 한 구절이 떨어질 때마다 수정을 하셨다. 윤문을 이런 식으로 하고 나서 다른 이에게 보여주니 깜짝 놀란다.
“이 시를 신문에 실어요.”
불일회보에는 당시 편집 일을 맡고 있던 현장 스님의 눈에 띄어서 실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수 천장씩 찍어 나눠 가지며 출격(出格)장부의 풍류 시를 함께 음미하였다고나 할까.
지금은 수도를 놓고 있지만, 그때는 우물물을 썼다. 국수를 삶아서 구시통에서 씻다가 몇 가래를 입안에 넣고 쭉 빨아먹으면서,
“국수 맛은 막 씻어서 이렇게 먹는 맛이 제일이야!”
하고 스님이 시범을 보이시면 나도 따라서 국수 몇 가닥을 입안에 넣고 쭉쭉 빨아먹었다.
돗자리를 깔고 둥근 상을 펴놓고 국수를 먹는다. 저녁 식단은 대개 분식 종류. 그리고 나서 따끈한 홍차를 마신다. 커피도 마신다. 녹차는 대개 오전과 점심 때에 마신다.
공양주 초대는 노보살님, 비가 오는 밤 ‘대밭 귀신소리’에 무서워서 밤중에 스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가 꾸중만 듣고 울며 떠났고, 다음이 영명 스님, 역시 비가 오는 밤에 불일암 주위에서 음독 자살을 기도한 젊은이 한 쌍 때문에 고생고생 하였고, 그 이후 공양주가 현장 스님에 이어 산매화 보살로 내려왔다. 나는 그 다음 공양주였는데 1980년 광주 민주 항쟁이 있던 그 해 여름이었다. 사복형사가 간혹 불일암 주위를 배회하고 몸을 사리는 젊은이들도 외부의 눈길을 피해 오고 갔다. 스님은 당시 여름 이야기를 ‘한줌의 재’ 란 글에서 이렇게 쓰셨다.
“어제도 나는 부엌 바닥에 앉아 손 칼로 대를 깎아 차 수저를 만들며 하루를 보냈다.”
“어저께는 땅거미가 짙게 내릴 때까지 개울가에 흩어져 있는 돌을 주워다가 우리 불일(佛日)로 오는 가파른 길목에 층계를 놓기도 했었다. 요즘 아래 절에서 올라와 있는 지묵 수좌와 함께였다. 단순한 노동은 육신의 건강보다도 쾌적한 정신상태를 위해서 필요한 동작이다. 이 여름은 줄곧 이런 일로 고통스러운 내출혈을 다스릴 것이다.”
<붓다뉴스> 20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