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閑山島大捷)
한산도 앞바다 싸움을 하루 앞둔 선조 25년(1592) 7월 7일 통영땅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 왜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8일 이른 아침 조선 함선 100여 척은 일제히 돛을 올리고 왜군 함대를 향하여 속력을 냈다. 견내량의 남쪽인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왜군이 조선 함대를 발견하고 빠르게 도주하였다.
충무공은 쫓아가는 척하면서 열세를 보여 왜군이 견내량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나오도록 유인하였다.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아 싸우기에 부적당할 뿐 아니라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이 육지로 헤엄쳐 가버리면 육지의 백성들에게 해가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수군이 전의를 잃고 퇴각하는 것으로 착각한 왜군은 그 뒤를 추격하며 한산도 앞바다로 나왔다. 충무공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반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는 일제히 학익진(鶴翼陣)의 대형을 취하고 적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학익진이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을 치고 적을 공격하는 전법인데, 이러한 전법은 육전에서도 하기 힘들거니와 바다에서, 더욱이 추격해오는 적의 함대 앞에서 전선을 선회시켜 진을 치고 공격한다는 것은 많은 훈련과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조선 수군의 맹공격으로 인해 일본의 수군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겨우 생명만 건진 채 달아났으며, 왜선 70여 척 가운데 59척이 격파되었다.
한산대첩의 승리로 인해 조선 수군은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남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일본 침략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산대첩의 성격을 임진 3대첩인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견주어본다면 행주대첩과 진주대첩은 수비를 잘해 얻어낸 승리이고, 한산대첩은 적을 공격해 얻은 승리라 하겠다.
출처:(답사여행의 길잡이)
2022-11-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