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파랑길 강진 83코스
목리교-강진만생태공원-신평마을-백련사-다산초당-마점마을-석문구름다리-도암농협
20220712
1.마음이 닿는 곳 걍진만생태공원, 만덕산백련사와 다산초당
7월 12일 1박2일 남파랑길 81~83코스 탐방을 떠났다. 그런데 첫날 81코스와 82코스를 건너뛰어 83코스를 진행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진행할까? 순서를 따라 차례대로 진행하면 좋을텐데, 마음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행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목리교 서단 입구 앞에 버스가 멈추었다. 남파랑길 83코스 시작지점은 목리교 동단 입구이기에 목리교를 건너 남파랑길 강진 83코스 안내도 앞에서 출발한다. 남파랑길 83코스의 행정구역 통과 지역을 보면 강진읍의 목리, 남포리, 학명리, 덕남리, 그리고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와 석문리를 거쳐 도암면 면소재지 항촌리 도암농협 하나로마트 옆에서 끝마친다.
강진읍 네 개 지역(목리, 남포리, 학명리, 덕남리)은 탐진강 하구의 광활한 강진만생태공원이 중심에 놓인다. 무성하게 자라는 푸른 갈대군락과 아직도 누런 갈대줄기로 서있는 갈대군락 사이의 뎈길을 따라가며, 백조 조형물과 문학작품 배경지 안내글, 강진문인협회에서 전시한 시 작품들, 강진만의 생물 이야기를 살피는 즐거움이 크다. 특히 강진만생태공원의 생태탐방학습관 앞 갯벌에서 짱뚱어 떼와 칠게 떼 모습을 살피는기회를 누린 것에 지금도 감격한다.
지형적으로는 강진읍을 감싸는 세 개의 산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강진읍의 진산 보은산이 북쪽에서 강진읍내를 막아주고, 강진읍의 안산 금사봉이 동남쪽에서 독특한 형상으로 서 있으며, 서남쪽에서는 만덕산이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자세로 늠름하다. 강진읍 동편에서 탐진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고, 강진천은 강진읍 서편에서 흘러와 탐진강과 합수하여 하구에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드넓은 기수역(汽水域)을 형성한다. 그 기수역에 강진만생태공원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탐진강을 경계하여 보은산과 만덕산은 서쪽에서, 금사봉은 동쪽에서 서로 호응하고 있으며, 강진천을 경계하여 보은산은 북쪽에서, 만덕산은 남쪽에서 호응하며 강진읍내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남파랑길은 강진읍내를 통과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의 첫 유배지 사의재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있는 강진읍내를 거쳐 강진만으로 나온다면, 남파랑길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와 4년 동안 기거했던 곳으로, 오갈 데 없는 다산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동문 밖 한 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어 주었고 다산은 이곳에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걸었다. 이곳에서 6명의 제자를 길러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는 등 다산 실학사상 탄생의 모태가 됐던 곳"이라고 한다. 사의재에서 머문 뒤 다산은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산방 등 7여 년을 전전하다가, 1808년 마지막으로 옮겨간 곳이 다산초당으로 이곳에서 10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영랑 김윤식은 1930년대 주옥 같은 순수시를 발표한 시문학파 대표 시인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품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몇 줄은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길손은 영랑의 시들 중에서도 이 작품이 늘 가슴을 물들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김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전문) 감잎에 단풍이 물드는 추석 무렵, 누이는 추석 걱정을 하다가 감잎 단풍에 사랑의 물결이 밀려오고, 누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감잎 골골이 붉게 물드는 누이의 마음처럼 붉게 물든다. 누이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의 단풍으로 물들고, '나'는 누이의 마음에 감동하는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아름다운 마음이 감잎이 물드는 모습으로 붉게 타오른다.
강진만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강진의 관문이며 제주도의 출발지였던 남포에서 강진만자연생태공원을 나와 강진만 방조제 자전거도로를 따라 걷는다. 강진읍 덕남리 임천배수장을 건너 강진읍에서 강진군 도암면으로 건너갔다. 철새도래지 해창포구가 펼쳐져 있다. 맞은편 강진만 동안에는 강남방조제와 구로선착장이 보인다. 그리고 멀리 대섬(죽도)와 가우도 청자타워가 보이고, 맨 끝에는 완도 옆의 고금도가 실루엣으로 들어온다. 강진만은 남쪽 끝 마량에서 남해 고금도와 완도를 앞에 두고 있다.
해창포구에서 만덕리 신평마을을 거쳐 만덕산 아래 백련사로 올라갔다. 만덕산 일주문을 통과하여 아름다운 숲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길을 허겁지겁 걸었다. 해탈문을 통과하여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시간에 쫓기고 있지만 백련사 만경루에 올라 강진만 구강포를 감상하기로 한다. 만경루 앞 수령 150년의 배롱나무는 아직 꽃망울도 덜 맺쳐 있다. 현실의 삭막함을 진분홍 배롱꽃이 피어나는 여름날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보충한다. 강진만 너머로 장흥의 천관산은 의젓하기 그지없다. 고려 중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거북받침돌 위에, 조선후기에 사적비를 세워 올린 보물 1396호 '만덕산백련사사적비'는 시간에 쫓겨 그대로 통과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길은 혜장스님과 다산이 서로를 찾아가던 오솔길이라고 한다. 1805년 4월 17일 혜장스님은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과 처음으로 만났다. 혜장은 다산의 심오한 학식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혜장은 다산에게 보은산 고성사에 작은 선방을 마련해 주었고 다산은 이 산방을 보은산방이라 이름하였다. 혜장의 호 아암(兒菴)도 거침없고 직선적인 혜장의 성격을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지라는 뜻으로 다산이 지어주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초의선사로 이어지고 추사 김정희로 이어진다고 한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길은 그래서 학문과 사색과 구도의 길이 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혜장(惠藏1772~1811)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서 지은 탑명(塔銘)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빛나는 우담발라화(優曇鉢羅花)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었네. 펄펄 나는 금시조, 잠시 앉는가 했더니 곧바로 날아갔네.” 다산은 혜장을 삼천 년만에 한 번 피는 우담발라화이며 수미산까지 날갯짓 한 번으로 단숨에 날아가는 금시조에 비유했다.
'천일각(天一閣)'에 올랐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 '천일각(天一閣)'이라 한다. 천일각은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는데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고 한다. 천일각에서는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고 강진만 너머 장흥의 천관산이 보인다. 외롭고 고단한 유배생활의 다산을 생각했다. 강진만을 따라내려가 마량에서 완도와 진도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강화도에서 한강을 따라오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는 고향마을,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을까? 그리고 진도에서 서해로 나가면 형님 정약전이 유배생활하고 있는 흑산도, 형님은 풍토병에 걸리지 않고 유배생활을 잘 견디시고 계실까?
동암 송풍루, 연지석가산, 다산초당, 청석 다조, 약천, 정석(丁石) 각자, 서암 다성각 등, 갈 길은 멀고멀고 볼 것은 많고많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짜장면 우격다짐 넘기듯 마구 사진을 찍으며 천방지축이었다. 혜장과 다산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겼다는데,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다산과 혜장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다산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는 대청은 지금도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다산이 혜장을 맞이하는 듯, 다산의 숨소리가 고요히 울려나온다.
다산초당 오르내리는 길은 지상에 솟아오른 뿌리들이 덮여 있다. 그 길이 통행에 어려움을 준다고 판단하여 현재 뎈길 조성을 하느라고 길을 막아 놓았다. 어느 것이 좋은지는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자연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그 길에서 정호승 시인은 깨달음을 얻어 명품 시를 남겼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정호승의 '뿌리의 길' 전문)
다산초당을 내려오면 귤동마을 차와 맛집의 거리, 남파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고개를 넘어 들녘으로 내려가 마점마을로 향한다. 마점마을 입구에서는 만덕산과 만덕리 들녘, 강진만이 멋지게 조망된다. 여름날 오후의 뙤약볕이 내리퍼붓고, 들녘에는 고요히 푸른 빛이 넘실거리며 강진만 동쪽 너머의 천관산은 흰구름 속에서 눈길을 준다. 만덕산은 우뚝하게 솟아 그 아래 작은 고개를 사이하여 동과 서에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품고 있다. 그 오솔길에 다산과 혜장의 아름다운 교유가 역사의 흔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며 길손은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조선 정조시대 개혁의 역사, 당쟁, 실학사상, 동백나무숲, 백련결사, 백련사사적비 등 제대로 느끼고 배우며 탐방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천방지축 날뛴 꼴이다. 그 길을 걸었지만 그 길은 길손의 오롯한 길이 되지 못하고 그냥 스쳐왔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점마을을 넘어서 석문계곡으로 내려오면 기암괴석의 석문산과 마주하게 된다. 석문공원 구름다리는 석문산과 노적봉 사이의 공중에 걸린 현수교이다. 노적봉은 만덕산에서 이어진 산줄기이므로 구름다리를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만덕산과 석문산을 잇는 다리라고 해야 한다. 안내판에 적힌 대석문과 소석문 지명이 어디를 뜻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기암괴석 노적봉과 석문산 사이의 뻥 뚫린 곳을 석문이라 하여 대석문, 그리고 석문산 너머 남쪽의 석문산과 덕룡산 사이을 대석문에 호응하여 소석문이라 이르는 것 같다. 대석문은 큰바위문길, 소석문은 작은바위문길, 길손은 이렇게 파악하고 구름다리를 건넌다. 강진의 주작산과 덕룡산을 산행한 때가 까마득하다. 주작덕룡 능선은 남해와 서해 다도해 풍경을 감상하는 명소이다.그런데 석문산과 노적봉이 있는 석문계곡의 비경은 외부 조망이 아니라 이들 품 속에서 노는 풍경이 아름답다.
석문산을 동남쪽으로 우회하여 도암면의 중심지인 면소재지를 내려다보며 소석문 어름의 길로 내려왔다. 도암초등학교와 도암중학교가 작은 개울이 흐르는 봉황로를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파랑길은 봉황로에서 작은 개천 다리를 건너 석문리 들녘을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신리마을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석문산과 노적봉 그리고 멀리 만덕산이 한눈에 잡힌다. 그리고 석문산 남쪽으로 덕룡산 산줄기가 용처럼 꿈틀거린다. 도암중학교 앞을 통과하여 지방도 55번 백도로와 만난다. 백도로를 가로질러서 방금 봉황로에서 건넜던 작은 개천과 재회한다. 개천에 놓인 다리가 장촌교, 장촌교를 건너 도암면 항촌리 도암면 면소재지로 들어섰다. 지척에 있는 도암면의 중심도로 도암중앙로로 나오면 도암농협과 하나로마트, 도암농협하나로마트 옆에 남파랑길 강진 8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힘들었던 남파랑길 83코스를 마친다.
2.탐방 과정
남파랑길 83코스 시작점은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목리교 동단에 있으므로 목리교를 건너 목리교 동단으로 간다.
강진만생태공원, 백련사, 다산초당, 세 곳을 모두 들를 수 있다. 안내도 위쪽으로 올라가 탐진강을 살핀다.
왼쪽에 강진읍의 진산 보은산 우두봉이 있다.
남파랑길 강진 83코스 안내도 앞에 흰색 자동차가 세워져 있어 안내도 정면에서 사진찍기가 불편하다.
탐진강 동쪽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와 탐진강 서쪽 강진읍 목리를 이어주는 목리다리. 안전점검 결과 2022년 5월 12일부터 차량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왼쪽 고층아파트 왼쪽 산에 강진의 랜드마크 고려청자가 대형 부조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남파랑길 83코스 시작점 표지가 안내도 오른쪽 기둥 아래에 붙어 있다.
목리교 옆에 새 다리 목리교가 생기면서 구목리교라고도 불린다. 목리다리가 생겨나기 전 탐진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이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중앙 뒤쪽에 보이는 산은 서기산인 듯.
바로 앞에는 2024년 12월 개통 예정인 목포-영암-해남-강진-장흥-보성을 잇는 경전선 연장 철도의 탐진강 철교가 보인다. 뒤쪽에는 강진의 명산 만덕산이 우뚝하다.
왼쪽에 금사봉이 멋지게 솟아 있다. 탐진강은 남해 바다로 흘러가고 그 위에 탐진강 철교가 건설되어 개통을 앞두고 있다.
구로선착장은 82코스, 남파랑길 83코스는 강진만생태공원 방향으로 탐진강 서안을 따라 이어간다.
탐진강이 범람하여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 것이 1932년 12월이라고 한다. 오른쪽 뒤에 만덕산이 우뚝하다.
오른쪽 보은산 산줄기가 내려앉는 곳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가 있다. 왼쪽 산에 고려청자 형태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 뒤 오른쪽 산은 서기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오른쪽 탐진강 목리교 동단에서 목리교를 건너 목리교 서단에서 탐진강 둑방 서안을 따라 내려왔다.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이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와서 두 번째로 옮긴 유배지이며, 마지막으로 옮긴 곳이 다산초당이라고 한다.
금사효무(金沙曉霧, 금사봉의 새벽안개)가 명품인가 보다. 탐진강 위의 철교가 2024년 12월에 개통될 예정이라고 한다.
왼쪽에 백조조형물과 벡조다리가 있다. 오른쪽 만덕산 줄기가 내려온 곳이 해창포구로 철새군락지이다.
뒤쪽의 금사봉이 멋지다. 백조 조형물은 엄마 백조와 아기 백조 세 마리 등 모두 백조 네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청춘의 백조 두 마리 조형물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 맨 끝에 고금도가 보인다.
오른쪽에 강진군상하수도 시설물이 늘어서 있고, 정면에 만덕산이 우뚝하다.
뎈길 가드레일에 강진문인협회에서 게시한 여러 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에 해창포구, 왼쪽 쑥 튀어나온 곳이 구로선착장, 그 뒤에 가우도, 중앙 맨 뒤에 고금도가 보인다.
청춘의 백조 한 쌍이 사랑을 나누는 백조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이 펼쳐져 있다.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뎈길을 따라 강진만 생태탐방학습 홍보관 앞을 거쳐 강진천을 가로지른다.
위쪽에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남포마을이 보인다.
동쪽의 탐진강과 서쪽의 강진천이 합수하여 탐진강 하구 강진만을 형성한다. 뒤쪽에 작은 섬 죽도와 그 오른쪽에 가우도, 그 뒤에 고금도가 보인다.
해창 철새도래지까지는 3.5km, 강진만 해변의 자전거도로는 강진읍-도암면 해창-신전면 사초리까지 왕복 50km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남파랑길은 도암면 해창까지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는데 자전거를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여름날의 배롱꽃은 선비의 꽃이라 이른다. 선비의 집 마당에 심어 여름날 독서하고 쉬는 틈틈이 배롱꽃을 즐겼다고 한다. 배롱꽃은 세 종류의 빛깔, 흰색, 분홍색, 붉은색 꽃이 있다. 이 배롱꽃은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먼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다. 강진만 동쪽 방조제 끝에 강남배수장이 있으며, 그 오른쪽 툭 튀어나온 곳은 구로선착장, 그 오른쪽 뒤의 작은 섬은 죽도, 그 오른쪽 뒤에 청자타워가 있는 가우도가 가늠된다.
강진만 방조제에 의하여 생긴 유수지에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다. 만덕산 아랫마을은 강진읍 덕남리 덕동마을인 듯.
강진만 서안을 따라오다가 생태공원을 거쳐 다시 방조제 서안으로 올라왔다. 왼쪽 뒤에 강진 읍내가 보인다. 왼쪽에 강진천, 오른쪽에 탐진강이 흘러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해변의 건물은 궁전비치 모텔, 그 앞이 해창포구, 그 앞 작은 섬은 죽도, 그 오른쪽 뒤가 가우도, 맨 끝에 고금도가 보인다.
배수장이 강진읍 덕남리에 위치하지만 임천리 임천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관리하기에 임천배수장이라 명명한 것 같다.
궁전비치모텔은 폐업했다고 한다. 강진읍 덕남리에서 도암면 만덕리로 넘어간다.
건너편 왼쪽은 강진군 칠량면 송로리 칠량농공단지, 오른쪽은 칠량면 영복리 만복마을인 듯. 중앙 뒤쪽에 천관산이 구름 속에서 모습을 살짝 보인다.
중앙의 가우도와 그 오른쪽 도암면 신기리 월곶 망호선착장을 잇는 해상보도교, 맨 끝에 고금도가 분명히 보인다.
해안관광로에서 신평리교차로로 나가 교차로에서 왼쪽 방향 다산로를 따라 이어간다.
다산로에서 신평마을 방향으로 진입한다.
간척농지와 강진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중앙 왼쪽 뒤에서 장흥의 천관산이 넉넉한 모습을 보인다. 맞은편 강진만 동안은 칠량면 영복리 만복마을 일대이다.
신평마을은 1960년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암면 덕산마을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행정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지명은 만덕리 동쪽 평야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신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평마을은 만덕산이 찬바람을 막아주고 만덕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 등의 지형적인 장점을 살려 고품질의 밭작물을 생산하고 있다.(강진일보, 2021.10.28)
왼쪽으로 고개를 넘어 도암면 만덕리 백련사길로 이어간다.
신평마을에서 고개를 넘어오면 중학교 과정인 대안학교 '늦봄문익환학교' 입구가 나온다. 남파랑길은 백련사길 오른쪽으로 백련사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만덕산 봉우리가 보인다.
만덕산 산봉이 연꽃 봉오리처럼 솟아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151호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목 약5.2ha 면적에 7m쯤 되는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간중간에 보이는아득하고 아늑한 바다 풍경은 숨막힐 듯 아름답다. 동백나무숲 사이사이에는 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고목들도 자라고 있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10리 오솔길에 있는 야생 차밭을 다산(茶山)이라고 한다.
백련사 해탈문을 지나서 남파랑길은 왼쪽 다산초당 방향으로 꺾이지만 오른쪽 백련사 만경루에 다녀오기로 한다.
수령 약150년의 배롱나무가 듬직하다. 배롱꽃이 피어 있으면 환상적일 것이다.
만경루 대청마루로 들어가 강진만 구강포를 조망한다.
배롱나무 왼쪽 뒤에 흰 청자타워가 세워져 있는 가우도가 보인다. 맞은편 강진만 동안은 대구면 저두리 일대일 것이다.
백련사 만경루에 올랐다가 이곳으로 되돌아와 다산초당을 향하여 고개를 넘어간다.
맞은편 강진만 동안에 위치한 마을은 칠량면 영풍리 만복마을 일대인 듯.
왼쪽 100m 지점에 해월루가 있지만 고개를 넘어 다산초당으로 이어간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이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고 한다.
천일각 현판 아래 공간으로 강진만 뒤쪽 장흥의 천관산이 둥두렷하다.
왼쪽에 죽도 섬이 보인다. 그렇다면 맞은편 강진만 동안 마을은 칠량면 봉황리 옹기마을인듯.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으로 '시대의 보배 정약용 선생의 산방'이란 뜻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다산초당 제4경이라 일컬어진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촉촉히 젖어 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다.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마당의 돌은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다. 이 돌을 부뚜막으로 삼아 청동의 화로에 약천의 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다산이 차를 마시며 저술로 침침해진 눈과 피로한 몸을 돌보던 곳으로 다산초당 제3경이다.
다산초당 왼편 뒤쪽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라 적힌 각석은 유배생활동안 그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암(西菴)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 윤종진을 위해 '순암호기'를 직접 써 주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야주로 돌아가게 되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해 평생 동안 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냈으며, 이 차는 금릉다산향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와 마점마을을 향하여 고개를 넘어 들녘으로 나갔다.
강진만 맞은편 뒤쪽 중앙에 장흥의 천관산 연대봉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에서 중앙의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왔다. 오른쪽에 '전라남도인재개발원' 연수원이 있다.
남파랑길은 마점마을 왼쪽으로 돌아 고개를 넘어 산길을 타고 도암면 석문리 석문계곡으로 내려간다.
마점마을을 통과하여 왼쪽 고갯길을 넘어 '남도명품길' 제1구간 인연의길을 따라간다.
강진만 맞은편은 칠량면 영풍리 영풍마을 일대인 듯. 오른쪽에 장흥의 천관산이 구름에 가려 있다.
바위 위의 석문정이 멋지다.
노적봉전망대 방향으로 이어가다가 노적봉전망대 아래서 전망대로 오르지 않고 구름다리로 넘어간다. 기암괴석의 암봉 사이를 석문이라 명하여 이곳은 대석문, 석문산 남쪽과 주작산 사이는 소석문이라 이르는 듯.
만덕산 산줄기 아래를 타고 아래 석문계곡으로 내려와서 석문공원을 통과하여 구름다리로 올라왔다. 오른쪽 도로는 지방도55번 백도로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석문산과 노적봉 사이의 이곳을 대석문이라 이르는 듯하다.
석문산 맞은편 노적봉 위 산봉아래의 석문정이 멋지다. 만덕산 산줄기가 석문산 맞은편 산줄기로 이어지는 것 같다.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노적봉전망대에 올라가야 석문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방도 55번 백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기암괴석의 석문산과 노적봉 사이를 대석문이라 이르는 것 같다.
세종바위를 대석문 포토존에서 보아야 하는데 이곳에서 세종바위의 형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 함장암터와 석문산 정상을 거쳐 소석문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소석문은 대석문에 대응하여 석문산 아래를 이르는 것 같다. 남파랑길은 직진한다.
남도명품길은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로 불리는 정약용 남도 유배길을 따라 마점마을, 석문공원, 도암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다산·바람·꽃이 있는 사색의 명상길'이라 명명되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가 후원하는 2016 바스락(樂)길 걷기여행에 강진군 '남도명품길'이 선정되어 걷기 행사를 한 표지판이 지금도 걸려 있다.
맞은편은 강진만의 저두리 일대일 것이라 추정한다.
석문산 허리를 감고 걸어서 이리로 내려왔다.
길 왼쪽에 도암초등학교, 길 오른쪽에 도암중학교가 보인다. 남파랑길은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 들녘으로 나간다.
남파랑길은 도암신리길을 따라 오른쪽의 신리마을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틀어 왼쪽의 도암중학교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석문산, 중앙에 노적봉, 맨 오른쪽에 만덕산이 이어져 있다.
도암중학교 앞을 통과하여 지방도55번 백도로를 건너왔다. 오른쪽에 석문산, 왼쪽에 주작산 줄기가 보인다.
장촌교를 건너 장촌길을 따라 도암중앙로와 만나는 곳까지 진행하여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하나로마트가 보인다.
도암면 면소재지인 도암면 항촌리 지역이다.
남파랑길 84코스를 어렵게 마치며 기념한다.
첫댓글 나그네 되어 목표애만 열중하다보니 들여다 볼 기회를 놓치게 된것에 많이 안타까웠는데
선생님의 글속에 다시 그곳을 찬찬히 둘러보는것처럼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언제나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움은 아득함으로 밀려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감사합니다.