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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좋아서*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이 비를 맞을 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맞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올 한해, 여러분은 어떠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을 만나서 김천말로 억수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 학생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았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워낙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여러분과 만나다보니 여름엔 너무 더워서 헐떡거려야했고, 겨울엔 또 추워서 오돌오돌 떨어야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지만 사랑은 좋은 것을 함께할 때 생겨나고 정은 어려움을 함께할 때 더 두터워진 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그 동안 정이 많이 쌓였으리라 생각 합니다.
제가 처음 여러분과 만나던 날 나는 여러분에게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그냥 편하고 가까운 이웃집 언니나 아줌마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었는데 그동안 제가 얼마나 가까운 이웃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갔을지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그동안 나는 많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벌써 졸업 이라니, 정말 섭섭해요,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로 떠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지금처럼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아갈 것 이니까 앞으로 동네에서 만나더라도 지금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깊어지면 언제 끝이 보일지, 몰라서 불안하지만 정이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뗄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정에는 숙성기간 이라는 것이 있다고도 하더군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께서 처음부터 사랑해서 만난 것은 아닐지라도 함께 어려움을 함께하며 세월을 함께 보낸 것만큼 깊은 정은 아닐지라도 그만큼의 정을 쌓였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이런 만남을 발판으로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나라에서 잘 정착하여 적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선생님!”. 와락 안기는 000을 가슴에 안으니, 1년 전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이 주마등 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나의 첫 학생이었습니다.
외국 새댁들과 우리나라 총각들이 만나서 가정을 이룬“다문화가정”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이웃집에 필리핀에서 새댁이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전에도 외국에서 새댁을 데려왔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두 번 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시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내가 도움이 될까싶어 호기심 반, 염려 반으로 지나는 길에 잠간 들여다보니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던지 처음 보는 나를 마구 방으로 끌어들이며 “커피, 커피” 를 외치더니 금방 커피한잔을 끓여 내오며 무조건 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안방까지 끌려들어가서 커피조차 한잔 얻어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책상에서 노트한권을 꺼내더니 내 눈앞에 막 들이미는 것 이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천천히 노트를 들여다보니 간단한 일상용어들이 한글과 영어로 함께 적혀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로들면 고우-가다 슬로우-천천히 스카이-하늘 마운틴-산 이런 식으로 적혀진 노트를 들여다보다가 영어가 통한다면 혹시나 한 두 마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잉글리쉬?” 라고 하니까 “땡큐 땡큐”라고 하기에 대충 내가 아는 영어단어를 총동원하여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려는데“씨유 투머루”라면서 내일 또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와의 만남이 하루 이틀 이어지면서, 나는 중학교 때 배운 내 영어 실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인터넷도 뒤져보고 오래전배운 영어 단어들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빼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진땀을 빼가며 그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있음을 깨달으며 생각하니 일상용어도 일상용어지만 부부간에 서로 정을 쌓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날 남편이 일하고 들어오면 어께를 주물러주면서 “여보! 수고 했어요”. 라고 말하고 밤에 잘 때도 그냥 자지 말고 남편 팔을 끌어다 베고 누워서 귓가에 대고 “여보! 사랑해요”. 라고 속삭여 보라라고 하였습니다.
솔직히 경상도 사람들이 들으면 징그럽다고 진저리를 칠 말이긴 하지만 나는 서울 태생인지라 그런 애정표현이 낯설지 않아서, 무심코 해보라고 한 것인데, 그 말이 그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내가 가니까 팔짝 팔짝 뛰면서 빨리 들어오라고 끌어 들이더니, 노트를 펼쳐서 내 눈 앞에 마구 들이미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밑도 끝도 없이 “나도 너를 사랑할게”라고 씌어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보니까 어젯밤에 남편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남편이 자기에게 해준 말에 너무 좋아서 잊어 버릴까봐 노트 한 귀퉁이에 메모까지 해놓고 들여다보며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덩달아 행복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영어단어 한 개라도 더 알아보려고 노력하였고 어느 정도 그녀와 나는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웬만한 이야기가 좀 통 하게 되어, 수다까지 떨면서 웃을 수 있는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12월이 들어서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는데 항상 가는 시간에, 내가 가보니 그날은 핸드폰을 들고서 마당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것 을 처음 본다면서 눈이 오니까 맘이 설레서 공부를 할 수가 없으니까 공부는 접어두고 눈 오는, 것을 배경삼아 핸드폰사진을 찍으면서 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핀에 사는, 가족들에게 눈 오는 모습을 화면에 담아서 보내주고 싶다면서 나에게 연신 사진을 찍어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까짓것 눈오는 것을 보면서 놀아보는 것도 공부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어주고 내리는 눈을 입을 벌리고 받아 먹는 놀이도 하면서 내리는 눈과 보는 눈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내리는 눈은- 스노우, 보는 눈은-아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니 잘 알겠다면서 내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면서 “아이아이” 라고 외치는 천진난만한 그녀가 하루빨리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손짓발짓에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그녀가 필리핀 말을 마구 쏟아낼 때 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녀가 필리핀 말을 마구 쏟아 낼 때면 당황해서 쩔쩔맸었는데 한국말과 영어로도 의사전달이 잘 되지 않을 때면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기나라말이 봇물처럼 튀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슬로우 슬로우 천천히 말해.”라면서 그녀를 진정 시키고 나서 천천히 노트에 적혀있는 영어단어를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겨우겨우 대화를 끌어갈 때는 영어가 부족한나나 한국말이 서툰 그녀나 똑같이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인데 외국새댁과 함께 사는 우리나라 남편이 신경질이 나서, 아내에게 심한욕설을 마구 퍼부었더니 그 아내도 자기나라말로 뭐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데 ‘아마 이 여자가 날보고 욕을 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그건 욕을 하는 것 이 아니라 답답해서 순간적으로 자기나라말이 튀어나오는 것 뿐 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그녀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에게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는데 한창 재미를 느껴가던 어느 날
김천부곡 복지관직원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나와 남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복지관에서 정기적으로 우리들을 돌보는데 마침컴퓨터를 켜놓고 그녀를 가르칠 교재준비를 하는 중 이었습니다.
“뭐 하세요?”.
“우리 동네 필리핀 새댁 하나에게 한글 좀, 가르치고 있어요.
근데 워낙 실력이 부족해서 이 모양 이네요.”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복지관직원이 반색을 하면서 “복지관에서도 올해부터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한글교육을 하려고 계획 중 인데 그렇잖아도 한글강사가 필요 하던 참.” 이라면서 나에게 한글강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고 고사 하였지만,3월 달이 되자 복지사 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서는 워낙 인력이 부족해서 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면서 통 사정을 하는것 이었습니다.
사정하는 복지 사 에게 ‘나는 강사라기보다 그냥 그녀들의 언니고 동네 아줌마 일뿐 이라고 망신살이 뻗쳐도 할 수 없다’는 다짐을 받고 눈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우리 동네만 해도, 외국새댁들이 괘나 많았습니다.
19세 때 갑작스런 사고로 반신불수 장애인이 되어서 사회생활이라고는 꿈도 꾸어보지 못하다가 남편에게 시집와서 대문 안에 갇혀 살면서 사람들하고 만나는 것에 서툴 기만한 나에게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수도 있겠기는 하지만 내 도움 없이는 물 한모금도 혼자 해결 할 수 없는 남편을 집에 두고 한글공부 가르친다는 핑게로 나돌아 다닐 수는 없는 일이라고 어려워하는 나를 배려하여 내가 출퇴근을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동네 마을회관을 빌려서 그곳에서 공부방을 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내가 아니라 그녀들에게 한글교육이 필요한 것은 잘 아는 일이지만, 한글공부보다 농사일을 하는데도 지장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가족들의 입 장 이었습니다.
복지사와 나는 어떻게 하면 농사일에 구애 받지 않고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까? 하고 의논을 하다가 장소는 동네 마을회관을 빌려놓고 수업시간도 낮이 아닌 저녁시간<복지사의 퇴근 후 시간 19시>으로 정해놓고 새댁들을 섭외하러 나섰습니다.
우리 조마면과 김천시의 다문화 가정만 해도 250여 세 대인데, 우리들이 확보해야할 인원은10명 정도지만 3-4명만 모아져도 일단 공부를 시작하기로, 하고 복지사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하였습니다.
다른 동네는 복지사가 공문을 띄우고 전화 상담을 하여 학생들을 모집하고
우리 동네는 복지사가, 찾아가는 것 보다 내가 찾아가면 나는 이웃집 아줌마니까 훨씬 더 새댁들을 데리고 나오기가 쉬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가호호방문을 하였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랭하였습니다.
혹시라도 문밖으로 내돌리다 잘못되면 어쩌나? 라는 생각부터 앞서는 가족들의 염려는 어쩌면 당연한 것 이었습니다.
우리남편도 그랬으니까요.
반신불수 장애인 내가23년 전 22세의 어린나이로 12살이나 연상인 휠체어를 타는 남편에게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디 며칠이나 살다가 떠나나보자”는 식이었고 “뭐 때문에 남편 같은 사람에게 희생하며 사느냐 더 좋은 데로 시집가라”는 부추김을 당해야 하다 보니 우리남편도 혹시 내가 그런 말에 솔깃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봐 차라리 나를 대문 안에 가둬두고 동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게 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동네 사람들이 외국에서 이 먼리 타국까지 어린나이로 시집을 오게 된 그녀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은 23년 전 나를 대하던 때<오죽 갈 데가 없으면 저런 남자에게 와서 살겠나?>와 별반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나를 보던, 그 눈빛보다 더 냉랭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녀들을 대할 때 일단 생김새가 다르니까 신기해하고 말이 안 통하니까 또 이상하게 흘끔거리고 무슨 사연으로 저 어린나이에 이 먼 나라까지 홀로 왔을까? 라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니 그 남편들과 그 가족들의 심정이 23년 전 나를 대문 안에 가두고 싶어 하던, 우리남편과 우리가족의 마음과 별반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냉랭한 가족들을 두 번, 세 번 네 번까지 찾아가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겨우 다섯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우리 동네, 마을회관을 빌려서 겨우 입학식을 치렀습니다.
그래도 입학식이니까 남편들도 함께 와서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우리 딴 에는 고기와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가족들을 초대하였더니 시어른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와 아기들이 함께 자리를 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입학식을 시작하면서 나는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개와 고양이가 무엇 때문에 앙숙이 되었는지 아시나요?”
제가 어는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고양이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앞발을 치켜 드는 것은 개에게 사이좋게 놀자는 표현인데 개들을 그 모습을 보고 한판 붙어보자는 뜻 인줄알고 고양을 물어 뜯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양이도 화가 나서 개의얼굴을 할퀴어버렸고 그 후부터 개와 고양이는,
견원지간이라는 원수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 베트남에서 시집온 19세밖에 안 되는 어린신부가 40대노동자인 남편이
휘든 폭력에 유명을 달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새댁의 유고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는 ‘내가 어리고 한국물정에 어둡다보니 잘 모르기는 하지만 뭔가 당신이 하는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은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로해주고 도움이 되고 싶지만 당신은 내가 한국말을 배우러 다니는 것도 반대하고 자꾸만 술만 마시고 폭력만 일삼으니 나는 더 이상 여기에서 살수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아기도 많이 낳고 황금빛 미래를 꿈꾸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20년 전 처음 우리 남편에게 시집왔을 때 우리남편도 그랬습니다.
내가 말씨도 틀리고 몸까지 불편한 장애인 이다 보니, 혹시 내가동네사람들에게 나쁜 소리를 듣고 마음에 상처 받을까봐 그냥 집에만 있으라하여 집안에서 공주처럼 대접받으며 살았는데 물론내가남편이나 시댁가족과 사는 데는 아무지장이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데는, 아직까지도 많이 서툽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상처받고 깨지더라도 나는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며 살았을 걸하는 후회가 막급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어떤 분께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화가 나서 마누라에게 욕을 했더니 그 여자가 자기나라말로 나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아무래도 나에게 욕을 하는 것 같더라’ 고...
그래서 그때는 화가 나니까 그럴 수도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우리 학생하고 공부를 같이 해보니, 어느 부분 에서 막히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기나라말이 막 튀어나오더군요.
아마그때 그 새댁도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답답하니까 자기나라말이 무심코 튀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께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개와 고양이처럼, 원수가 되지 말고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여 사랑하는 부부로 발전해 가시라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입니다.
부부란 무엇일까요?
부부란 30점짜리 바보와40점짜리 바보가 만나서 100점이라는 고지를 향하여 함께 손 잡고, 걸어가는 긴 여정이라고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해주는 진짜부부로 거듭나는 그날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우리 새댁들보다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아서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들보다 좀더 나은 것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여러분들보다 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물정에 어두운 여러분들 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고 여러분은 학생인 것 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그냥 편한 이웃집 언니이고아줌마이고 싶습니다. 우리함께 잘 지내면서 서로 많이 가르쳐주고 배워가면서 올 한해 잘 이끌어 봅시다.” 라고 나의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남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에이00공부나 가르치라니까”하면서 쌍욕을 내 뱃고 마을 회관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나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서 눈앞이 캄캄해져서 주저앉고, 말았고, 그 남자의, 아내도 불안해서 쫏아가 버리고 입학식 분위기는 그만 싸늘하게 식고 말았습니다.
복지사님이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될 것이라면서 노트와 교재와 이름표 를 나눠주는 것으로, 겨우 사태를 수습하여 입학식은 끝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음식은 마을 어르신들이 다음날 회관에 모여서 잡수시라고 정리하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착찹한 심정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 품에 안겨서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촛불을 켜놓고 아침기도를 드리면서
“하느님! 그 사람이, 일부러 나를 무시하고 훼방을 놓으려고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짓이 뭔 일인지도 모르고 그랬을 겁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뭘 몰라서 한일이니까 용서해주세요
제가 더 열심히 잘해서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뉘우치게 해볼게요.”라고 기도하고 나서 아침을 먹고 나서 그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00씨! 어제 제가 무슨 말실수를 해서 00씨를 화나게 했나본데 미안해요.
나는 좀 잘해보려고 하다 보니, 아직 처음이라서 잘 모르고 한 것이니 맘 풀고 앞으로 는 더 잘해 볼 테니까 새댁 다음 주에도 공부방에 보내줘요.”라고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먼저 무조건 사과를 하니까
“아니예요 아지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술을 한잔 먹은 김에 죄송하게 됐어요”
라며 사과를 받아주며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으로 겨우 수습을 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다음 첫 번째, 시간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가르쳐볼까? 생각하며
수업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화요일오전에 동네 동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고 물었더니 하는 말 “동네 어르신들께서 마을회관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었습니다.
내일모레 수업을 하려고 모두 마을회관으로 모이라고 하였는데 갑자기 마을회관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었습니다.
당장 전화로 복지 사 에게 알리고 우리는 다시모여 문제해결에 대해, 논의를 하였습니다.
당장 다른 장소를 구할 수도 없고, 몸이 불편한 내가 다른 동네까지 오고가는 것도 어려운지라 조금 좁기는 하지만 우리 아랫방<시어머님이 사용 하시던 방>이 비어있으니 그곳에서 시작하자고 결정을 하고, 마을회관 대표를 만나서 이유를 들어보니 우리가 공부하려면 보일러도 돌려야 하고, 요리실습 같은 것을 하려면 물도 사용할 것이고 또 밤에 하니까 전기까지 사용 할 것 인데 워낙 마을회관 운영비가 작아서 그런 제공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이 왜? 마을회관 사용하는 문제를 동장하고 의논하여 결정 했느냐는 것, 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속이 확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복지사가 마을회관을 빌리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복지사하고 마을회관을 찾아가서 그곳에 계시는 어르신들께 마을회관을 빌리고 싶은데 누구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곳에 계신 어르신들이 동장하고 의논하면 된다고 하기에 동장님과 만나서 1주일에 한 번 씩 공부하는 날마다 복지관에서 독거어르신들께 제공하는 밑반찬을 가져다 드리고 정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형편이 되는대로 가끔씩 쌀도 한 포대씩 가져다 드리고 공부를 마치면 보일러 기름이라도 한 드럼 넣어주겠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회관을 빌린 것인데 이제서 마을회관 대표랑 의논을 안 하고 동장이랑 의논을 하여 마을회관 빌리는 것을 백지화 하겠다는 것은 이유가 되질 않았습니다. 말은 빙빙 돌려가며 여러 가지로 핑게를 대고는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나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나처럼 외지에서 들어온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몸까지 불편한 주제에 자기들도 못하는 선생노릇까지 한다고 우쭐대는 꼴이 분명히 눈꼴 사나 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서러움이 복받치고 속이상해서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정말 성질대로 하려면 “뭔 말인지 알았으니 다 그만 두세요”. 라고 쏘아붙이고 문을 박차고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다른데도 아닌 우리 동네서 이런 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우리 동네로 시집온 우리 학생들이 이왕이면 우리 동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가며 잘 지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기에
“잘 알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염치없는 생각을 했나봅니다. 그러면 그냥 우리 집 아랫방이 비었으니 그곳에서 공부를 할 테니까, 혹시 김치를 담그거나 요리를 할 때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어르신들께 여쭤 볼테니, 그럴 때는 꼭 도와주시고 우리가 맛있는 요리를 해놓고서 잡수시러 오시라고하면 꼭 오셔서 맛을 봐 주셔야 해요.”라고 웃으면서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고 나서 입학 식 때 걸어두었던 풀랜카드랑 장식품들을 떼서 우리 집으로 가져오는데 아무리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고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만 피눈물 흘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이 겪어야하는 설움이라는 생각에 반드시 끝까지 잘 성공해 본떼를 보여주자는 결의에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나와함께 호흡을 맞춰서 공부방을 준비하던 복지사가 대구로 발령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후임자가 새로 배치되기는 하였지만 처음 나와 전 복지사가 함께 계획하고 꿈을 키우던 많은 일들이 새로운 복지사와는 좀 다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내가 앞장서서 시작한일이라서 중단을 해도 내가 욕을 먹고 잘못 되도 내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공부방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첫 시간공부를 시작하는 날, 갑자기 학생들에게 장소변경을 알리지 못했으므로 복지사가 회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하는 학생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우리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가슴에 달았던 코 수건을 떠 올렸습니다.
그래서 복지관에 손수건을 사달라고 하여 이름표와 함께 가슴에 달아주었더니 서로서로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우스워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그런 손수건보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일은 오래전 한국으로 시집와서 우리나라말과 자기나라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을 확보 하는 일이었 습니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필요한 인원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이나, 어려운 일일뿐이고 김천시내에 우리말과 외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인력을 구할 수 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손짓발짓 다 동원하며 ㄱㄴㄷㄹ을 목청껏 외치며 1시간을 떼 우는 데 진땀을 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첫 시간을 마치고 생각하니 이런 주먹구구식으로는 수업을 계속 이끌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혹시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그 당시만하여도 다문화에 대한 정보가 크게 많지 않고 시중에 나와 있는 교제들도 우리 학생들이 배우기엔 너무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성당에 다니는 어떤 형제님의 부인이 외국에서 왔는데 그 새댁은 아예 유치원으로 출 퇴근을 하며 유치원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내가 다니는 성당의 부설유치원의 원장수녀님께 부탁하여 유치원생들이 사용하는 교재를 얻어 와서 우리 학생들에게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림과 함께 배우는 한국말에 학생들도 흥미를 느끼며 재미있어하였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아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였지만 한고비를 넘으면 도 한고비가 찾아온다고 어느 날 저녁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우리학생 남편이 술이 한잔 불그레하여 찾아와서는 공부방 문 을 마구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내다보며 무슨 일이냐? 고 물었더니 처음엔 마을회관에서 한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아지매 집의 좁은 방으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이렇게 좁은데서 북적대느냐? 이렇게 좁은 방에서 북적대지 말고 차라리 공부방을 자기네 집 거실로 옮기던지 아니면 옆 마을 마을회관을 빌릴 테니 그쪽으로 이사를 가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부시간도 일주일에 한번만 하니까 배운 것을 금방 다 잊어버리니까, 공부를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복지관직원과 의논해 보겠다고 겨우 달래서 돌려보내고 나서 하던 공부를 마저 마치고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집에는 물론 집 거실은 우리방보다 훨씬 넓고 좋기는 하지만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셔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데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수 도 있고 이웃마을 마을회관으로 공부방을 옮기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을 회관에서 쫏겨 나서 우리 집으로 장소를 옮긴 것 만해도 밀려난 기분인데 만약에 또 장소를 옮긴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리 밀리고 저리 쫏기는 천덕꾸러기처럼 보일 수 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복지사 님 의 생각도 나하고 같기에 그때부터 나는 죽어도 더 이상은 못 옮긴다고 죽기 살기로 버텼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공부를 하는 것도 복지관직원들이 시간이 나지 않아서 곤란하다고 겨우 그 사람을 달래놓을 수 밖에 없었지만 속은 무척이나 상하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헉생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말도 꽤 잘하는 것 같고 근근히 공부방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던 어느 날 저녁어스름 무렵에 우리학생의 남편이 찾아 왔습니다.
그날은 공부하는날도 아닌데 어쩐 일인가 싶어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지만,
안 방 으로 불러들여 우리 남편과 함께 커피한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으니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나에게 가끔씩 자기 집으로 와서 아내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줄 수 있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에서 다문화가정에 보급되는 컴퓨터를 타다놨는데 그냥 방구석에 쳐 박아 두는것 보다 아내에게 가르쳐주면 잘 할 것 이라고 하기에 나는 무심코 “내가 컴퓨터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우선 급한 데로 워드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고 하였더니 남편이 안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물론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워드는 잘하고 한글도 빨리 칠 수 있지만 나는 한손밖에 사용할 수 없다 보니 새로 컴퓨터를 배우는 새댁들에게 나처럼 독수리타법을 가르쳐서 어디다 쓰겠느냐는 것 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나는 컴퓨터를 가르치는 데는 부 적격자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남편이 그럴 것이 아니라 새댁이
정말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공부방에 공부하는 날 다른 학생들보다 1시간 일찍 오면 우리 방에서 남편이 컴퓨터를 가르쳐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방에는 남편이 사용하는 컴퓨터와 내가 쓰는 컴퓨터랑 두 대가 있으니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은 그럴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집의 컴퓨터를 우리 방에 가져다 놓고 그 사람 부인이 사용하게 해주면 손에 익어서 더 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방은 너무 좁아서 노트북도 아니고 컴퓨터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고 사양 하였지만 무조건 내 책상위에 가져다 놓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노트북을 들고 마루로 나가고 내 책상에는 그녀의 컴퓨터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저녁7시에 한글공부하기에 앞서 6시부터 우리 방 에서는 컴퓨터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번 컴퓨터를 배우던 그 학생이 재미가 나던지 다음번에는 베트남 학생들 두 명이 더 지원을 하여 우리방의 컴퓨터세대가 폴 가동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새댁들이다보니 공부 하러올 때 간난 아기들도 함께 오는데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다보니 한글공부를 할 때는 그냥 앞에 안고 하기도하고 아기를 봐주는 도움이 아줌마가 봐주기도 하는데 컴퓨터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결국 내가 아기를 봐주어야하는데 아기를 키워 본적도 없는데다가 몸까지 불편한 내가 아기를 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그날도 마루에서 아기를 보고 있는데, 이 녀석이, 그날따라 자꾸만 엄마에게 가겠다고 내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이었습니다.나는 아기를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쩔쩔 매고 있자니 아기엄마가 컴퓨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는지 나에게 아기발목을 꼭 잡고 있으라고 하여 발목을 꼭 잡고 못 들어가게 막으려니까 그만 아기가 발버둥을 치면서 울어대기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울어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기가 방으로 못 들어가게 잘 붙잡고 있는수 밖에 없었는데 한참동안 아기를 계속 울리는 나를 참을 수가 없던지 아기 엄마가 공부를 하다말고 방문을 박차고 나오더니 “선생님! 일어서 보세요”. 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 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벌떡 일어섰더니 아기를 내 등에 척 올려놓더니 포대기를 꽁꽁 묵어 주면서무조건 업고 나가라는 것 이었습니다.
생전처음 아기를 업고 마당으로 쫏겨 났는데, 몸이 성치 않다보니 아기는 자꾸만 울어대고 날씨는 더워서 땀은 비칠비칠 흘리면서 창문을 통해서 방을 들여다보니 그래도 한글자라도 더 배워 보겠다고 책상 앞에서, 귀를 틀어막고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 기특하고 신퉁하여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학생들은 어리고 야무지고 똑똑해서 워드정도는 금방 손에 익어서, 잘 치는데 인터넷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남편들의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자기들은 컴퓨터를 모르는데 아내들이 인터넷까지 하게 되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니까 그만 중단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우리 입장 에서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 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고 돌아간 후에, 교실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사용하던 연필이며 지우개들을 초등학교1년생들처럼 다 팽게 치고 가기도하고 정말 웃기는 것은 이 구석 저 구석에 언제나 똥 기저귀들이 한 두 개씩은 꼭 쳐 박혀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연필과 지우개를 주워서 사물함에 넣어두고 똥 기저귀들을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으면서도 ‘에구 아직 어려서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구나’ 라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오고 딱한 생각이 앞서는 것을 보면 나는 분명히 우리 학생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방도 비좁고 환경도 열악하지만 내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학생들에게도 전달되었는지, 어느 날 한 학생이 내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친구 한명 더 데리고 와도 돼요?” 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럼 얼마든지 데리고 와”.
그랬습니다 우리공부방은 오는 학생 안 막고 혹시라도 나가겠다는 학생이 있다면 섭섭해서 가끔씩 매달리는 그런 공부방 이었습니다.
면사무소에 수강신청 할 것도 없이 오고 싶으면 누구든지 오라고 개방하기로 하였던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새로 온 학생은 나를 보자마자 “언니! 여기웬일이세요?” 라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몇 년 전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나와 만난 적이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본 그녀는 어린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목욕을 와서 아이들을 씻기는 것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탕속에 빠질까봐 한손에 한명씩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초보엄마 티가 풀풀 풍기는 것이 보기 딱해서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아이하나와 놀아 주기도 하고 등도 밀어주면서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시골에 산다는데 한국말은 서툴지만 우리면내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남편이름을 물어보니 아이아빠가 어린 시절 우리가계로 과자를 사러 다니던 코찔찔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라서 많이 반가왔었는데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헤어진후 다시 못 만나서 가금씩 보고 싶던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김천지역이 좁은 곳이다 보니 길가에서라도 한번쯤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리워하던 사람을 이렇게 다시 만나니 그보다 반가 울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방이 우리 집이고 내가 선생님이지”. 라는 말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를 보니 그녀 또한 나 차럼 가끔씩 내가 보고 싶었던가봅니다.
그때의 그 꼬맹이 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서 큰아이가 초등하교 2학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우리 공부방의 좋은 점이 있다면 아이들도 엄마 손잡고 함께 와서 엄마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학생들이 한두 명씩 더 늘어나더니 어느새 우리학생들이 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엄마들이9명이고 따라오는 어린이들도 아주 간난 아이들 말고도 4명이나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늘어나고 한글 실력도 늘어나니 나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이는데 정작우리랑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옆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전화가 걸려 와서 무심코 받았는데 다짜고짜로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신데요?”라고 물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우리 학생 중에 한명이 친정이엘 다녀왔는데 자기 계수씨는 시집 온 지 1년도 안되었는데 친정엘 보내달라고 자꾸만 조른다면서 그 모든 일이 내가 공부방을 한답시고 새댁들을 모아놔서 서로 부추겨서 생긴 일이라 면서, 공부방에서는 공부만 가르치고 사담은 일체 못하게 막아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청에 고발해서 우리공부방을 문을 닫게 만들겠다고 협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보세요 내가 베트남 말이나 필리핀 말 캄보디아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끼리 모이면 다 자기나라말로 수다를 떠는데 내가 지들끼리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렇다고 공부방에서 사담을 하지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릴 수도 없는 것인데 정 그러시면 새댁을 보내지 마세요.”
내가 나서서 우리 동네에서 공부방을 운영 하다 보니 잘해도 내 탓이고 잘못해도 내 탓인데 복지관직원들은 공부를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뒷수습이 잘못되면 그 모든 것이 내 탓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공부방을 고발까지 한다는 말에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가엾은 그 새댁은 그 후로 우리공부방에 나올 수가 없었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묵묵하게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지관 복지사가 공지사항이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데 “5월5일 어린이날 대전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갈 것 이니 준비하세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공부방에서는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일반적인 소풍이라면 소풍가는 날, 김밥을 싸고, 계란도 삶고, 사이다를 사고, 과자를 사서 간식으로 작은 베낭을 채우겠지만 우리 학생들의 소풍 길엔 남편과 아이들이 동반되고 가방에는 우유병과 기저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래도 소풍인데 칠성 사이다랑 삶은 계란이, 빠지면 섭섭할까봐 내가 계란은 삶았습니다..
복지관에서는 8시까지 모여서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나는 너무 늦을까봐 7시까지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학생들보다 내가 더 설레었는지 6시30분쯤 우리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에 미리 나가보니 우리 학생들도 나처럼 설레었는지 벌써부터 삼삼오오 모아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멀찌감치 보이는 집 앞에서 약속장소로 나오지 않고 울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쫏아가 보니 다른 학생들은 다 부부 동반하여 나왔는데 그 학생 남편이 하우스일이 바쁘다고 함께 가지 않겠다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고, 고집을 부리더니 자전거를 타고 하우스로 나가버렸다는 것 이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그 먼 길에 따라가냐 면서 훌쩍훌쩍 울고 서 있는데 나는 속이 상해서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옷 갈아 입고나와 내가 하우스로 가서 말해볼게”
라고 학생을 들여 보내놓고 나는 들로 나가는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하우스로 쫏아가서 “이런 소풍 우리가 또 갈 수 있겠느냐, 하우스야 하루만 딱 비우고 함께가자, 00씨가 안가면 나 새댁 데리고 나가서 대전에다 놔두고 올거다”라고 빌고 사정하기를 10여분을 설득하니 그제야 못이기는 척 집으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함께 나서자 우리학생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선생님! 최고”라면서 내 볼에 뽀뽀를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전원 참석을 시켜놓고 아직 화장할 줄도 모르는 학생들을 모아놓고돌아가며 립스틱이라도 발라주었더니 서로서로 쳐다보며 거울을 꺼내보면서예쁘다고 깔깔 거렸습니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몸만 성인이었지 하는짓은 초등학생들과 별차이가 없을정도로 순진하고 착하기만하였습니다.
우리가 길가에모여 서서 왁자지껄하자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면서
“어디가는데?”. 라고 호기심을 발동하자우리 학생들은 일재히 제비같은 입을모아서
“우리오늘 소풍가요”라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니 동네 사람들도 “학교를 한다더니 소풍도 가는가보네, 참 좋겠다 우리도 소풍 가고싶네 잘 다녀와”.하면서 격려해주고 배웅도 해 주었습니다
복지관버스는 8시 정각에, 도착하였고 한명도 빠짐없이 다 모여 있는 우리를 싣고는 곧바로 출발하였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렸고 뒤에 앉은 학생들도 모처럼의 나들이가 신바람이 나는지 베트남노래도 불렀고 필리핀노래도 들려 왔습니다.
휴게실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잠간 쉬었는데 우리 학생들은 길 잃어 버리면, 안된 다면서 무조건 선생님 손을 잡고 가야 한다면서 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줄줄이 손을 잡고 다함께 화장실에 갔다가 문 앞에서 인원점검까지 마친 후에 또 다 같이 손을 잡고 돌아오며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함께 손을 잡고 몰려다니는 우리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우리학생 남편하나가 자기 아내에게 “00엄마! 여기 어딘지 모르지? 여기다가 내려놓고 가버리면 집에 못 찾아올걸”하고 놀려대자 우리학생 하는말이 “여기 어딘지 나 알아요. 지난번에 서울 갈 때 한번 지나갔잖아요, 그리고 내려놓고 가면 무조건 택시를 타고 김천가자고해서 김천에 가면 거기에서 조마가자고하면 집에까지 찾아갈 수 있어요”.
어찌나 똑똑하게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대답하던지 나는 그만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이 하시는 말씀“야 이 사람아 여기서부터 조마까지 택시를 타면 택시비가 백 만 원은 나올 건데, 자네 백만 원 있어?”.라고 또 한 마디하자 우리학생 하시는 말씀이 “치 그 택시비는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받으라고 하면 되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00아빠 집에 혼자 가서 돈백만원 준비해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 그냥 새댁 데리고 가는게 낳을 것 같은데요” 내가 한마디 거들자 버스 안은 그만 웃음바다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대전을 지나 드디어 동물원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는데 한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대전 동물원으로 모여드는지 도로는 자동차들로 꽉 채워져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차가 밀리니까 한아기가 울음보를 터뜨리기 시자 하더니, 전염이라도 된 것 처럼 아기들이 합창으로 울어대는데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차가 밀리는 데를 가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고, 재미있는 체험이라고 생각하며 대전 동물원에 도착하니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곳엘 처음 가봤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린이날에 동물원에 처음 와보는 나나 우리학생들은 너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점심은 도시락대신에 식당에서 먹기로 하고 3층 식당으로 올라갔는데 때마침 1층에서는 가수들의 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식당의자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고1층 공연장을 내려다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춤까지 추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빨리 밥 먹고 구경 가자”고 설득 하자 겨우 앉아서 점심을 먹었는데 마음은 온통
1층 공연장으로 향해있는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다음에 우리 학생들에게 반드시 노래방체험을 시켜줘야겠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연도 보고 놀이기구도 타고 동물구경도 하면서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잠시 휴게소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내렸는데 자세히 보니 그 휴게소는 내가 남편과 결혼하던 날 신혼여행으로 드라이브를 갔던 휴게소였습니다.
“어라! 나 옛날에 여기로 신혼여행을 왔던 곳이네.”
내가 반가워서 나도 몰래 소리치자 함께 갔던 복지사님과 남편들이 한바탕 웃으면서 “얼마나 신혼여행을 갈데가 없으면 고속도로 휴게소로 신혼여행을 왔었느냐?”고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23년 전 내가 결혼할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장애인들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지금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결혼 할 때는 비장애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고 장애인끼리 결혼하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느냐는 사회적인 편견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끼리 결혼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면서 호기 있게 시작은 하였지만 아무도 환영하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휠체어를 타야하는 중증 장애인인 남편과 반신불수장애인인 내가 부부로 살아가려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하였습니다.
방안에 과자부스러기를 진열해놓은 구멍가게로 생계를 이어가려니 남들처럼 웨딩 드레스를 입는 결혼식은 꿈도 꾸어 볼 수 없어서 친구내외의 한복과 양복을 한 벌씩 빌려 입고성당에서 관면혼배로 결혼식을 대신하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어떤 분이 택시로 가까운 곳이라도 한 바퀴 바람 쐬고 들어가라면서 데려다 준 곳이 그 휴게소였습니다.
그때 휴게소 옆으로 흐르던 강가에 남편이랑 손을 잡고 서서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데 신혼여행의 설렘과 기쁨보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너무 막막해서 가슴이 아프기만 하던 추억의 장소라서 그때 그 강가를 다시 한 번 더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23년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온 결과 그날은 다문화 학생들의 인솔 교사가 되어 그곳을 다시 찾으니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것처럼 기쁘고 뿌듯하기만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학생들과 남편들에게 내가 23년 전 그렇게 결혼생활을 시작해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했는데 나처럼 못난 사람도 살다보니 오늘 같은 날이 오듯이 여러분들은 분명히 나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간다면 분명히 나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버스 안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의 소풍은 그렇게 본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은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마치고 아침에 출발했던 그 장소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헤어지려고 하는데 한 학생이 내 소맷 깃을 잡아끌었습니다.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그러나하고 쳐다보니 내주머니에 음료수 캔을 한개 넣어 주는것 이었습니다.
그 음료수는 아침에 출발할 때 오고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먹으라고 복지관에서 준비해준 간식이었습니다.
그걸 남겨서 나를 주려고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아꼈을 생각을 하니 그 고마운 마음을 뭐라고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학생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표현은 서툴지만 그렇게 마음만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만치 따뜻한 심성을 지닌 착하고 사랑스런 학생들이었습니다.
복지관에서도 학생들에게 한글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요리도 가르쳐야 한다면서 우리의 첫번 째, 요리주제를 정하고 나에게 레시피를 짜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리 라는 말에 학생들보다 내가 더 들떠서 뭘 할까하고 고민하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뭐가 먹고 싶으냐? 고 물었더니 베트남 요리를 하자 필리핀 요리를 하자 말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이왕이면 한국요리인 잡채를 만들어보자면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처음 해보는 요리라서 양을 어떻게 잡을까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남편께서 이왕요리를 할 것이면 넉넉하게 해서 시어른들께도 조금씩 보내고 학생들도 실컷 먹여 보내고, 동네 마을회관에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쫏아 낸 마을회관에는 뭐 하러 요리를 해다 줘요?”라고 내가 볼 맨 소리를 늘어놓자 “야 이 사람아! 자네가 그렇게 옹졸하게 굴면 동네 어르신들과 다를 것이 뭐있어? 그리고 이렇게 이 동네서 공부방을 하는 목적이 뭐였어? 새댁들과 동네 어르신들과 친밀감을 느끼게 하라는 거였잖아”.남편의 말씀이 천번만번 지당하신 말씀이었고 언제나 앞장서서 나 데는 사람은 나였지만 뒤에서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우리학생들은9명이지만 잡채를 20인분을 준비하고 1회용도시락도 준비하였습니다.
복지관에서는 왜 이렇게 많은 양을 만드느냐고 의아해 하였지만 다 필요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내가 원하는 만큼의 요리재료를 사다주었고 드디어 요리를 하는 날,
우리 학생들도 마음이 설레는지 다른 날 같으면 딱 공부시간에 맞춰서 오는데 그날만큼은 일찍부터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기에 “왜 이렇게 일찍 왔어?”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야채 못 씻을까봐 우리가 씻으려고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랬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불편한 사람이니까 자기들이 도와줘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구 고마워라, 어서 손 씻고, 들어와 이것은 씻고 이것은 껍질을 벗겨서 채로 썰고 이것은 삶아서 가늘게 찟고, 그 시간만큼은 나는 손댈 것도 없이 입으로만 지시 하면 되는 그런 요리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에구 잘하네, 이것은 네가 하고, 이것은 네가 해야지, 지금 땡땡이치는 사람은 나중에 설거지하기다”. ‘하하하 호호호 깔깔깔’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깨소금처럼 어우러져 드디어 잡채20인분이 순식간에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시식할 시간!
우리는 1회용도시락을 펼쳐놓고 집에 계시는 시어른들께 드릴 잡채부터 조금씩 싸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전에 미리 준비해놨던 “식구<食具> 라는 단어를 펼쳐들었습니다.
“자 주목 이 글씨를 읽어 보세요”
우리 학생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글씨를 쳐다보며 입을 모아서 “식구”라는 말을 합창하였습니다.
“식구가 무엇이냐 하면 잘 들어봐요. 식구란? 한 솥에 밥을 해서 함께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학생들 집에서 전기밥솥에 밥을 한 솥 가득해서 누구 누구랑 같이 먹나요?” 라고 물었더니 여기저기서“남편이요 어머니요, 아버님요, 아기들이요”. 하는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네 맞아요. 맞아. 바로 그 사람들이, 식구들이예요 다른 말로는, 가족이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훼미리입니다.
가족들끼리는 상대방이 뭘 좀 잘못하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해 줘야 하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무조건 집에 계시는 어른들것부터 챙겨놓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먹어도 되는 거예요” 라고 어른들 공경하는 마음을 알기 쉽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의 첫 실습요리를 큰 도시락에 한가득 담아서 동네 어르신들께도 가져다 드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일부러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동네 어르신들과 좀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심부름까지 시키고 나서 그다음엔 각자 접시에 먹고 싶은 만큼씩 덜어다 먹으라고 하였더니 우리 학생들도 잡채를 참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요리실습을 마치고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다해놓고 작은 도시락 한 개씩 을 손에 들고 돌아가는 우리 학생들 뒷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제야 우리 복지관의 복지사님께서 “나는 이 더운 날씨에 잡채를 20인분씩이나 해서 어쩌려는가싶어 걱정을 하였더니 다 그럴 일이 있었군요.”
그리고 다음날 내가 동네에 나갔더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잡채 잘 먹었다”. 인사를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생들이 만든 것 이라고 우리학생들이 얼마나 착하고 야무지고 똑똑한지 모른다고 우리학생들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학생의 시어머님 되시는 어르신께서는 며느리가 잡채를 가져왔기에 “맛있게 잘 먹었다” 고 칭찬을 했더니 그담부터 밥을 해도 엄마먼저 반찬을 해도, 엄마먼저 라고 엄마부터 먹어야 한다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는지 성가셔 죽겠다면서 함박웃음을 흘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근근이 공부방은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생긴 것도 다르고 말도 서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다보니 우리 학생들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면 금방 동네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는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정자나무 그늘에서 시간을 보내던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걱정스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누구 집 새댁이 돈을 벌어서 친정에 돈을 부치는데 돈벌이를 하려고 집에 농사일은 내 팽게치고 남의 집 품만 팔러 다닐 뿐 아니라 남편이 집에 일부터 하라고 하니까 집에 일 하는 것도 일당을 쳐서 달라고 한다 더라 너무하는 것 아니냐?
이야기를 듣고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별일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결혼해서오는 다문화가정의 새댁들은 한결 같이 다달이 친정으로 생활비를 다 보내주는 것이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남편은 형편이 어려워서 생활비를 보낼 수 없다보니 우리 학생이 남의 집 품팔이를 해서 친정에 생활비를 보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건 칭찬을 해야 할일이지 핀잔을 줄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품돈을 달라는 것도 우리나라 가정부인들도 화가 나면 가사 노동 비를 운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그게 무슨 흉을 잡힐 일이냐고 내가 이야기를 해주자 우리학생 흉을 보던 동네어르신은 그만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또 한 번은 마누라가 자꾸만 친정에 보내달라고 조른다면서 아무래도 공부방의 다른 학생이 친정에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니까 따라서 그러는 것 같다면서 공부방에서 사담을 못하게 막아달라는 어떤 남편의 불만의 소리도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이렇게 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한 여자들이 친정에 가고 싶고 그리워 하는 것은 당연한일인데 나라고 친정가고 싶지 않은 줄아느냐 나 시집 온지 20년이 넘었어도 지금도 가끔씩 친정에 가고싶고 친정가족들이 그리워서 눈물로 밤을 새울 때가 많은데 우리 새댁들은 지금 얼마나 친정이 그립고 가고 싶겠냐?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들은 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국나가 사는 사람들이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애국가 한번 들으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속이 시원하다고 하더라 그런 것처럼 우리학생들도 이런 공부방에라도 나와서 고국말로 수다한번 떨고 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텐데 사담을 못하게 하느냐? 나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주부들이 동창회나 계모임에 가면 남편들 흉보고 시어른들 험담하고 시집살이 고통을 털어 놓는 것은 다 마찬가지니까 아빠들이 이해해야해요
우리 학생들도 모여서 그런 이야기로 스트레스도 풀고 서로 위로하며 배우는 것도 많을 겁니다.
나는 우리 학생들의 선생님뿐만 아니라 괜한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는 대변인 역활도 해야 하는 정말 이웃집언니고 아줌마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재량으로 공부시간전10여분은 간식을 먹으면서 떠드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달이 되어 우리공부방도 여름방학을 하였습니다.
나는 방학 동안에도 맨탕 놀기만 하면 안 된다면서 작은 방학 책을 만들어서 나눠주며 당분간 아쉬운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든 탓인지 방학식을 하는 날 나도 학생들도 눈물을 글썽 거렸습니다.
방학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서운하고 한편으로 시원하고 홀가분하여 만감이 교차되는데 며칠 지나고나니 어떻게 배웠는지 우리 학생들이 내 핸드폰으로 문자를 연신 보내주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침식사했어요.
공부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런 간단한 문자들이 앞을 다투어 도착하는데 한심한 선생님은 핸드폰문자를 쓸 줄 몰라서 한 번도 답장을 보낼 수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개학을 하는 날 우리학생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시 모였습니다. 누가 누가 방학숙제를 잘해왔나 방학숙제검사를 하는데 한학생의 방학책속에서 쪽지하나가 툭 떨어졌습니다.
무심코 집어 들어 펴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놀랍게도 나에게 보내는 안부편지 였습니다.
내용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때와 다름없는 그 몇 마디가 다였지만 공부를 가르쳐 주어 고맙고 떨어져있으니까 내가 너무 많이 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니 자기가 알고 있는 한국말을 총동원하여 들쭉날쭉 써내려간 그 편지 속에는 나에 대한 마음이 고스란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나는 당장 그 편지를 복사해서 교실뒤편에 “우리들의솜씨”란을 만들어서 붙여놓고 우리 공부방을 찾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멋진 러브레터 받아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나또한 정성을 다하여 보내준 편지 고맙게 잘 받았다고 답장을 써주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그 학생과 나는 러브레터를 주고받는 재미에 푹 빠졌었는데 어느 날 부터 우리 학생들의 출석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농촌에 본격적인 가을걷이가 시작된 것 입니다.
고양이 손도 빌릴 만치 바빠서 콩 튀듯 팥 튀듯 하는 학생들을 붙잡고 더 이상 공부방을 계속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날 우리공부방은 조기졸업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가르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아직 반도 못 가르쳤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끝 낼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슴이 쓰리고 아팠지만 어쩔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물바다를 이루며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한동안 허무함에 속을 많이 끓였는데 12월이 되자 김천시에서 다문화가정을 초청하여 망년회를 해준다는 행사에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 학생들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예상대로 우리 학생들이 모두 다 나와서 나를 반겨주는데 너무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그냥 가까운 이웃의 언니이고 이웃아줌마이고 싶습니다.
날씨가 궂거나 이웃집에 놀러가고 싶은 날 서슴없이 아기 손잡고 놀러 와서 부침개라도 함께 부쳐 먹을 수 있는 그런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함께 한국생활을 잘 적응해나가기 위한 것인데 내가 여러분들보다 좀 더 나은 것이 있다면 나는 여러분들보다 한국에 훨씬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내가 선생님할게 여러분이 학생을 하자”
나는 오늘도 우리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